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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8화 (18/121)
  • 18화. 하얀 죽음의 가면 (6)

    밀리엄은 ‘벌써 그렇게….’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보다가, 갑자기 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들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나를 발견한 수사관은 좀 전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밀리엄을 보았다.

    “선배님, 이 숙녀분은…?”

    “베로니카 캠벨 남작님이시다. 내 동행인이고. 베로니카, 여긴 내 옛 후배인 멜리사 위브 수사관입니다.”

    “안녕하세요, 수사관님.”

    “앗, 안녕하십니까. 남작님….”

    [ 인물정보 ‘멜리사 위브’ 획득 ]

    짧고 어색한 악수와 함께 시스템 문구가 반짝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리고 시스템창이 사라진 자리에, 나와 밀리엄을 번갈아 보며 눈을 빛내고 있는 멜리사 위브가 있었다.

    “저, 선배님.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근한 동행인이라면?”

    “……좋을 대로 생각해.”

    “와, 세상에.”

    경쾌한 인상의 붉은 머리 수사관 아가씨가 쩍 벌어진 입을 틀어막고 과장되게 놀라는 시늉을 했다.

    진짜 놀란 것도 물론 있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이만큼 놀랐다는 걸 당신한테 알려주고 싶다’에 가까운 듯한 몸짓이었다.

    “선배님께도 드디어 봄날이… 이걸 저 혼자만 알고 있을 수는….”

    “멜리사 위브. 사건수사 때문에 온 게 아니었나?”

    밀리엄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눈을 감고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새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던 멜리사 위브는, 그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급하게 안경을 고쳐 쓰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겉옷 안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수첩을 꺼내 들었다.

    표지에 왕립수사국 마크가 새겨진 수첩이었다.

    ‘만년필이 어디 있지….’ 하고 중얼거리며 옷 위를 더듬거리는 멜리사 위브를 보다가 조금 착잡해진 나는 다시 밀리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멜리사의 손에 들린 수첩 표지를 복잡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 한숨은 영 미덥지 못한 후배의 등장 탓일까. 아니면 옛 직장에 남은 미련 탓일까.

    나는 두어 시간 사이 지독한 피로에 잠식되어 버린 듯한 밀리엄의 그늘진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또다시 마주한 누군가의 죽음 앞에 저 남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너무 괴롭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의미 없는 감상이 불현듯 찾아들었다.

    ***

    영 미덥지 못한 행동거지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멜리사는 꽤 괜찮은 조력자 캐릭터였다.

    적어도 밀리엄이 수사에 개입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랬다.

    이제 당신은 수사관도 뭣도 아니니 현장에서 얼쩡대지 말고 빠지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오히려 밀리엄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하고 든든하다는 듯 굴었다.

    현장에 발을 들여도 뭐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머리를 긁적이다 이것저것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물론 나에게까지 그런 태도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었기 때문에 나와 밀리엄은 일단 행동을 따로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폴리스라인이 쳐진 문밖에 선 채로, 병실 안에서 멜리사와 함께 현장을 살피고 있는 밀리엄을 지켜보다가 슬쩍 몸을 돌렸다.

    운이 좋으면 현장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밀리엄이 열쇠를 발견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운이 아주 좋을 경우의 이야기다.

    그리고 여기서 운이 좋다는 건 <블루 달리아>가 생각보다 시시한 저난도의 게임일 때를 말한다.

    그러니까 상식적으로는, 일이 이렇게 돌아간다면 열쇠를 찾는 것은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베로니카… 그러니까 내 몫이 될 공산이 크지.

    결국 204호는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직접 탐색할 기회가 생길 테니, 일단은 당면한 사건에 집중해봐야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밀리엄이 저러고 있는 동안 멀뚱히 서서 농땡이나 피우고 있는 게 베로니카 캠벨의 역할은 아닐 것이 아닌가.

    하다못해 죽은 패트릭이 조이와 함께 했던 것처럼 병원 곳곳을 살펴보며 탐문수사라도 해보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무작정 걸음을 옮기려는데, 멀지 않은 거리에서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고 있는 간호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곁을 지나가는 척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째 자꾸 흉흉한 일이 생기더라니 기어이 경찰까지….”

    “차라리 경찰이 와서 제대로 수사하는 게 낫지. 저번 약품 창고 때처럼 별 증거도 없이 엄한 간호사들만 도둑으로 몰아가는 것보다야.”

    약품 창고. 도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대화였다.

    [ 키워드 ‘약품 창고에서 일어난 사건’ 획득 ]

    게다가 쓸모있는 화제이기까지 했던 모양인지 시스템창이 반짝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시스템창이 사라진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화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도난사건이었던 건 확실한데, ‘저번’이란 건 정확히 언제고, 없어진 약품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뭔가 독극물 같은 작용을 하는 약이어서, 그걸 범행에 사용했나?

    “저, 캠벨 남작님.”

    그렇게 한창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리니 병원장 베네딕트 홀터스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는 제대로 된 인사도 나누지 못했었지.

    다짜고짜 나타나 밀리엄과 다투기 시작하더니, 닥터 로이드의 고백으로 말다툼이 끝난 뒤에도 내 쪽은 본 척도 하지 않기에 딱히 내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어… 안녕하세요, 병원장님.”

    나는 얼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그런 나를 본 병원장이 놀란 얼굴로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까 미처 인사드리지 못해 송구스럽다는 말을 드리러 온 거니까요.”

    ‘미처 못했다’기엔 정말로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나는 잠깐 고개를 기울인 채 곰곰이 지난 상황을 되짚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밀리엄이 조금 전 멜리사 앞에서 내 소개를 할 때 베네딕트 홀터스 또한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아까는 그냥 밀리엄 켄트우드의 동행인인 줄로만 알고 무시했는데, 소개를 듣고 보니 캠벨 남작이라 뒤늦게라도 아는 체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모양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백부님께서 저희 병원 운영에 큰 도움을 주셨답니다.”

    “아, 백부님이 병원에 투자를 하셨나요?”

    “후원을 해주셨지요. 평소 자선사업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베네딕트 홀터스가 말을 걸어온 의도를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윌 그렉슨이 내게 잘 보이려던 이유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조지 캠벨이 죽었고 그 유산이 난데없이 조카딸에게 넘어갔으니, 영세한 동업자나 후원을 받던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안하겠지.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직후이니 더 애간장이 타기도 할 테고.

    베네딕트 홀터스는 행여 내 입에서 조금이라도 후원에 대해 부정적인 말이 튀어나올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고 있자니, 이렇게 된 김에 이 상황을 잘 이용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 말씀을 들으니, 저도 백부님 뜻을 따라 후원을 이어가고 싶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베네딕트 홀터스를 향해 최대한 호의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가 대번에 안심한 듯 눈을 빛냈다.

    당장이라도 향후의 후원 규모에 대해 논의해보자고 말할 것 같은 눈동자를 슬쩍 무시한 채로,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가 병원에 대해 아주 무지한 상태라서요.”

    “그 부분에 대해서라면 걱정하실 필요가,”

    “물론 저는 백부님의 안목을 믿지만, 좋은 후원자가 되기 위해 기본적인 것 정도는 알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병원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떻게 세워져서 어떤 기치 아래 운영되고 있는지, 혹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같은 아주 기본적인 사항들 말이에요.

    내 말에 베네딕트 홀터스는 이해하겠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해를 한 것인지, 아쉬운 게 본인이라 이해해주는 척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우선은 병원을 좀 둘러보고 싶은데,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는 정말로 순수하게 병원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후원예정자를 가장한 채 베네딕트 홀터스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하하, 남작님께 저희 병원을 소개해드릴 수 있다니 제게는 그저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돌아온 대답은 아주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

    속물 병원장 베네딕트 홀터스가 말하기를, 8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성 조나단 병원이 메이슨 교단의 소유가 된 것은 20년쯤 전의 일이라고 한다.

    20년 전 소유주가 바뀌면서 지금의 건물을 새로 지어 이사했고, 그를 계기로 규모도 대폭 커져서 이젠 수도에서도 손꼽히는 대형 병원이 되었다고.

    나는 의사가 몇 명이니 간호사가 몇 명이니 무슨 수술이 국내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느니 하는 베네딕트 홀터스의 병원 자랑을 배경음악 삼아 1층 복도를 천천히 거닐었다.

    중간에 몇 번 정도 긍정적인 호응을 보여주었을 뿐인데 내가 이미 후원을 계속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그는 아까에 비해 많이 편해진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 정도 풀어졌으면 슬슬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나는 그의 이야기가 잠시 끊어진 틈을 타 슬쩍 입을 열었다.

    “저, 원장님. 실은 아까 복도를 걷다가 이상한 이야기를 하나 들었는데요.”

    “이상한 이야기라 하심은…”

    “얼마 전에 약품 창고에서 뭔가 좋지 못한 일이 있었다고.”

    “아.”

    베네딕트 홀터스는 생각만 해도 골치가 다 아프다는 듯 짧은 탄식과 함께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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