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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3화 (13/121)

13화. 하얀 죽음의 가면 (1)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병원 입구 위에 자랑스레 새겨져 있는 문장을 올려다보며 나는 다소 황망한 기분을 맛보았다.

기다란 마름모 안에 들어간 장미꽃 한 송이.

지하실에서 메이슨 교단의 문장을 보았을 때 내가 느꼈던 기시감의 근원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 성 조나단 병원 ]

“성 조나단이 메이슨 교단 소유였을 줄은….”

나와 함께 문 위를 올려다보던 밀리엄이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캠벨 저택에서 문제의 예언서를 얻는 데 성공한 것이 어제의 일이다.

예언서는 열쇠를 찾을 때까지 밀리엄이 맡아두기로 했다.

밀리엄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글쎄.

변변한 금고 하나 없는 베로니카의 집에 중요한 물건을 두는 것은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 같았다.

아무튼 당장 중요한 것은 성 조나단 병원 204호에 있다는 예언서의 열쇠를 찾는 일이었는데….

“곤란하게 됐군요.”

“그러게요.”

병원에 들어선 우리는 벽에 붙은 입원환자 명패를 보며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저어야 했다.

그럴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204호는 병실이었다. 세 명이 입원 중인 6인실.

정말이지 곤란한 일이었다.

진료실이나… 아무튼 뭔가 다른 용도로 쓰이는 곳이었다면 방이 비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들어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무단침입에 가까운 잠입도 어찌 보면 추리게임의 묘미 중 하나니까.

그러나 환자들이 입원해있는 병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의사와 간호사가 수시로 드나들 테고, 셋이나 되는 환자들이 동시에 자리를 비우는 요행을 기대하기도 어렵고, 어쩌면 환자에게 보호자가 붙어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

나는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상황 속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는 사이 환자들의 명패를 가만히 쳐다보던 밀리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가 보죠.”

“네?”

“병문안 온 걸로 위장해서요.”

그러더니 대뜸 병실 문을 열어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가공할 행동력에 당황할 틈도 없이, 얼떨결에 그를 따라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양쪽에 세 개씩 침대 여섯 개가 놓여 있는 널따란 병실 안에는 사람이 다섯 명이나 있었다.

환자가 셋.

보호자로 보이는 이가 둘.

문을 열고 들어서기 무섭게 그들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었고, 나는 급격히 떨리는 눈으로 밀리엄을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리고 그때였다.

“켄트우드 씨?”

제일 안쪽 침대에 앉아, 보호자로 보이는 소년과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남자 하나가 밀리엄을 알아보았다.

밀리엄이 나를 살짝 돌아보며 보란 듯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남자가 앉아 있는 침대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말끔히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헤이즈 씨.”

“아니, 켄트우드 씨가 여긴 어쩐 일로.”

“헤이즈 씨의 입원 소식을 들어서요.”

“제 입원 소식 따위를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다 아는 방법이 있죠.”

있긴 뭐가 있어? 나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부렁을 늘어놓는 밀리엄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들어오기 전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환자 명패에서 아는 이름을 발견해 도박을 걸어본 모양이었다.

뭐, 실패했어도 방을 잘못 찾아온 모양이라고 대충 둘러대고 나갔으면 그만일 테고.

그래, 성공했으니 된 거지…….

나는 조금 진이 빠진 채로 밀리엄과 남자의 대화에 집중했다.

‘헤이즈 씨’라고 불린 남자는 밀리엄의 등장에 눈에 띄게 당황한 눈치였는데,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라기보단 정말 순수하게 놀란 것처럼 보였다.

“살다 살다 켄트우드 씨의 병문안을 다 받아보다니.”

“저를 너무 매정한 사람으로 몰고 가시는군요.”

“사실이 그렇잖습니까. 그런데 뒤에 계신 숙녀분은….”

남자의 시선이 밀리엄의 등 뒤에 서서 그들을 관찰하던 내게 와닿았다.

“아, 이쪽은 베로니카 캠벨 남작님 되십니다.”

“……캐, 캠벨이라면,”

“베로니카. 여긴 패트릭 헤이즈 씨입니다.”

밀리엄은 ‘캠벨’이라는 말에 당황한 듯 입을 쩍 벌리는 패트릭 헤이즈를 말마따나 매정히 외면한 채 나에게 그를 소개해주었다.

나는 경악에서 의문으로, 그러다 이윽고 어떤 납득에 다다른 것 같은 패트릭 헤이즈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일단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헤이즈 씨. 베로니카 캠벨입니다.”

“아, 저야말로 몹시 반갑습니다. 남작님. 제 이름은, 방금 들으셨으니 아실 테고… 조이, 거기 어디 내 명함 없냐.”

내가 내민 손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위아래로 흔든 패트릭이 좀 전까지 자신과 이야기하고 있던 소년을 불렀다.

열댓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은 패트릭의 말에 침대 아래 놓인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이윽고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패트릭에게 건넸다.

“여기요.”

“고맙다.”

패트릭이 건네받은 종이를 곧장 내게 내밀었다.

“저는, 그… 대충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순식간에 손안에 들어온 종이 한 장을 내려다보았다. 명함이라고 했지.

‘패트릭 헤이즈 탐정사무소.

플로드 스트리트 48번지.’

“탐정…이시군요.”

“예. 여기 이 녀석은 제 조수인 조이고요.”

패트릭이 명함을 건네준 소년의 짙은 갈색 머리칼을 장난스레 헤집으며 말했다.

귀찮게 뭐 하냐는 듯 패트릭을 향해 눈을 흘기던 조이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 인물정보 ‘패트릭 헤이즈’ 획득 ]

[ 인물정보 ‘조이 로’ 획득 ]

나는 눈앞에 연달아 떠오르는 시스템 문구를 무시한 채 조이를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

탐정.

그것도 밀리엄과 안면이 있는 탐정이라.

어쩔 수 없이 <레드 헤링>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던 제임스가 떠올랐다.

왕국 최고의 명탐정, 제임스 로웰.

밀리엄 켄트우드의 믿음을 철저히 배신하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밀리엄의 신념을 시험대 위에 올린 남자…….

나는 나도 모르게 밀리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마도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을 내 눈빛을 마주한 그가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내가 그저 고개를 저으며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려던 순간이었다.

“저, 캠벨 남작님이라고 하셨습니까…?”

패트릭의 침대와 마주 보고 있는 침대에 누워 있던 중년 남자가 몸을 일으킨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남자의 곁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부축하고 있는, 아마도 부인이나 여동생쯤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네, 그런데요.”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다니!”

남자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내 쪽으로 절뚝거리며 걸어왔다.

곁에 있던 여자가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남자의 한쪽 다리에 감긴 붕대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백부님의 작위를 이어받으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바로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몸이 이 모양이었던지라….”

“저, 죄송하지만 저는 신사분을 처음 뵙는,”

“아, 이런. 제 소개가 늦었군요. 윌 그렉슨이라고 합니다, 남작님. 작고하신 백부님과 작은 자선사업을 함께 하고 있었지요.”

‘작고하신’…….

조지 캠벨이 마치 안타깝게 병사하기라도 한 것 같은 표현.

진실이야 어쨌든 어느 날 갑자기 자기 가족을 전부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공표된 인간에게 쓰기엔 조금 과분한 말 아닌가 싶은데, 날 배려하고 있는 건가?

“아, 그러셨군요. 저는 백부님이 무슨 일을 하셨었는지 아직 많이 모르고 있어서요. 기존의 동업자분들께도 미처 신경을 써드리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아이고, 남작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뭣 모르는 치들 입방아에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것 압니다. 수사결과랍시고 내놓은 것도 참,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계속 들어보니, 윌 그렉슨은 날 배려하는 게 아니라 조지 캠벨을 비호하고 있는 듯했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분이 얼마나 훌륭한 인격자셨습니까.”

그저 그런가요, 하며 윌 그렉슨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그 대목에서 주춤하고 말았다.

패트릭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밀리엄도 별안간 말을 멈추었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리는 것이 느껴져서, 나는 일단 그의 옷깃을 살짝 잡고 고개를 저었다.

밀리엄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윌 그렉슨을 일별하고는 이내 다시 몸을 돌렸다.

그가 무슨 딴죽을 걸고 싶었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온 집안이 어린 조카를 방치하고 무시하도록 조장하는 사람이 인격자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소리지…….

하지만 뭐, 철저하게 안에서만 새는 바가지였을 수도 있는 일이니 괜히 저 남자가 밀리엄에게 볼멘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조지 캠벨의 인간성이 어떻게 되먹었든 간에 수사결과가 영 미심쩍은 것도 사실이고.

“저, 남작님. 그런데 켄트우드 씨와는 무슨 일로 동행하고 계신 겁니까? 저분은 안젤리나 캠벨 부인의….”

“오라버님 되시죠. 저도 안답니다.”

내 대답에 윌 그렉슨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왜 저런 표정을 짓지?

조금 이상한 조합이라는 건 나도 인지하고 있지만, 절대 엮여선 안 되는 관계인 것도 아니지 않나?

심지어 윌 그렉슨은 단지 이상한 조합을 보았다기보다, 마치 내가 아주 못 만날 사람과 상종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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