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캠벨 저택의 비밀 (1)
튜토리얼이 끝났다고 갑자기 타임워프를 해서 다음 챕터로 넘어간다거나,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은 공평하고 일정하게 흘러갔다. 그래봤자 하루였지만 아무튼 그랬다.
튜토리얼 이후 하루 뒤, 나는 캠벨 저택으로 향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시나리오를 진행해 엔딩을 보고 싶었다.
엔딩을 보는 것이 이 세계에서 탈출할 방도가 되어 주리라는 추측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베로니카 캠벨은 튜토리얼에서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목숨을 위협받은 상태다.
이를 해결하는 것 또한 스토리의 한 축이 될 테니, 목숨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스토리를 어서 진행시킬 필요가 있는 셈이다.
“안녕하십니까. 남작님.”
마차에서 내린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저택 현관 앞에 일렬로 늘어선 고용인들이었다.
[ ‘지도’에 새로운 장소가 추가되었다. ]
외국 드라마에서나 본 장면 앞에 조금 주눅이 든 내게, 제일 앞에 나와 서있던 초로의 집사가 인사를 건네 왔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려다가 집사의 헛기침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 이러면 안 되나 보다.
“어…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집사의 미간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이 인사도 마음에 안 드나? 거 생긴 것만큼이나 꼬장꼬장한 성격이신가 보네.
영 찝찝한 기분으로 목덜미를 긁적이고 있자니, 내가 타고 온 마차 뒤에 또 다른 마차가 다가와 서는 것이 보였다.
멈춰 선 마차에서 내린 이는 검은 정장 차림에 실크해트를 쓰고 은제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를 든 남자, 밀리엄 켄트우드였다.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모자를 고쳐 쓰다가 나를 발견한 그가 무뚝뚝한 목례와 함께 말을 붙여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캠벨 양. 아니, 남작님.”
밀리엄은 ‘남작님’이라는 호칭을 입에 담는 것이 썩 유쾌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수사 결과에 의심을 품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동생을 죽였을지도 모르는 인간에게 써왔던 호칭이니 그럴 법도 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와중에, 곁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작님. 켄트우드 씨와 편히 대화 나누실 수 있도록 응접실로 차를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오늘은 그냥 저택을 둘러보러 온 거여서요.”
“켄트우드 씨와 함께… 말씀이십니까?”
집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말하며 나와 밀리엄을 번갈아 보았다.
밀리엄이 안젤리나 캠벨의 오빠인 까닭인지 집사는 그의 이름과 얼굴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네. 그런데요.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나는 내가 죽은 남작 며느리의 하나뿐인 오빠와 함께 저택 안을 둘러보는 그림이 좀 이상해 보이리라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다.
집주인씩이나 되어서 자기 집을 원하는 사람과 둘러보기 위해 남의 눈치를 봐야 할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아니요, 문제는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하시네요. 들어가죠, 켄트우드 씨.”
나는 말끝을 흐리는 집사를 뒤로한 채 밀리엄을 향해 손짓을 했다.
잠시간 나를 빤히 응시하던 밀리엄이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래요.’ 하고 대답했다.
***
넓은 방 안.
중앙에 놓인 책상.
책이 빼곡하게 꽂힌 서가들이 삼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압도적인 풍경.
[ 남작의 서재 ]
나에게는 약간이나마 낯익은 공간이었다. 이 몸에서 깨어나기 전 보았던, 조지 캠벨이 사망한 순간의 배경이 된 바로 그 장소였으므로.
“굉장한 장서량이군요.”
뒤따라 들어온 밀리엄의 목소리에 나는 그가 서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재부터 가보는 게 좋겠다고 말하기에 와본 적이 있나 싶었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켄트우드 씨는 여기까지 들어와 보신 적이 없나요?”
“네. 원체 방문이 잦지 않았을 뿐더러… 그나마도 응접실에서 차나 마시고 가곤 했죠.”
밀리엄이 씁쓸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안젤리나를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아 굳이 말을 얹지 않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조심스레 다시 말을 꺼냈다.
“저, 남작님.”
“네.”
“서재부터 살펴보자고 해놓고 갑자기 이런 말을 하자니 조금 민망하지만… 괜찮다면 동생의 방에 잠시 다녀오고 싶은데요.”
“아…….”
역시 동생 생각이 난 게 맞았나 보다. 나는 조금 짠해졌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는 좀처럼 감을 잡지 못했다.
눈앞의 밀리엄 켄트우드와, 그의 금색 눈에 드리운 씁쓸한 슬픔은 어떻게 해도 게임 캐릭터의 그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시야 오른쪽에 주르륵 늘어선 아이콘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정신 차리자. 이건 게임이고 저 사람은 게임 캐릭터고 저 사람의 상실은 그냥 설정에 불과해. 신경 쓰면 지는 거야.
“그럼 여긴 제가 조사하고 있을 테니까, 편하게 다녀오세요.”
열심히 자기 최면을 건 내가 애써 웃어 보이며 대답하자, 밀리엄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잠시 복잡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던 그는 별안간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이거 받으십시오.”
그가 건넨 것은 서너 장짜리 종이뭉치였다. 나는 그것을 얼떨결에 받아 들고서 눈을 깜빡였다. 이게 뭔데?
“수사국과 연결된 정보망을 최대한 동원해서 나름대로 조사를 좀 해봤습니다.”
“사건에 대해서요?”
“예, 아마 신문에 실린 내용보다는 자세할 겁니다.”
[ ‘밀리엄의 조사 자료’를 획득했다.
캠벨 남작 일가 사망 사건에 대한 상세 정보들이 정리되어 있다. ]
오, 시스템도 인정하는 상세 정보란 말이지. 역시 전직 수사관. 때려치웠어도 인맥은 살아 있는 모양이다.
그럼 잠시 실례하도록 하죠, 하는 말을 남긴 채 밀리엄은 서재를 빠져나갔고 나는 내 손에 들린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그것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사건 현장에 대한 정보였다.
캠벨 남작 내외와 소남작 부부의 시신이 네 구 모두 서재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
나는 그제야 밀리엄이 서재부터 와보자고 말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물론 지금 내가 서 있는 서재는 언제 그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냐는 듯 아주 말끔한 상태로 정리되어 있다.
그래도 사건을 조사하려는 입장이라면 현장부터 다시 뒤져보는 게 맞지. 그럼, 그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나갔다.
네 명의 사망자 중 캠벨 남작을 제외한 셋의 사인은 이미 공개된 바대로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
그러나 시신들은 전부 포박당한 상태였으며 후두부에서는 상처가 발견되었고…….
이 점을 근거로 수사국에서는 피해자들이 각기 다른 곳에서 머리를 맞고 기절한 뒤 사건 장소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했다는 모양이다.
……그렇게 추정했는데 어쩌다 우발적인 범행 어쩌고 하는 결론이 나오게 된 거지? 수사하다 졸았나? 아니면 뭔가 외압이 있었나?
그런 거라면 곤란하다. 수사에 압력을 넣을 수 있을 정도의 거물이 엮인 이야기라니 스케일이 너무…….
[ 키워드 ‘외압의 가능성’ 획득 ]
……너무 크잖아!
나는 야속한 키워드 획득 알림에 분노의 한숨을 내쉬며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책상의 빈자리에 종이들을 내려놓고 수첩 아이콘을 눌러 문제의 키워드를 확인했다.
[ 5. 외압의 가능성 ]
계획범죄를 의심할 만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수사국에서는 캠벨 남작의 범행이 우발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누군가 수사 과정에 개입한 것은 아닐까?
내 비약이길 바랐는데 이런 정보가 뜬다는 건 그냥 외압 땅땅 확정이란 소리 아닌가?
골치가 다 아파왔다. <레드 헤링>은 공간적 배경만큼이나 스토리의 스케일도 그리 큰 축에 속하지 않았다.
고립된 대저택이라는 닫힌 공간 안에서 일주일 남짓한 시간 동안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
인물들의 과거가 스펙터클하긴 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그런데 후속작인 <블루 달리아>는 어째 돌아가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따지고 보면 배경도 너무 넓었다.
튜토리얼에서만 해도 베로니카의 집, 변호사 사무실, 길거리와 병원까지 쏘다니게 만들었고 지금 나는 캠벨 저택에 와 있다.
여태 지도에 추가된 장소들로 보나 지도 자체의 크기로 보나 최소 도시 하나는 통째로 써먹을 예정인 것 같았다.
게다가 밀리엄의 옛 직장이기도 한 왕립수사국은 설정상 왕실 직속의 엘리트 집합소다.
그런 기관의 수사 과정에 압력을 넣을 수 있을 정도의 개인이나 단체와 엮이는 이야기….
어쩌면 남작 일가의 사망 사건은 <블루 달리아>의 메인사건이 아니라 시작점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예상이 서지 않자 갑자기 불안해졌다.
나,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건 맞겠지?
제깟 게 길어봤자 스토리 게임인데 시간을 막 몇 년씩 잡아먹고 그러지는 않겠지?
왠지 울고 싶어지는 기분을 애써 참으며, 나는 책상 앞에 선 김에 책상부터 조사해보기로 했다.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책상 위엔 무언가가 많이 놓여 있거나 하지 않았다.
만년필 스탠드에 비싸 보이는 만년필들이 주르륵 서 있고, 그 옆엔 사용하지 않은 메모지 더미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내가 내려놓은 종이 옆에 책 한 권이 올라와 있었다. 제목은 「황금의 강」.
어디 보자, 뭐부터 살펴볼까….
나는 우선 책을 집어 들었다.
[ 소설 「황금의 강」을 발견했다.
책 중간에 갈피끈이 끼워져 있다.
친절하게 갈피끈 얘기를 해줬으면 그 페이지를 펼쳐보는 게 인지상정이겠지!
나는 끈 끝을 잡고 야심차게 책 중간을 펼쳤다.
그러나 펼쳐진 것은 평범한 페이지였다.
한글도 영어도 아니고 심히 꼬부랑거리지만 놀랍게도 한글처럼 읽히는 글자들이 깨알같이 인쇄된.
챕터의 시작 지점인지 ‘역류’라는 챕터명이 왼쪽 페이지 중앙에 조금 큰 글씨로 박혀 있다는 것이 특이사항의 전부였다.
혹시 시스템창이 반응할까 싶어 기다려보았지만, 따로 시스템 문구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당장 쓸 게 아닌가? 하고 책을 내려놓으려는데, 책장 사이로 하얀 종이가 비죽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집게손가락으로 종이를 슥 빼낸 뒤 책을 그대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 ‘쪽지 조각’을 획득했다. ]
오, 이건 언젠가 쓸데가 있다는 뜻이렷다?
의미 있는 발견을 했다는 생각이 들자 내심 기분이 좋아진 나는 손에 든 쪽지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예언서의 열쇠 = ’
쪽지 ‘조각’이라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쪽지는 완성된 형태가 아니었다.
모양과 내용을 보아하니 절반 정도가 찢겨나간 상태였다.
그보다 예언서라니… 이게 웬 갑분 오컬트 전개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