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8화 (8/121)
  • 8화. 캠벨 저택의 비밀 (3)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수십, 수백 개의 엇비슷한 장면들이 있었다.

    어떤 책을 뽑았더니 갑자기 책장이 문처럼 열리면서 숨겨진 통로나 비밀 계단 따위가 나타나는… 그 닳고 닳은 장면들.

    “켄트우드 씨.”

    나는 반쯤 홀린 사람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쩌면, 아니 아주 높은 확률로 눈앞의 책장 또한 그렇게 열 수 있을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밀리엄은 이미 서가에 반쯤 붙다시피 한 채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귀족들의 저택에 비밀 공간 한두 개쯤은 기본인 법이라더니.”

    책장 모서리를 이리저리 매만지며 밀리엄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차 하는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고 눈을 질끈 감는 밀리엄을 보자마자 그 익숙함의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내가 10년 전 <레드 헤링>의 스크립트로 읽었던 대사였다.

    또한 밀리엄의 기억으로는 수년 전에, 아마도 영영 잊고 싶으나 도저히 잊지 못할 상대에게서 들었을 말.

    부모의 복수를 대가로 신념을 꺾고, 평생 몸담으리라 여겼던 직장을 제 발로 떠나야 했던 남자의 낯빛은 아니나 다를까 한껏 어두워져 있었다.

    역시 저 남자에겐 그때의 사건도 아직 괜찮지 않은 거구나.

    살해당한 부모. <레드 헤링>에서의 사건. 동생의 죽음.

    나는 도대체가 괜찮지 않은 것투성이인 밀리엄 켄트우드를 보며 입 안쪽의 살을 잘근 씹었다.

    내가 아는 체를 해도 되는 것은 동생의 죽음까지였다.

    이 순간의 동요에 대해 나는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저건 밀리엄 켄트우드와 ‘그 남자’만의 비밀이니까.

    그래서 나는 애써 동요한 기색을 숨기는 밀리엄을 외면한 채, 무슨 책을 뽑아야 서가를 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되돌아왔다.

    무식하게 하나씩 다 뽑아보는 방법도 있겠지만, 일단 이 서가 하나만 놓고 봐도 책이 너무 많다.

    게다가 뽑아야 하는 책이 여러 권이고 와중에 순서까지 정해져 있다면 그런 무식한 방법이 통할 리도 없지.

    애초에 추리게임은 플레이어의 노가다보다는 두뇌 회전을 상정해두고 만들어지는 게임이다.

    서가를 움직일 장치가 있다면 분명 그 단서가 여기 어딘가에 있을 터.

    하지만 어디부터 뒤져야 할지 도저히 감이 오질 않는데.

    그리고 그때였다. 시야의 오른쪽 구석에 반투명하게 둥둥 떠 있는 모노클 아이콘이 순간 눈에 들어왔다.

    힌트 아이템 모노클을 장착하면 탐색 장소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고 했었지…….

    나는 손을 뻗어 모노클 아이콘을 눌렀다.

    그러자 아이콘 옆에 자그마하게 적혀 있던 숫자 4가 3으로 변하더니, 손잡이가 달린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은테 모노클 하나가 손바닥 위로 툭 떨어졌다.

    손잡이를 들고 렌즈에 눈을 맞추자, 책상 위에서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서가를 살피고 있는 밀리엄을 뒤로한 채 다시 책상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책상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은 아까 발견했던 소설, 「황금의 강」이었다.

    손잡이를 들지 않은 손이 책에 가 닿은 순간, 반짝임은 사라지고 모노클 또한 연기처럼 스르륵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아까 펼쳐놓은 상태 그대로 책상 위에 자리하고 있는 책을 스윽 쓸어보았다.

    [ 소설 「황금의 강」을 발견했다.

    책 중간에 갈피끈이 끼워져 있다. ]

    아까 보았던 그 메시지가 다시 한번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시스템창은 갈피끈을 언급하는데, 정작 메모가 꽂혀 있던 건 다른 페이지였지.

    갈피끈이 꽂혀 있기에 펼쳐보았던 이 페이지에, 어쩌면 아직 쓸모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나는 다시 한번 찬찬히 펼쳐진 페이지를 살폈다.

    왼쪽 페이지 중앙에 인쇄된 ‘8. 역류’라는 챕터명이 계속해서 눈에 밟혔다.

    하필이면 챕터가 새로 시작되는 곳이다.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는 갈피끈을 그대로 둔 채, 책장을 주르륵 넘겨 제일 앞의 목차 페이지로 향했다.

    소설은 총 10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두 번째와 네 번째 챕터명의 앞글자에만 희미한 손때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2. 종탑’

    ‘4. 말예’

    ……종말?

    예언서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게 바로 방금 전인데 이번엔 종말이라니 거참 불길하기도 하지.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을 나는 애써 무시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두 번째와 네 번째 챕터의 앞글자만 따서 읽으니 단어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있었다.

    갈피끈이 꽂혀 있던 건 8챕터 시작 페이지였고.

    나는 손가락으로 목차를 쭉 훑으며, 짝수 챕터의 제목만 읽어 내려가 보기 시작했다.

    “종탑, 말예, 의심, 역류, 사청… 종말의 역사?”

    이게… 되네?

    놀랍게도 말이 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책을 그 자리에 내버려 둔 채 급히 밀리엄이 있는 서가 쪽으로 걸어갔다.

    “켄트우드 씨, 혹시 ‘종말의 역사’라는 책이 있는지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뭔가 찾아낸 겁니까?”

    “확실하진 않은데, 일단은요.”

    “어디 보자, 이 순서로 종말의 역사면…….”

    장갑을 낀 기다란 손가락이 매끄럽게 책등 위로 미끄러지다가, 어느 순간 우뚝 멈춰 섰다.

    “여기 있네요.「종말의 역사」.”

    한번 뽑아보죠. 그렇게 말한 밀리엄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책을 반쯤 꺼낸 순간이었다.

    콰광, 하는 소리와 함께 나와 밀리엄이 서 있던 바닥이 아래로 내려앉는가 싶더니, 책장도 우지끈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났다.

    급히 책에서 손을 뗀 밀리엄이 난데없는 발치의 진동에 발을 헛디딘 내 허리를 빠르게 낚아챘다.

    단단한 팔이 주저 없이 허리를 감아버린 탓에, 말하자면 그에게 안긴 꼴이 되었으나 그 점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나는 밀리엄의 팔뚝을 붙든 채, 하나의 거대한 여닫이문이 되어버린 책장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있을 것 같긴 했지만 진짜 있었다니. 그것도 이렇게 엄청난 스케일로.

    내가 고개를 설설 내저으며 혀를 내두르는 사이, 반쯤 기대어 있던 내 몸을 바로 세워준 밀리엄이 책장을 조금 더 밀었다.

    열린 책장 너머로 드러난 것은 계단이었다. 어두컴컴한 지하로 향하는.

    “캠벨 남작가에도 거창한 취미를 가진 분이 계셨던 모양이군요.”

    그렇지. 아무리 비밀통로 한두 개쯤 상식인 동네여도 이 정도면 거창한 게 맞지. 바닥이 내려앉더니 이 커다란 서가가 통째로 문이 됐는데.

    나는 제법 깊어 보이는 계단을 내려다보며 침을 꼴딱 삼켰다.

    환한 대낮인데도 눈에 보이는 계단은 대여섯 개에 불과했다. 그 아래는 정말 캄캄해서 계단이 제대로 있는지조차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내, 내려가보는 게 맞겠죠?”

    “기껏 발견했으니까요. 앞장서겠습니다.”

    먼저 계단 하나를 밟아 내려간 밀리엄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일단 심호흡을 한번 한 뒤에, 내밀어진 손을 꾹 움켜잡았다.

    그 순간 밀리엄이 움찔하는 것이 잡은 손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왜 그러세요?”

    “…씩씩하게도 잡는구나 싶어서요.”

    “아니, 잡으라고 하셔서 잡은 건데……”

    내가 변명처럼 중얼거리자 밀리엄이 피식 웃더니, 덩달아 내 손을 꽉 붙들며 말했다.

    “잘 잡았다는 소립니다.”

    좀 전부터 이상하게 태도가 좀 유해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유를 물을 새 같은 건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뭐가 있는지도 모를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있다는 은근한 공포를 꾹 참아내며, 밀리엄의 손을 단단히 붙잡은 채 한발 한발 그를 따라 내려갔다.

    사위가 어두워질수록 잡은 손의 존재감도 깊어졌다.

    입이 바싹 마르는 긴장감 속에서 의지할 것이 그 손뿐이라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위태로운 발밑보다도 손의 온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고작 그 온기 따위가 내 안전을 보장해주기라도 할 것 같은 착각과 함께였다.

    끝없이 이어져 있을 것 같았던 처음의 인상과 달리 계단은 생각보다 금세 끝났다.

    어둠에 익숙해진 건지 어렴풋하게나마 보이는 밀리엄의 형체가 어찌 저찌 움직이는가 싶더니, 별안간 흐릿한 불빛이 시야를 밝혔다.

    몇 번 눈을 깜빡이고 나니 한 손으론 내 손을, 다른 손으론 가스등 줄을 잡고 있는 밀리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찾으신 거예요?”

    “찾았다기보다는 그냥, 줄이 잡히기에 한번 당겨봤죠.”

    “무슨 줄일 줄 알고….”

    “결과적으로 좋은 줄이었잖습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책 없는 소리를 하는 밀리엄을 황망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슴푸레한 가스등 조명이 비추고 있는 공간은 네모반듯한 방이었다.

    [ 캠벨 저택의 비밀 지하실 ]

    혼란하기 짝이 없는 방 안의 풍경 위로 시스템 문구가 떠올랐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지하실 안은 정말이지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넘어진 책장,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책들, 바닥에 쏟아져 자그마한 웅덩이를 이루고 있는 잉크, 다리가 부서진 채 뒤집혀 있는 의자….

    “엉망이군요.”

    “엉망이네요.”

    “게다가 수상쩍고.”

    밀리엄이 우리가 밟고 서 있는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대로 시선을 내렸다.

    발밑에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방 안이 이리저리 어질러져 있는 터라 완전한 형태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원을 이루며 빼곡하게 적혀 있는 모양새가 무슨 마법진 같았다.

    나는 문제의 그림을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몸을 낮추려다 멈칫했다.

    정확히는 멈추게 되었다. 밀리엄이 그때까지도 내 손을 놓지 않고 있던 탓이었다.

    “저, 여기서 길을 잃을 것 같진 않은데요.”

    “아, 죄송합니다. 깜빡했군요.”

    밀리엄이 급히 사과하며 손을 놓아주었다.

    내가 먼저 놓아달라고 말한 주제에, 막상 잡고 있던 최애캐의 손이 사라지자 괜스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이 와중에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우습기도 하지…….

    어쨌든 나는 무릎을 굽히고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암만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문자는 도저히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커다란 원을 그리고 있는 글자들을 따라 움직이던 손끝에 널브러져 있던 책 한 권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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