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캠벨 저택의 비밀 (4)
[ ‘제목을 알 수 없는 책’을 발견했다.
표지에 이상한 문장이 찍혀 있다. ]
이상한 문장. 나는 곧장 책 표지를 살폈다.
길고 폭이 좁은 마름모 안에 장미꽃 한 송이가 그려진 문장이 제목 대신 표지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다른 책은 어떤가 싶어 시선을 옮기니, 제일 가까이 떨어져 있는 책의 표지에도 같은 문장이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켄트우드 씨, 혹시 이 문장 본 적 있으세요?”
책을 들고 몸을 일으킨 나는 쏟아진 잉크가 만들어낸 검은 웅덩이를 피해 방안을 살피고 있던 밀리엄에게 책 표지를 보여주며 물었다.
밀리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책 쪽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렇게 턱을 매만지며 한참을 고민하는 듯싶던 그가 별안간 아, 하는 탄식을 터뜨렸다.
“이건 메이슨 교단의…….”
밀리엄은 내가 발견한 문장이 메이슨 교단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왠지 낯이 익은데.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한번 책 표지 위의 문장을 내려다보았다.
메이슨 교단에 대해 들은 건 오늘이 처음인데, 그 상징이라는 이 문장은 어쩐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냥 비슷하게 생긴 다른 장식물 따위와 헷갈리는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내 불확실한 기억 따위가 아니었다.
“이제 보니 다른 책들에도 교단의 문장이 새겨져 있군요.”
“그럼 바닥의 그림도 메이슨 교단과 관련된 걸까요?”
“일단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교단의 문장이 찍혀 있는 책 두어 권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다 이내 책상 위에 내려둔 밀리엄이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문제는 방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느냐는 건데….”
[ 1. 백부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던 모양이죠. ]
[ 2. 진범의 짓일지도 몰라요. ]
적잖이 분노한 누군가가 작정을 하고 다 뒤집어 엎어놓은 기색이 역력한 방이다.
비밀지하실이니만큼 이 방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조지 캠벨이 홧김에 난리를 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으나.
“진범의 짓일지도 몰라요.”
이 사건에서 내가 취해야 할 스탠스는 단순하다.
조지 캠벨을 포함한 일가는 외부인에 의해 살해당했고, 그 외부인이 튜토리얼에서 베로니카 캠벨까지 죽이려 했고.
말하자면 이곳을 발견한 것도 진범인데, 모종의 이유로 분노해서 혹은 무언가 찾아야 할 것이 있어 방을 죄 뒤집어 놓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저번에 병원에서도 묻고 싶었는데, 남작님께선… 전 남작께서 범인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차. 너무 생각 없이 대답을 골랐나. 조카랍시고 백부 편을 드는 것처럼 보였으려나.
[ 1. 전혀 없다고까지는 않겠지만, 일단은요. ]
[ 2. 저는 백부님이 그러지 않으셨을 거라고 믿어요. ]
주어진 선택지는 둘 다 진범의 존재를 어느 정도 전제하고 있었고, 나는 조금 더 모호한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전혀 없다고까지는 않겠지만, 일단은요.”
나름대로는 조지 캠벨이 진범일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는 뉘앙스의 선택지를 골랐는데도, 밀리엄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그는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어딘지 모르게 착잡해 보이는 금빛 시선을 내게 던졌다.
나는 지레 당황해서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호, 혼란스럽게 했다면 사과를,”
“아, 아닙니다. 저도 진범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니까요. 저는, 다만 당신이…….”
나보다도 당황한 기색으로 횡설수설 상황을 수습하던 밀리엄이 별안간 말끝을 흐렸다.
다만 내가, 뭐지?
여간 미심쩍은 말이 아니었던 터라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설설 내저은 그가 말을 이었다.
“실언이었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맥 빠지는 소리였다.
왜 사람들은 꼭 신경 쓰이는 소리를 해놓고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는 걸까…….
먼저 이야기를 미묘하게 만든 죄가 있어 굳이 추궁할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신경 쓰지 말란다고 곧장 신경을 끊어버릴 수 있을 만큼 무신경한 인간도 못 되었다.
방금 그건 뭐라고 해야 할까, 자긴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까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좀 의외라는 느낌 아니었나?
베로니카 캠벨이 조지 캠벨의 무죄를 염두에 두는 게 어째서 의외가 되지?
나는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을 붙들고 머리를 긁적이며 밀리엄으로부터 몇 발자국 멀어졌다.
지하실은 그리 넓지 않았고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려울 만큼 어질러져 있었기 때문에, 고작 그 몇 발자국만으로도 금세 벽에 부딪쳐 버렸지만.
책들이 죄 바닥을 뒹굴고 있는 터라 반쯤 비어버린 책장이 눈앞에 보였다.
책장에 남아 있는 책들 또한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기는 마찬가지인 와중에, 책장 한가운데 박혀 있는 정체불명의 상자만이 마치 영원히 그렇게 있을 것처럼 꼿꼿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책장에 꼭 들어맞는 크기의 정육면체 모양 상자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슬쩍 두드려보았다.
캉캉. 쇠 두드리는 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철제 상자인 모양이었다.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상자 앞면을 잘 살펴보니, 가스등 불빛이 희미했던 탓에 잘 보이지 않았던 동그란 손잡이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손가락을 벌려 손잡이를 잡고 돌려보았다. 드르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손잡이는 다시 보니 다이얼 형태였다.
다이얼이 달린 철제상자면…….
“금고?”
“금고라고요?”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밀리엄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등 뒤에 선 그가 내 어깨 위로 머리를 쑥 내밀었다.
밀리엄 켄트우드의 잘생긴 옆얼굴이 내가 고개만 돌리면 코가 닿을 거리에 있는 것을 곁눈질로 확인한 나는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슬그머니 옆으로 한 발자국 움직였다.
괜히 사람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편하게 관찰하시라는 좋은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밀리엄은 내가 움직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리를 살짝 숙인 채 문제의 금고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나는 그런 밀리엄의 옆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금고를 응시했다.
저게 괜히 있지는 않을 텐데. 열어서 안을 확인해야 하는 시점이 분명한데.
하지만 어질러질 대로 어질러진 방 안을 다시 둘러보자니, 여기서 단서를 찾아봐야겠다고 결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코끝을 매만지며 고민하다가 모노클 하나를 더 써봐야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찰나, 옆에서 드르륵 드르륵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번쩍 고개를 돌리자 금고에 한쪽 귀를 댄 채 다이얼을 돌리고 있는 밀리엄이 보였다.
“열 수 있….”
“쉿.”
밀리엄이 다른 쪽 손을 제 입가에 가져다 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문 채 그에게 집중했다.
드르륵, 드르륵.
다이얼 돌아가는 소리만 울리는 지하실 안에서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금고의 문이 열렸을 때 나는 거의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지, 지금 금고를 연 거예요?”
“보시다시피요. 오랜만이라 잘될까 싶었는데….”
“아니,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배워둬서 쓸모없는 기술은 없다고 여기저기 끌고 다니던 선배가 있었거든요.”
밀리엄 켄트우드는 정말로 유능한 파트너였다!
나는 뺨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는 밀리엄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걸 진짜 여는 사람이 있구나, 대단하시네요…….”
“대단할 것까지야. 그냥 잡기입니다.”
그는 전직 수사관이 되어 금고털이범이나 할 법한 일로 공치사를 듣는 게 부끄러웠는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어쩌면 밀리엄에게 금고 열기 기능이 탑재되어있는 것 또한 제작진의 안배이겠으나, 어쨌든 이 어지럽기 짝이 없는 방을 뒤져 비밀번호에 대한 단서를 찾아내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진 건 기쁜 일이었다.
나는 파트너로서 밀리엄 켄트우드의 유용함에 대해 몇 번 더 감탄한 뒤에야 금고 안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열린 금고 안에는 두꺼운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나는 금고 안으로 손을 넣어 책을 빼냈다.
보기와 다를 바 없이 무겁고, 생각보다도 많이 크고, 불빛 아래서 보니 상당히 낡은 책이었다.
게다가 어째 책을 잡을 때 오른손 쪽에서 무언가 달그락거린다 싶더라니, 책을 열지 못하도록 자물쇠가 걸려 있는 게 아닌가.
금고를 그냥 열게 해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두겠는데 자물쇠 여는 법은 모릅니다.”
기대도 안 했다. 거저 주는 파트너가 거기까지 유능할 리 없지.
나는 낭패감으로 눈물을 삼키며 커다란 책을 책상 위에 턱 내려놓았다.
낡은 가죽표지 정중앙에 커다랗게 새겨진 메이슨 교단의 문장이 보였다.
여태 이 지하실에서 본 어떤 책보다 크고, 낡았고, 결정적으로 ‘나 중요하다’는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게 메모에서 말한 그 예언서 아닐까요? 열쇠가 필요한 것도 그렇고.”
“확실히 그렇군요. 이걸 전 남작께서 어떻게 손에 넣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밀리엄은 조지 캠벨이 썩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예언서(추정)를 입수했다고 확신하는 사람처럼 말했고, 나 또한 그의 견해에 동의했다.
정당한 경로로 소장하게 된 거라면 열쇠도 함께 가지고 있었겠지. 열쇠의 행방이 적힌 메모가 아니라.
…혹시 예언서를 손에 넣는 과정에서 뭔가 수틀려서 살해당한 건가?
“성 조나단 병원 204호…….”
나는 자연스럽게 메모의 뒷부분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의문이 들 땐 일단 가보는 게 좋겠죠.”
밀리엄이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이 방에서 얻을 단서는 이게 전부일 것 같다는 예감이 덩달아 밀려들었다.
물론 시나리오의 규모는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상태고 게임의 구조도 알 수 없으니 일단 이 방을 더 뒤져보긴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맵이 최소 도시 단위로 넓다는 걸 고려하면, 저택 전체를 방 단위로 세세하게 조사하진 않아도 되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여기저기 무작위로 돌아다니며 단서를 모으는 구조보다는 어느 정도 순서가 정해져 있는 선형구조를 따랐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정해져 있는 다음 순서가 바로 성 조나단 병원인 거지.
대체 무슨 전개가 펼쳐질 예정이기에 남작 일가의 죽음을 파헤치다가 사이비 종교의 예언서 따위를 열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