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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1화 (11/121)
  • 11화. 어느 오후 (1)

    스토리상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해도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갔다.

    그것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곳이 게임 속일지언정 어쨌든 내가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였다.

    어제 캠벨 저택에서 나서며 나는 밀리엄과 조만간 성 조나단 병원에 찾아가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마음 같아선 당장 오늘 쳐들어가자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 작은 바람은 난데없는 밀리엄의 질문과 함께 날아가버렸다.

    ‘저…, 베로니카. 혹시 내일 시간이 괜찮습니까?’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베로니카 캠벨이 한가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내일 함께 가주었으면 하는 곳이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지금.

    점심식사를 막 마쳤을 즈음 베로니카의 집앞으로 전세마차를 타고 온 밀리엄이 나를 데리고 온 곳은…….

    “아이고, 켄트우드 씨! 이게 얼마 만인가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손튼 부인. 그간 별일 없으셨습니까?”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나는 가게 유리창의 상호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손튼 부인의 디저트’라는, 굉장히 직관적인 이름의 상호가 커다란 통유리창에 깔끔하게 붙어 있었다.

    지도에 새로운 장소가 추가되었네 어쩌네 하는 시스템 문구가 뜨지 않는 걸 보면 역시 시나리오상으로 의미가 있는 공간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게임 스토리의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밀리엄과 가게 주인을 응시했다.

    ‘손튼 부인’이라 불린 그녀는 인자한 인상의 노부인이었다.

    가게 주변은 조용하고 인적이 많지 않은 편이었고, 가게 안에도 손님이라곤 나와 밀리엄뿐이었다.

    나는 멀뚱멀뚱 선 채 둘 중 누구 하나라도 내게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니까… 밀리엄 켄트우드 이 남자가 지금 나를 디저트 가게에 데려온 상황인 거지?

    내가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기울이던 바로 그때, 밀리엄의 뒤에 멀뚱히 서 있는 내게 시선을 옮긴 손튼 부인이 다정하게 눈을 휘며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여기 계신 아가씨는 누구실까요?”

    “아, 소개가 늦었군요. 베로니카, 이분은 이 가게를 운영하시는 글래디스 손튼 부인이십니다. 부인, 이쪽은 베로니카 캠벨 남작님이시고요.”

    “어머나, 남작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남작님.”

    “……저야말로요. 손튼 부인.”

    얼떨결에 손튼 부인과 인사를 나눈 나는 은근슬쩍 밀리엄의 눈치를 살폈다.

    내 앞에 서 있던 그는 아무데나 편한 자리에 앉으라는 손튼 부인의 말에 아기자기한 화분이 옆에 놓인 4인용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의자 하나를 뒤로 빼며 나에게 손짓했다. 와서 앉으라는 의미인 듯 보였다.

    나는 종종거리며 걸어가 그가 빼준 의자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내게 의자를 빼준 뒤 반대쪽으로 돌아간 밀리엄은 내 맞은편 대각선 의자를 빼어 앉고서, 손튼 부인에게 건네받은 메뉴판을 내 쪽으로 돌려주었다.

    나는 낯선 메뉴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는 메뉴판을 암호문 보듯 들여다보다가, 뺨을 긁적이며 밀리엄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기, 밀리엄. 뭘 골라야 좋을지 잘 모르겠는데…….”

    “뭘 골라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손튼 부인의 디저트는 정말로 훌륭하거든요.”

    “그럼 밀리엄이 가장 추천하는 걸로 먹어볼게요.”

    내가 ‘이런 건 잘 몰라서요…….’ 하며 어색하게 중얼거리자 밀리엄이 돌연 조금 짠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표정을 목도한 순간에야, 눈앞의 남자가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에 대해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당신이 여기 살던 어린 시절에 남작님 몰래 남는 과자라도 몇 개 챙겨줄 걸 그랬다고 하더군요.’

    호사스럽기 이를 데 없는 백부의 저택에서, 없는 사람 취급 받으며 군것질 한번 못해보고 자란 딱한 아가씨. 그런 이를 그 백부의 조카라는 이유로 괜히 껄끄러워하며 무뚝뚝하게 대했던 자신…….

    말하자면 밀리엄 켄트우드는 어제 베로니카의 사정을 알기 전까지 내게 보였던 다소 딱딱한 태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과자 하나 못 얻어먹을 정도로 암울한 어린 시절을 보낸 베로니카 캠벨을 향한 애처로움과 함께.

    뭐라고 해야 할까, 몰랐던 건 아니지만 되게 좋은 사람이네…….

    나는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손튼 부인에게 이 메뉴 저 메뉴를 주문하는 밀리엄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윽고 메뉴판을 받아 든 손튼 부인이 밀리엄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흐뭇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켄트우드 씨가 저희 가게에 숙녀분을 모셔온 게 두 번째지요, 아마? 한동안 찾아주시질 않아 섭섭해하던 참이었는데, 이제 보니 이 늙은이에게 이렇게 오붓하게 단란한 장면을 보여주려 그간 뜸하셨던 모양이로군요.”

    “소, 손튼 부인…….”

    밀리엄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헛기침을 했다.

    나는 그 모습이 퍽 흥미로워서 테이블 위로 턱을 괸 채 밀리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두 번째란 말이지?

    연애 같은 것과는 담을 쌓은 듯한 이미지의 전직 추리게임 주인공이 나름대로 청춘사업을 즐기고 있었다니, 꽤나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호호 웃으며 메뉴판을 들고 주방 쪽으로 사라지는 손튼 부인의 뒷모습을 조금 야속하게 바라보던 밀리엄이 갑자기 내게 사과를 건네온 것은 그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미안합니다, 베로니카. 부인께서 워낙 장난기가 많으신 분이라…. 아마 그냥 농담 삼아 하신 말씀일 거예요.”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를 당황케 한 것은 ‘오붓하고 단란한 장면’ 쪽인 모양이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으며 웃어 보였지만, 그래도 못내 신경이 쓰인 모양인지 밀리엄은 계속해서 내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것은 손튼 부인이 온갖 디저트가 가득 놓인 트레이 두 개를 양손에 들고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 이어졌다.

    이윽고 두 개의 3단 트레이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나는 순식간에 멍해진 기분으로 눈을 깜빡이며 눈앞에 펼쳐진 디저트의 향연에 넋을 놓았다.

    층층이 놓인 형형색색의 아기자기한 과일타르트며 파이며 머핀이나 작은 샌드위치 같은 것들이 엄청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나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일단 포크를 집어 들었다.

    보자……. 전에 친구랑 이 비슷한 걸 먹으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러나 그조차 몇 년은 지난 일이라, 위에서부터 먹는 것이었는지 밑에서부터 먹는 것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포크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고민하는 나를 발견했는지, 밀리엄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내키는 것부터 먹어요. 뭐든 맛있을 테니까.”

    그거 참 도움이 되는 소리네요……. 나는 한숨을 쉬며 포크를 내려놓고 제일 아래 칸에 있는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한입 크기로 보기 좋게 잘려 있던 샌드위치 조각을 입에 넣자 일순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깜짝 놀랄 정도로 맛이 좋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씹어 넘기는 게 아까울 정도로 맛있는 샌드위치를 꼭꼭 씹어 꿀꺽 삼키자니, 그런 내 모습을 퍽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밀리엄이 보였다.

    “입맛에 맞습니까?”

    “네. 맛있어요. 밀리엄은 안 먹어요?”

    “물론 먹어야죠.”

    그는 맛있다는 내 말을 듣고 나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포크를 들어올렸고, 그렇게 한동안 꽤나 즐거운 디저트 타임이 이어지던 참이었다.

    “켄트우드 씨는 여전히 단 걸 좋아하시나 보네요.”

    손님이라곤 우리밖에 없기 때문인지 다시 느릿하고 한가해진 걸음으로 다가온 손튼 부인이 옆 테이블의 의자에 앉아 후후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제야 밀리엄이 유독 심하게 달콤해 보이는 메뉴만을 골라서 집어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럽 한 방울 설탕 한 꼬집 넣지 않은 에스프레소만 마실 것 같이 생겨서는 단 걸 좋아하는구나.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어 밀리엄을 바라보자 그가 민망하다는 듯 크흠, 하고 또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밀리엄의 민망함 따위는 아랑곳 않는 얼굴로, 손튼 부인은 나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아까는 재미없는 농담을 해서 미안했어요. 늙은이가 주책을 떨었지. 둘이 교제하는 사이가 아니라는 건 자리에 앉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어…… 저희가 자리에 앉을 때부터요?”

    콕 집어 그때를 말하는 데는 왠지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물었더니, 인자한 미소와 함께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둘이 앉으라고 만들어놓은 자리도 많은데 굳이 4인용 테이블을 골라 앉은 데다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앉지도 않았잖아요? 요새 교제 중인 젊은이들은 그런 식으로 내외를 하지 않지.”

    익숙한 상황이라는 듯 이마를 짚으며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내는 밀리엄을 배경 삼아, 나는 손튼 부인의 따스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예리한 시선을 빤히 마주했다.

    그러다가 나와 밀리엄이 앉아 있는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주변엔 2인용 테이블이 훨씬 많았다. 게다가 우리는 서로의 대각선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손튼 부인이 말한 대로였다.

    애인 사이라면 더 가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고를 확률이 높을 것이다.

    적어도 손튼 부인의 뇌내통계로는 그런 모양이었고, 나는 그녀의 논리가 꽤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그 뒤로도 대화는 꾸준히 이어졌다.

    손튼 부인은 밀리엄이 단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어느 순간 화제를 바꾸어 그가 외로움을 많이 탄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하 내지 동료들을 데려왔을 때나 손튼 부인이 한가할 때는 늘 앉아서 먹고 갔으면서, 혼자 왔는데 손튼 부인이 바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때는 꼬박꼬박 포장만 해가더라는 것이다.

    손튼 부인의 말이 이어질수록 밀리엄은 놀리지 말라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러면서도 딱히 부인의 말을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디저트 가게 사장의 귀여움을 받는 단골이 될 정도로 단걸 좋아하고, 혼밥이 안 될 만큼 외로움을 많이 타는 밀리엄 켄트우드라.

    <레드 헤링>에서는 알 길이 없었던 TMI지만 꽤나 재미있고, 아주 약간은 친근하고, 또 조금은 씁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천지에 덜렁 혼자 남은 상태인데 외로움을 타는 성격이라니.

    왠지 마음이 조금 짠해진 나는 천천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마침 음식도 다 해치운 참이었다.

    그리고 그때, 손튼 부인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밀리엄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부인을 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무언가 착잡한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뺨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밀리엄이 묻자, 손튼 부인이 번뜩 정신을 차리더니 손사래를 쳤다.

    “아휴, 안 좋은 일은 무슨. 그냥 요 며칠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던 것뿐이에요.”

    이상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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