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하얀 죽음의 가면 (2)
“실례가 안 된다면 두 분이 무슨 사이인지 여쭈어도,”
“실례입니다, 그렉슨 씨.”
아. 윌 그렉슨은 결국 밀리엄의 입에서 언짢은 목소리를 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말았다.
패트릭과의 대화는 또 언제 끊은 것인지 이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린 밀리엄의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이제 생각이 나네요. 구면이지요, 우리. 저번엔 성함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사라지신 터라 많이 서운했습니다.”
아무래도 내 파트너는 은근 유능한 데다 마당발이기까지 한 모양이다.
심지어 저쪽과는 그리 유쾌한 인연이 아닌 듯하고…….
눈을 휘며 인사를 건네는 주제에 밀리엄의 말투는 어제 집사를 몰아붙일 때 이상으로 서늘하게 비뚤어져 있었다.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눈동자만 빙빙 굴려대는 와중에, 윌 그렉슨의 이죽이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도 내 소개 정도는 하고 싶었습니다만, 켄트우드 씨가 워낙 이성을 잃으셨던 터라.”
“상상력은 여전히 풍부하시고.”
밀리엄이 사납게 빈정거렸다.
병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윌 그렉슨의 보호자는 환자처럼 창백하게 질려선 안절부절못하며 손톱을 깨물었다.
옆 침대에 홀로 누워 있던 남자는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고, 패트릭 헤이즈와 조이도 영 불안한 얼굴로 밀리엄의 뒤통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여간 스트레스성 위염이 도지기에 딱 좋은 분위기였다….
“남작님, 대체 이분과는 어쩌다,”
“남의 일에는 여전히 관심이 많으시고.”
잘생긴 입매 한쪽이 비죽 위로 말려 올라갔다.
불편해 죽겠는 와중에 쓸데없이 그림 같은 장면이라 괜히 야속해져서 슬쩍 눈을 흘긴 순간, 내 쪽을 내려다본 밀리엄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나와 윌 그렉슨 사이를 살짝 막아서며 말을 이어갔다.
“숙녀에 대한 무례까지 여전하시다면, 내가 이쯤에서 대화를 끊어드리는 것이 남작님께도 더 이로울 것 같군요.”
“웃기지도 않는군. 나는 네놈의 부도덕한 여동생에게 그 처신에 마땅한 대우를 해준 것뿐이야!”
이성을 잃은 윌 그렉슨이 대뜸 소리쳤다.
가뜩이나 싸늘했던 병실 분위기가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냉랭해졌다.
덕분이었다고 하기엔 조금 우습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대충 무슨 상황인지 감이 잡혔다.
안젤리나 캠벨과 관련해서 뭔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지간히 화가 날 만한 일이었나 본데.
부도덕이 어쩌고 마땅한 대우가 어쩌고 지껄이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십중팔구 저쪽에서 먼저 개짓거리를 했으리라.
“애당초, 불륜이나 저지르고 다니던 여자한테 숙녀는 무슨….”
콜록, 콜록!
별안간 등 뒤에서 기침 소리가 나기에 뒤를 돌아보니, 패트릭 헤이즈가 물컵을 든 채 사레에 들려 제 가슴팍을 두드리고 있었다.
패트릭의 등을 두드려주던 조이가 친절하게도 나를 향해 컵을 들어 보였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목구멍으로 뭘 넘겼다간 나도 저 꼴이 날 것 같았다.
그러니 우선은 몹시 불편한 데다 당초의 계획에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은 이 상황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아, 위경련 올 것 같아. 나 이런 거 진짜 싫은데. 정말 못하는데.
“저, 그렉슨 씨?”
“예, 예. 남작님.”
좀 전까지 이성을 놓은 채 언성을 높이던 것이 무색하게도, 내가 부르기 무섭게 윌 그렉슨은 다시 조금 전의 저자세를 되찾았다.
저럴 줄 알고 부른 거지만 진짜로 저렇게 나오니까 머릿속이 좀 아득해지네…….
아무튼 윌 그렉슨의 주의를 끄는 데 성공한 나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응시하고 있는 밀리엄을 내 뒤로 슬쩍 잡아당겼다.
움직이지 않고 버티려면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말릴 사람이 필요하다 싶었던 건지 그는 순순히 내 손길에 따라 주었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켄트우드 씨와 좋은 마음으로 만나고 있어서요.”
머리 위에서 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황상 밀리엄이 놀라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소리인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사과는 나중에 해야지. 일단은 지르고 보자.
어쩔 수 없었다. 이 병실에 찾아오는 게 껄끄러워지면 당연히 열쇠 찾기도 고달파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204호 환자인 윌 그렉슨이 향후 내 소중한 파트너에게 대놓고 악의를 드러내는 일이 없도록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조, 좋은 마음으로 만나고 계시다 함은, 그러니까….”
“그건 그렉슨 씨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알아서 이해해주시면 되겠죠?”
“남작님. 아직 잘 모르시나 본데,”
“아주 좋은 분이라고 직접 판단해서 결정한 일이고, 저는 제 판단력을 의심받는 상황이 별로 유쾌하지 않네요.”
아까의 반응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윌 그렉슨은 새 캠벨 남작인 내가 자기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것도 분명했다. 그러니 자신과 마찰을 빚은 전적이 있는 밀리엄과의 동행을 신경 쓰고 견제했겠지.
요컨대 윌 그렉슨은 내게, 정확히는 캠벨 남작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정확히 무슨 계산 관계가 있는지는 집에 가서 서류를 찬찬히 뜯어봐야 알겠으나, 확실한 건 적어도 이 관계에서 내가 갑이라는 사실.
나는 갑질이 진짜 싫지만… 정말 싫지만… 말하는 걸 들어보면 어느 모로 보나 저쪽이 악당 같은 데다가….
이 불편한 상황을 타계할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인가. 나는 어려서부터 창의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눈 딱 감고 협박을 하기로 했다.
나는 이미 당신의 조언이 필요 없을 만큼 밀리엄 켄트우드를 많이 안다.
심지어 정도 이상의 호감을 가진 관계다.
그러니 내 앞에서 그를 안 좋게 대하는 것이 썩 현명한 태도는 아니리라는 은근한 협박…….
청년 갑부 좀 됐다고 곧장 갑질부터 해댄 게 언젠가 업보가 되어 돌아온다면 달게 받아야지.
체질에 안 맞는 짓을 했더니 벌써 수명이 절반쯤 줄어든 기분이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윌 그렉슨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낭패감에 젖은 얼굴로 나와 밀리엄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그렇게 재빠르고 요란하게 굴러가던 윌 그렉슨의 머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반가운 결론을 도출했다.
“내가 순간 이성을 잃어… 큰 실언을 했군요. 미안합니다, 켄트우드 씨.”
“알면 됐습니다.”
밀리엄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예의상 빈말로나마 괜찮다고 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은 걸 보면, 정말 어지간히 화가 났던 모양이다.
하기야… 면전에서 가족 욕을 하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 게 당연하지.
하물며 그게 그냥 가족도 아니고, 생각만으로 애틋한 죽은 동생 이야기라면 말할 것도 없으리라.
어쨌든 결론적으로 내 진부한 계획이 그럭저럭 통한 덕에, 밀리엄에게 사과한 윌 그렉슨은 꼬리를 내리고 자기 침대로 돌아갔다.
그렇게 급한 불을 끄고 난 뒤에야 나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밀리엄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 밀리엄. 우리 잠시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까요…?”
이제는 내가 밀리엄에게 사과를 해야 할 차례였다.
***
“정말 미안해요! 상의도 없이 그런 소릴….”
“괜찮아요. 내가 친 사고를 수습해준 거잖습니까.”
“다른 방법이 생각나질 않아서, 진짜 어쩔 수가 없었어요.”
“괜찮다니까요. 조금 놀랐지만 화나지는 않았습니다.”
“혹시 따로 만나는 분이 있어서 곤란해질 것 같으면 내가 직접 만나 뵙고 해명을,”
“그런 사람 없으니 걱정 말아요.”
“아아아악. 내가 왜 그랬지…….”
병실에서 나설 때까지만 해도 솔직히 아주 조금은 뿌듯했다.
방법이야 어쨌든 내 파트너가 환자를 패고―설마 진짜 그랬겠느냐만― 쇠고랑을 차는 불상사는 막은 셈이었으니까.
그러나 사과를 하다 보니 후회가 폭풍처럼 밀려왔다.
당장의 작은 낭패를 막으려다 거대한 흑역사를 쌓은 기분이었다.
꼭 그래야만 했나?
그냥 친구라고만 했어도 되지 않았을까?
어쩌다 그런 극단적이고 부담스러운 관계를 내 입으로 설정해버린 거지?
그것도 저런 미남을 데려다가, 이 무슨 자의식 과잉된 소설주인공 같은 짓을…….
“나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베로니카. 오히려 계속 써먹어도 좋을 만한 핑계라고 생각해요.”
“계속 써먹긴 뭘 써먹어요…….”
“사건이 해결되기 전까진 계속 동행할 거였잖습니까? 그럼 당신이 그렇게 둘러대지 않았어도 언젠가 같은 소문이 났을 겁니다.”
내 사과를 받다가 도리어 날 달래야 할 상황에 처해버린 불쌍한 밀리엄은 친절하게도 내 핑계를 쓸 만하다고 인정해주고 있었다.
아, 이런 괜찮은 인간 같으니.
“소문이 먼저 나서 이상한 살이 붙는 것보단, 인정을 먼저 해버리는 쪽이 평판에도 더 좋을 거고요.”
“그건 너무 낙관적인 생각 아닐까요.”
남작 일가가 죽은 지 한 달도 안 돼서 남작의 조카와 남작 며느리의 오빠가 그렇고 그런 사이로 발전한 시점에 이미 막장드라마 서브플롯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정말로 멀쩡한 청년 앞길을 망친 쓰레기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이럴 게 아니다. 이럴 필요 없어. 저 사람은 사실 진짜 사람도 아니라고.
내가 별로 효과도 없는 자기 최면을 걸며 울상을 짓는 동안 밀리엄은 난처하다는 듯 뺨을 긁었다.
그러더니 대뜸 말하기를.
“계속 그러니까 좀 서운해질 것 같은데요, 베로니카.”
“그럼 그것도 정말 미안… 아니, 서운할 건 뭐예요?”
“내가 가짜 애인으로도 내키지 않을 만큼 형편없는 인간이라 괴로워하는 건가 싶어져서요.”
“그런 비약이 어디 있어….”
“나는 원래 곡해도 잘하고 비약도 잘합니다. 그러니 내 불쌍한 자존감을 생각해서라도 미안하단 말은 그만 해요.”
알았죠? 허리를 숙인 채 나와 눈높이를 맞춘 밀리엄이 재차 확인하듯 물어왔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