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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5화 (15/121)
  • 15화. 하얀 죽음의 가면 (3)

    왠지 괴상하고 딱히 설득력도 없는 논리에 말려드는 느낌이 들었지만, 자존감에 스크래치가 난다고까지 말하는 사람 앞에서 더 괴로워하는 것도 민폐 같았기 때문이다.

    “…화는 좀 가라앉았어요?”

    “덕분에요. 자꾸 점잖지 못한 꼴을 보이게 돼서 영 부끄럽네요.”

    “점잖지 못했던 건 저쪽이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하진 않고요?”

    별로……?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밀리엄이 예상 밖이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척 봐도 답이 나오는 상황 아니었나?

    별로 유쾌한 기억도 아닐 것 같은데 괜히 다시 떠올리게 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동생분과 관련해서 저쪽이 뭔가 쓰레기 같은 짓을 했겠거니…. 솔직히 말하는 것만 들어도 딱 견적이 나오던데요.”

    “너무 내 편의대로만 생각해준 것 아닙니까?”

    “내 편의대로 생각한 거죠. 사람한테 처신에 마땅한 대우 운운하는 인간치고 제대로 되먹은 경우를 본 적이 없거든요.”

    그건 보통 개짓거리를 한 사람이 자기가 한 짓을 정당화할 때 쓰는 말이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밀리엄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지 않았다.

    <레드 헤링>의 주인공 밀리엄 켄트우드는 이성적이고 침착하며 정의로운 캐릭터였다.

    타당한 이유 없이는 분노하지 않는 캐릭터이기도 했다. 하지만 불의를 앞에 두고는 제 일처럼 화낼 줄 아는 인물.

    후속작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상당한 시간차를 고려하더라도, 밀리엄 켄트우드라는 캐릭터를 이루는 근간 자체가 흔들리지는 않았으리라.

    왜, 당장 어제만 해도 어린 베로니카가 캠벨 저택에서 당했던 부당한 대우에 서늘하게 분노해주지 않았던가.

    밀리엄 켄트우드는 애초부터 그렇게 설정된 캐릭터인 것이다.

    “아까 했던 말은 진심이에요. 나는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잠자코 내 말을 듣고 있던 밀리엄이 별안간 주춤한 것은 그때였다.

    그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사람처럼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이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믿지 말아요, 베로니카.”

    아래로 낮게 깔린 금빛 시선이 연갈색 눈썹과 함께 흔들렸다.

    아, 내가 또 이 팔자 기구한 남자의 트라우마를 하나 건드린 건가?

    나는 믿었던 인간에게 처절하게 배신당해 일생의 신념을 꺾어야 했던 <레드 헤링> 결말에서의 밀리엄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과거를 가지고 저 얼굴로 저런 이야기를 하니 설득력이 대단하긴 했다.

    확실히, 여기서라고 저번 작품 같은 통수가 없으리란 법도 없지.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진지하게 자길 믿지 말란 식의 충고를 해버리면 나는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느냔 말이다….

    내가 그렇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속으로 머리털을 쥐어뜯고 있던 참이었다.

    “두 분 여기 계셨군요.”

    병원 건물의 뒷문을 통해 뒤뜰로 나온 남자가 우리에게 아는 체를 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아까 병실에서 만났던 탐정, 패트릭 헤이즈였다.

    “한참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으시기에, 산책이나 할 겸 찾으러 나와봤습니다.”

    패트릭은 기분이 상한 밀리엄이 그대로 돌아간다는 전개 따위는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말했다.

    “연인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연인 행세를 위한 연습에 열중하고 계시리란 생각까진 했지요.”

    밀리엄의 말에 패트릭이 씩 웃어 보이며 대꾸했다.

    내가 급조한 관계설정을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는 말이었다.

    나도 모르는 새 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던 모양인지, 패트릭 헤이즈가 나를 향해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남작님은 아주 훌륭한 연기를 하셨으니 그렇게 당황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처지인지라, 운 좋게 동지를 알아본 것뿐이니까요.”

    “그 팔은 역시 위장이었군요.”

    붕대를 감아 부목으로 고정해 놓은 패트릭의 왼팔을 보며 밀리엄이 말했다.

    그러자 패트릭이 붕대를 칭칭 감은 왼팔을 달랑달랑 흔들며 씩 웃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는 그러더니 대뜸 이렇게 물어오기까지 했다.

    “이 병원이 캠벨 남작가 사건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겁니까?”

    누가 탐정 아니랄까 봐. 나이롱 환자의 촉은 아주 훌륭했다.

    그는 밀리엄이 나와 함께 다니며 조사할 만한 사건이라면 하나밖에 없지 않느냐고 물으며 웃었다. 타당한 분석이었다.

    “켄트우드 씨만 오셨다면 저와 같은 사건을 조사하고 계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요.”

    “같은 사건이라고요?”

    “아, 모르십니까?”

    패트릭이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고, 나는 아주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실은 얼마 전부터 이 병원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환자들이 죽어 나가고 있답니다. 워낙 쉬쉬하는 터라 기사화되지는 않았지만….”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이미 소문이 자자하죠. 패트릭이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소곤 말을 이었다.

    [ 키워드 ‘성 조나단 병원 의문사 사건’ 획득 ]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질 않을까….

    웬 사이비 같은 종교단체 얘기가 나올 때부터 어째 이럴 것 같긴 했지만 내심 아니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일전에 예상했던 대로, 캠벨 남작가에서 일어난 사건은 <블루 달리아>의 시발점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허공에 둥둥 떠 있다 파스스 사라지는 새로운 사건 키워드를 쏘아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옆에서는 사건에 대한 패트릭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병원 측에선 단순히 병세 악화로 인한 사망이라고 주장하고, 수사국에서는 사건성이 없다고 판단한답니다. 저는 유족분의 의뢰를 받았고요.”

    “환자 행세에는 의사의 협조가 필요할 텐데요.”

    “그야 물론이죠. 사건 조사를 하다가 갱단에게 잘못 걸려서 당분간 숨어 지낼 곳이 필요하다고 둘러댔더니 기꺼이 협조해주던걸요. 닥터 로이드는 참 좋은 사람입니다.”

    협조 요청조차 거짓부렁이었다는 말을 패트릭 헤이즈가 자랑스럽게도 꺼내놓았다.

    하기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자랑스러울 일이기도 했다.

    병원 차원의 비리일 수도 있는 사건을 조사하면서 병원 소속인 의사에게 사실대로 전부 털어놓고 협조를 구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병원을 배신한 꼴이 되어버린 닥터 로이드에겐 조금 안타까운 일이겠으나,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억울함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두 분만 괜찮으시다면 저희 상부상조하는 건 어떨까요?”

    “상부상조요?”

    “예. 두 분은 제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 볼일이 있으신 것 아닙니까?”

    쓸데없이 촉이 좋은 나이롱 환자는 이번에도 정곡을 찔렀다.

    밀리엄은 졌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헛웃음을 터뜨렸고, 먼 산을 바라보며 코끝을 매만지던 내 앞에 선택지 창이 떠올랐다.

    [ 1. …맞아요. 찾아야 할 물건이 있어서요. ]

    [ 2. 죄송하지만 잘못 짚으셨어요. ]

    선택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저렇게까지 다 맞추는데 굳이 숨길 이유가 뭐란 말인가?

    “…맞아요. 찾아야 할 물건이 있어서요.”

    “그럼 더욱 잘됐군요. 두 분보다는 제가 병실을 뒤지기 더 수월한 입장이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예언서의 열쇠가 스토리상 제법 중요한 단서로 생각되는 만큼, 당연히 병실 탐색을 통해 찾게 되리라고 예상해왔던 것만 제외하면 그랬다.

    혹시 예언서의 열쇠는 탐색이 아니라, ‘성 조나단 병원 의문사 사건’을 해결하면 그 보상처럼 주어지는 아이템인 걸까?

    나는 이 질문에 밀리엄이 대답을 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의사를 확인할 겸 밀리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밀리엄은 조금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굳이 새 사건에 발을 걸칠 필요가 있는지 따위를 고민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밀리엄이 지금 무슨 고민을 하든, 결국에는 우리가 이 사건에 개입하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게임의 볼륨이 좀처럼 가늠되지 않아 머리가 아프긴 하지만, 어차피 키워드가 추가된 이상 사건에 엮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므로.

    그래서 밀리엄의 옷자락을 가볍게 당겼다. 이윽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밀리엄, 그렉슨 씨와 그러고 나온 마당에 우리가 직접 병실을 뒤지는 건 무리잖아요. 여기서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납득했다는 듯 답한 밀리엄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여기, 지금까지 사망한 환자 세 명의 신상정보예요.”

    선이 가늘고 깡마른 소년, 조이가 밀리엄에게 종이 세 장을 내밀었다.

    “이건 탐정님이랑 제가 병원에서 수집한 관계자 증언들을 정리해둔 거고요.”

    내 손에 전해진 것은 헤질 대로 헤진 가죽 수첩이었다.

    [ ‘패트릭 헤이즈의 수첩’을 획득했다. ]

    “탐정님이 두 분께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본인은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괜찮으시다고요.”

    이걸 다 기억하고 있단 말이지….

    나는 첫 등장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탐정으로서의 유능함을 뽐내고 있는 패트릭 헤이즈를 생각하며 손 안에 든 수첩을 만지작거렸다.

    밀리엄의 지인인 것부터 시작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존재감이 범상치 않은데, 혹시 앞으로 자주 등장하게 될 캐릭터인가?

    그렇다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탐정이라면 높은 확률로 조력자일 테니까.

    “고맙다, 조이.”

    “별말씀을요, 켄트우드 씨. 그럼 저는 이만 탐정님께 가보겠습니다.”

    얼마 전 열여섯이 되었다는 탐정 조수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병원 복도를 가로질러 병실을 향해 달려갔다.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밀리엄에게 질문을 건넸다.

    “저 애랑도 안면이 있나 보네요?”

    “저 애가 헤이즈 씨 옆에 딱 붙어 다니기 시작한 지도 벌써 한 해가 다 되어 가니까요.”

    “헤이즈 씨랑은 어떻게…”

    “무슨 사건에 휘말려서 감옥에 갈 뻔한 걸 헤이즈 씨가 구해줬다고 하던데요.”

    “아니, 조이 말고 당신이요.”

    “아…….”

    내 정정을 들은 밀리엄이 종이를 들지 않은 손으로 목 옆쪽을 매만지다가, 이내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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