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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10화 (10/121)
  • 10화. 캠벨 저택의 비밀 (5)

    그 뒤로 한참을 더 지하실 이곳저곳을 뒤져보았지만 이렇다 할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당연히 시스템창도 침묵을 유지했다. 역시 여긴 더 볼 게 없는 모양이지.

    그렇게 더 이상의 조사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나와 밀리엄은, 지하실의 가스등을 끄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또다시 밀리엄이 손을 잡아주긴 했지만 그도 앞이 잘 안 보이는 건 마찬가지일 터라, 나는 잘 보이지 않는 발밑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밀리엄이 별안간 우뚝 걸음을 멈춘 것은, 그가 완전히 서재로 올라가고 내 몸이 절반쯤 밝은 곳으로 빠져나간 순간의 일이었다.

    “켄트우드 씨, 무슨 일…….”

    “그건 제가 두 분께 여쭙고 싶은 말입니다.”

    밀리엄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영 달갑잖은 시선으로 노려보던 밀리엄이 이내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나를 마저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재 한복판에, 집사가 서 있었다.

    “서재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기에 혹여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싶어 확인하러 왔습니다만….”

    다시 봐도 꼬장꼬장해 보이는 얼굴 가득 인상을 쓴 그가 말끝을 흐리며, 나와 밀리엄이 올라온 계단과 문처럼 열려 있는 책장 쪽을 일별했다.

    그러고는 내게로 곧장 시선을 옮겼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보라는 듯한 시선.

    “이건 다 무엇이고… 두 분께선 대체 뭘 하고 계셨던 겁니까?”

    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좀 더 에둘러 올 줄 알았는데, 질문이 생각 외로 너무 단도직입적이었다.

    덕분에 순간 당황한 나는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만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진짜 뭐라고 대답하냐. 조사 중이었다고 말하긴 좀 껄끄러운데.

    그렇다고 다 큰 어른 둘이서 보물찾기를 하고 있었다고 할 수는 없고.

    그냥 서재 구경을 하다가 재미있어 보이는 책이 있어서 뽑아봤는데 갑자기 책장이 열리더라고 할까?

    깜짝 놀라서 내려갔다 오는 길이다, 집사님은 여기 이런 게 있는 줄 아셨냐…, 뭐 그런 식으로 대충 둘러대면 되지 않을까?

    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예언서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길이 없다는 점에서 영 시원찮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당장 생각나는 말 중에는 가장 괜찮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입을 열려던 순간.

    “내가 혹시 이 집의 주인을 잘못 알고 있습니까?”

    싸늘하게 착 가라앉은 밀리엄의 목소리가 서재를 울렸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려 그를 보았다.

    밀리엄은 전에 없이 무뚝뚝하게 경직된 얼굴로,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집사를 쏘아보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그녀를 추궁할 자격이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비어슨 씨.”

    멍청하게 서서 집사의 성이 비어슨이었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던 나는 좀 전까지만 해도 퍽 고압적으로 나를 추궁하던 집사가 밀리엄의 시선을 설설 피하고 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나는 사람을 고용해본 적도, 이렇게 넓은 집의 주인이 되어본 적도 없지만, 말하는 걸 들어보니.

    그림이 조금 이상하긴… 했나?

    “추궁이라니요. 켄트우드 씨, 저는 그저 염려가 되어서….”

    그건 진짜 아니지. 누가 들어도 염려하는 말투는 아니었는데.

    나는 집사 비어슨 씨의 설득력 없는 변명을 들으며 방금 그 상황이 영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맞았었나 보다, 하고 확신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때 밀리엄이 실소를 터뜨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당신이, 남작님을 말입니까?”

    아주 우습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다 듣겠다는 양.

    뭐지? 집사 양반과 베로니카 캠벨 사이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그런데 그걸 밀리엄은 알고 있고?

    갑자기 혼란스러워진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열심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비어슨 씨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밀리엄은 단단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는데, 그게 단순히 방금 일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비어슨 씨가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밀리엄이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그러나 전혀 누그러지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말을 이어갔다.

    “비어슨 씨. 내가 당신이라면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얌전히 지낼 겁니다.”

    이 정도로 사람을 쫓아내는 건 갑질이지! 난 갑질 같은 건 안 할 거라고!

    깜짝 놀라서 급히 이의를 제기하려던 찰나, 밀리엄의 다음 말이 서늘하게 이어졌다.

    “이제 이분은 당신들이 대놓고 함부로 대할 수 있었던 그때 그 구박데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또 예상치 못했던 전개인데.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비어슨 씨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이내 휙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꾹 말아쥔 채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도 보였다.

    누가 봐도 정곡을 아주 깊게 찔린 반응이라 내가 다 당황스러웠다.

    ‘대놓고 함부로 대했다’는 게 정확히 어떤 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밀리엄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렇게까지 안절부절못할 정도면 대충 견적이 나오는 셈 아닌가?

    나는 자꾸만 쩍 벌어지려는 입을 억지로 꾹 닫으며, 끊임없이 제삼자의 그것으로 빠지려 드는 자아를 애써 부여잡았다.

    그러고는 겁에 질린 사냥감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집사를 불렀다.

    “비어슨 씨.”

    “예, 예. 남작님.”

    “이만 돌아가볼까 하는데 마차를 좀 불러주시겠어요?”

    아무래도 베로니카에게 지은 죄가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 집사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거의 뒷걸음질에 가까운 몸짓으로 도망치듯 서재를 빠져나갔다.

    “저렇게 보내도 되겠습니까?”

    집사의 옷자락이 시야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밀리엄이 물어왔다.

    “노인공경 차원에서요.”

    상황을 보아하니 진짜 베로니카는 공경할 필요가 없는 노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입장이니까.

    나는 내가 모르는 베로니카의 과거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얘는 어떤 삶을 살았던 거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내 고민을 어떤 불쾌감의 표시라고 받아들였는지 별안간 밀리엄이 사과를 건넸다.

    “아까 서재로 돌아오다가, 복도에서 하녀들이 소곤거리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녀들이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당신이 여기 살던 어린 시절에 남작님 몰래 남는 과자라도 몇 개 챙겨줄 걸 그랬다고 하더군요.”

    그는 담담하지만 여전히 조금 화가 난 듯한 얼굴로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전달해주었다.

    정황상 베로니카가 어린 시절 이 집에서 살면서 아주 암울한 시절을 보냈다는 것만은 확실해졌다.

    게다가 집사님 몰래도 아니고 남작님 몰래라고. 어쩐지. 나는 그제야 밀리엄이 아까부터 묘하게 유해진 듯 보였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조지 캠벨의 조카’라고 인식해서 여태껏 껄끄러워 해왔는데, 정작 그 조지 캠벨이 베로니카를 남보다 못하게 박대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마음이 불편해진 거겠지.

    동시에 나는 아까 조지 캠벨이 범인 같지 않다던 내 말에 밀리엄이 표했던 의문 또한 이제야 이해했다.

    백부에게 좋은 기억이 없을 텐데 어떻게 그의 무죄를 믿을 수 있냐는 소리였군.

    밀리엄이 들은 이야기를 조합하자면 베로니카는 이 집에서 지속적인 방치와 무시를 당했던 것 같다. 남작 일가뿐 아니라 고용인들에게까지.

    그러다 성인이 되어 집을 나왔을 테고, 어쩌면 연을 끊었을 수도 있고….

    어마어마한 대부호의 하나뿐인 조카치고는 어째 살림살이가 전체적으로 소박하더라니 그런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당신을 그런 식으로 대하는 비어슨 씨를 보니, 저도 모르게 화가 나서 그만 주제넘은 참견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점도 죄송합니다. 밀리엄이 다시 한번 사과했다.

    나는 불편하고 어색한 마음에 목을 더듬었다.

    어린 베로니카가 겪지 말아야 할 일을 겪은 것도 맞고, 정상인이라면 화가 날 일인 것도 맞지만 글쎄. 내가 겪은 것도 아닌 일에 분노해주고 사과까지 해주는 누군가를 보고 있자니 영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이 어색한 상황이라도 빨리 넘기기 위해 손을 내저으며 말을 꺼냈다.

    “솔직히 잘 기억도 안 나요. 어리기도 했고… 왜, 너무 힘들었던 일은 머리가 알아서 지워버릴 때가 있잖아요.”

    “그렇습니까. …부러운 일이군요.”

    아, 더 불편해졌다.

    나는 밀리엄 켄트우드의, 아마도 셀 수 없이 많았을 ‘힘들었던 일’들을 헤아려보며 내 말실수를 후회했다.

    “아니, 방금 말은 경솔했지요. 죄송합니다. 남작님.”

    그러나 이번에도 사과한 쪽은 밀리엄이었고, 나는 속절없이 괴로워졌다. 그래서 일단 가장 소소한 괴로움부터 해결해보자고 결심했다.

    “그냥 베로니카라고 불러주세요. 그게 편할 것 같아요.”

    “어…….”

    밀리엄이 내 제안에 눈을 끔뻑였다.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눈치를 보아하니 경칭을 떼고 이름으로만 부르는 게 친근함의 증거라는 건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하지만 캠벨 성을 쓰던 사람이 넷이나 죽은 사건을 조사하려는 마당에 캠벨 뭐시기로 불리는 건 너무 껄끄럽고, ‘남작님’이나 ‘어쩌고 양’ 하는 호칭은 그것대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런 걸 계속 듣느니 그냥 당황스러울 만큼 격의 없는 사람이 되고 말겠다. 어차피 내 이름도 아닌데 뭐 어때.

    나는 진심이니 마음껏 이름을 부르라는 의미로 밀리엄을 향해 덩달아 눈을 끔뻑여주었다.

    밀리엄은 잠시 주저하는 듯하다가, 이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보는 것 같은, 진심으로 유쾌한 웃음이었다.

    잘생긴 남자는 웃음도 잘생기게 터뜨리는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켄트우드 씨보다는 밀리엄이 편합니다, 베로니카.”

    “그럼 나도 밀리엄이라고 부를게요, 공평하게.”

    계속 밀리엄이라고 생각하면서 켄트우드 씨라고 부르기 영 헷갈렸는데 잘됐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호칭 정리를 마치고서 내심 뿌듯해하고 있던 차에.

    뎅, 뎅.

    정오를 알리는 시계 종소리가 캠벨 저택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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