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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5화 (5/121)

5화. 튜토리얼 (5)

결국 나는 한참 동안 머리를 굴려보다가, 일단 가장 기본적인 부분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 보기로 했다.

“뭐라고 감사인사를 드려야 할지… 켄트우드 씨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괴한의 습격도 밀리엄의 등장도 결국엔 튜토리얼을 진행하고 베로니카와 밀리엄을 극적으로 만나게 만들기 위해 상정된 시나리오였겠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내 감사인사를 들은 밀리엄이 영 껄끄럽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딱딱하게 말했다.

역시 베로니카가 곱게 보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아… 이 분위기 어쩌죠?

나는 가뜩이나 초라한 나의 인싸력이 다 죽어버린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은 앞으로 밀리엄과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뿐인데, 어떻게 대화를 끌고 가야 그런 전개로 이어질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리고 내가 고민하며 그의 눈치를 살피는 사이, 밀리엄은 무언가 망설이는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을 침묵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저, 캠벨 양. 실은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어 댁으로 찾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긴히 부탁할 일? 좀 갑작스럽지만 뭔가 유의미할 것 같은 화제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한테요?”

“네. 캠벨 저택과 관련해서.”

그렇게 말하는 밀리엄의 표정은 아주 진지해 보여서,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캠벨 저택이라.

조지 캠벨 소유의 저택은 여러 채가 있지만, 그중 캠벨 저택이라고 불리는 건 아마 캠벨 남작 일가가 살았던 바로 그 저택일 것이다.

“캠벨 양에게 그 저택을 처분할 권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전에 제가 직접 그곳을 조사해보고 싶습니다. 누이를 잃은 오라비로서 이 정도는 부탁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내가 저택의 처분에 대해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둘째치고, 밀리엄 켄트우드의 선연한 금색 눈이 어딘지 음울하게 빛났다.

그는 잠시 이를 악무는가 싶더니 다시금 천천히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작금의 수사 결과가 전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수사 결과랍시고 발표된 내용은 내가 보기에도 제발 날 의심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고 있는 듯한 것이었다.

아, 어제까진 멀쩡하던 사람인데요. 갑자기 온 가족을 죽이고 자살했습니다. 동기는 모르겠네요. 아무튼 수사는 끝이에요. 땅땅.

이건 뭐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내가 밀리엄이라도 납득할 수 없었으리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캠벨 양도… 말씀이십니까?”

밀리엄이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전의 꿈에서 본 장면을 떠올렸다.

그것은 단순한 꿈이라기보다 게임이 보여준 환상에 가까울 것이다.

조지 캠벨은 높은 확률로 자살하지 않았고, 밀리엄과는 어차피 공조하게 될 운명.

그러니 이 시점에서는 적당히 그럴싸하게 말을 맞추는 게 좋겠지.

“유서가 발견되지 않은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요. 한 명도 아닌 세 명을 교살했는데 불화니 우발적 범행이니 하는 건 너무 억측 같고요.”

“권총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밀리엄이 말했다. 내가 근거로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사람을 죽여본 적 따위 없지만, 목을 졸라서 사람을 죽이는 게 힘든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우발적으로, 화가 나서 목을 조른다? 있을 수 있지. 잘하면 상대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이성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피해자는 셋이다.

하물며 그중 하나는 한창 나이의 성인 남성.

생각을 고쳐먹을 시간도 아주 많이 주어지고, 상대의 저항까지 감당해야 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는 일을 세 번이나 ‘우발적으로’ 저질렀다는 추측은 어딘가 이상하다.

하물며 그래 놓고 본인은 권총자살을 했다는 결론이라니.

내가 조금 전 꿈에서 조지 캠벨이 괴한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지 않았다 해도 의심을 품었을 것이다.

사람을 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났는데 나한테 총이 있다면 그냥 그걸로 쏴 죽이는 게 가장 손쉬운 방법 아닌가?

그러니 가정불화니 우발적 살인이니 하는 추측은 유서를 찾지 못하고 동기도 밝혀내지 못한 수사국에서 대충 쑤셔 넣은 변명 이상으로 들리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크흠. 밀리엄의 말을 받아 이어가려던 찰나에 갑작스레 목이 아파왔다. 나는 콜록 콜록 기침을 했다.

기침을 하느라 목이 울려선지 붕대 안쪽이 더 쑤셔왔다. 으, 아파 죽겠네.

하지만 이 아픔이야말로 가장 수상한 정황 중 하나였다.

“전 마지막 남은 ‘캠벨’이고, 오늘 목이 졸려서 죽을 뻔했어요. 이게 정말로 우연일까요?”

다소 희미하고 애매하게 느껴졌던 목표 지점이 이제 조금이나마 분명하게 보이는 것 같다.

캠벨 남작 일가 사망 사건에는 진범이 있고, 그 진범은 베로니카 캠벨 역시 노리고 있다.

베로니카… 즉 플레이어는 살아남기 위해서 남작 일가의 사망 사건을 파헤쳐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내 말을 들은 밀리엄은 별안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조금, 아주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왜, 왜 사람을 그런 눈으로 보시는….”

“제가 캠벨 양을 설득하기 위해 생각해뒀던 가설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제가 켄트우드 씨의 수고를 덜어드린 셈이 될까요?”

“예, 그렇습니다.”

밀리엄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딱딱한 태도였지만, 아주 약간 정도는 기분이 나아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시력에 보탬이 되는 애정캐의 얼굴을 잠시 홀린 듯 감상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려던 말을 마저 하기 위함이었다.

“아, 아무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콜록!”

급하게 말을 하려니 다시 기침이 나왔지만, 밀리엄은 잠자코 날 기다렸고 나는 반쯤 갈라진 목소리로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하신다는 조사, 허락해드리는 대신 저도 함께할 수 있을까요?”

밀리엄이 돌연 미간을 찌푸린 것은 그때였다.

“만약 진범이 아직 잡히지 않은 거라면, 위험한 일에 발을 들이시는 꼴이 될 수도 있는데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실상은 ‘베로니카 캠벨과 함께’해야 하는 상황이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상황에서 밀리엄의 의사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켄트우드 씨. 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오늘도 죽을 뻔했어요.”

“오늘 같은 일이 또 일어날 수도 있고, 어쩌면 훨씬 더 위험해지실 수도 있다는 소립니다.”

“영문도 모르고 언제 또 같은 위험이 닥칠지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보다는, 그냥 위험한 쪽으로 아예 가버리는 게 맘이 편할 것 같은데요.”

왜냐하면, 어차피 베로니카 캠벨은 주인공이거든…….

나는 반쯤 해탈한 채로 밀리엄에게는 절대 말하지 못할 생각을 하며 허탈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게임종료 버튼도 없는데 뛰어봤자 벼룩이고 도망쳐봤자 게임 속이지.

결국 스토리형 게임은 결말을 보고 나면 끝나게 되어 있으니, 착실하게 엔딩을 향해 달려가 보는 게 탈출을 위해서는 더 생산적인 시도일 것이다.

나는 내 다친 목 부분을 가만히 바라보며 영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 밀리엄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정말로 괜찮다는 뜻의 웃음이었다.

그냥 싸게 싸게 승낙합시다. 어차피 님도 나도 자유의 몸이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좋습니다. 함께하는 걸로 하죠.”

그리하여 밀리엄이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뱉은 순간, 기다렸다는 듯 시스템 문구가 눈앞에 떠올랐다.

[ 튜토리얼 4. 저장과 불러오기]

: 사용하지 않은 회중시계가 1개 있다. 시계뚜껑을 열었다 닫아 현재까지의 플레이 기록을 저장하자. 이후 태엽을 한 바퀴 돌리면 세이브 지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

반짝이는 회중시계 아이콘을 누르자 손바닥만 한 금색 회중시계가 손 안에 들어왔다. 크라운을 눌러 시계뚜껑을 열었다가 단번에 닫았다.

나는 갈색 머리 미남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모래처럼 파스스 흩어져 사라지는 시스템 문구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고는 아무래도 내게 썩 호의적이지는 않은 것 같은 나의 새 파트너를 향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허공에 떠오른 마지막 문장을 웃는 낯으로 노려보았다.

[ 튜토리얼 완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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