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4화 (4/121)

4화. 튜토리얼 (4)

밀리엄 켄트우드.

게임 소개대로라면 <블루 달리아>에서도 주요인물로 활약하게 될 바로 그 인물.

“예, 밀리엄 켄트우드입니다. 캠벨 양,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캠벨 양, 캠벨 양?!”

눈앞의 남자가 밀리엄이라는 걸 깨닫기 무섭게 갑자기 온몸에 힘이 쫙 빠지더니, 상반신이 옆으로 스르륵 기울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난 지금 쓰러지고 있구나. 알았는데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대로 땅바닥에 헤딩을 할 줄 알았는데, 황급히 팔을 뻗은 밀리엄이 내 상체를 받쳐 안았다. 허리를 받친 팔이 아주 단단했다. 좋아, 뇌진탕 걱정은 덜었군.

그러나 허물어지다 만 몸과 달리 정신은 아득히 추락하듯 혼미해지고 있었다.

[ 과제 005. ] 밀리엄과의 조우 달성! (보상 : 회중시계 1개)

[ 인물정보 ‘밀리엄 켄트우드’ 획득 ]

[ 튜토리얼 5. 저장과 불러오기]

: 세이브 아이템 ‘회중시계’를 사용하면 1회에 한해 세이브 시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

속절없이 정신을 잃으며 나는 허망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중요한 건 진작 주지 그랬냐…….

이윽고 온 세상이 새카매졌다.

***

기묘하고 불쾌한 부유감이 온몸에 감돌았다.

눈을 뜨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시야는 금세 환해졌다. 마치 처음부터 눈을 감은 적도 없었던 것처럼.

……이건 뭐지. 꿈인가?

“가, 가까이 오지 마…!”

눈앞에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고 있는 낯선 얼굴의 중년 남자가 있었다.

나는 혹시 나한테 하는 말인가 싶어 남자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남자는 내 손길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고, 뻗어 나간 손은 덜덜 떨리고 있는 남자의 어깨를 그대로 통과했다.

몇 번을 휘저어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뻗는 족족 남자의 몸을 통과해버리는 내 손은 반쯤 투명하게까지 보였다.

나는 유령이라도 된 기분으로 허우적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내 몸을 쑥 통과한 누군가가 남자에게로 다가선 것은 그때였다.

아무런 물리적 자극이 전해지지 않았음에도 헉, 하고 숨을 들이켠 나는 나도 모르게 비틀대며 옆으로 비켜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괴한이 남자를 향해 바싹 다가갔다.

그러고는 남자의 머리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옆으로 휙 꺾었다.

남자는 그 즈음 이미 이성을 잃은 듯했고, 괴한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총을 남자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댔다.

“잘 가시지, 캠벨 남작.”

캠벨 남작?

괴한의 목소리에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다시 한번 눈에 들어왔다. 저 남자가 캠벨 남작이라고?

일순 머릿속을 물들인 당혹감에 나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것을 지독히도 후회하게 되었다.

탕!

소름 끼치는 총성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눈앞에서 피가 튀며 캠벨 남작의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졸지에 그 끔찍한 광경을 코앞에서 지켜보고 만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몸이 땅에 닿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소름 끼치는 부유감이 아직도 건재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몸이 덜덜 떨렸지만, 야속한 시선은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남작과 괴한에게서 뗄 줄을 몰랐다.

캠벨 남작의 시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괴한이 이내 자기 손에 들려있던 총을 남작의 오른손에 쥐여놓고 유유히 몸을 돌렸다.

나는 땅인지 허공인지 모를 곳에 주저앉은 채, 창문을 넘어 사라지는 괴한의 뒷모습을 패닉 상태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갑작스레 찾아든 어둠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기 전, 나는 눈을 뜨면 현실의 내 방 천장이 보이기를 바랐다.

아까까지 경험한 생생하고 스펙터클한 튜토리얼은 그냥 게임을 너무 기대한 나머지 꾸게 된 일종의 개꿈이었다고 웃으며 회고할 수 있게 되기를.

그러나 눈보다 먼저 열린 귓가를 울려오는 공공장소 특유의 소음은 그런 나의 바람을 정면으로 배신하고 있었다. 나는 포기의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회색 천장이 보였다. 당연히 내 방 천장은 아니었고, 아까 처음 눈을 떴을 때 보았던 베로니카의 방 천장도 아니었다.

또 ‘낯선 천장이다’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가… 따위의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곁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드십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목을 붕대 같은 걸로 고정시켜 둔 건지 고개를 돌린다고 돌렸는데 몸 전체가 반쯤 같이 돌아갔다.

침대 옆 의자에 앉은 밀리엄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 보았던 당황한 모습과는 달리 어딘지 착 가라앉은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해까지 가라앉은 상대의 눈빛에도 불구하고 나는 속절없이 경탄하고 말았다.

밀리엄 켄트우드다. 진짜 밀리엄 켄트우드가 날 보고 있어.

밀리엄 켄트우드는 <레드 헤링>을 한창 즐기던 시절 나의 최애캐였다.

하필 추리게임 속이라는 건 암만 생각해도 끔찍하지만, 진짜 인간처럼 살아 움직이는 소싯적의 애정캐와 직접 대면할 수 있게 된 것만은 조금쯤 설레여 해도 되는 일이 아닐까?

갑작스레 이 상황이 몹시 황공해진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려 침대에 손을 짚었다. 그런 나를 밀리엄이 말렸다. 딱딱한 목소리였다.

“갑자기 일어나면 안 됩니다. 여긴 병원이고, 치료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어요.”

“밀… 켄트우드 씨가 절 여기까지 데려와주신 건가요?”

밀리엄이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침 병원이 근처였다고 설명했다. 나는 밀리엄의 부축을 받아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제법 규모가 있어 보이는 병원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스멀스멀 떠오르는 시스템 문구도 함께였다.

[ 성 조나단 병원 ]

‘지도’에 새로운 장소가 추가되었다.

새로 추가되었다는 장소는 확인해볼 것도 없이 이 병원이겠고… 나는 슬쩍 시선을 움직여 오른쪽의 아이콘들을 확인했다.

수첩 아이콘이 반짝이고 있었고, 권총 아이콘 밑에 회중시계 모양 아이콘이 새로 생긴 채였다. 아이콘 옆에 작은 글자로 ‘1’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회중시계가 하나 있다는 뜻이겠지.

아무튼, 다음에 눌러야 할 지점을 알려주는 것을 보니 아직 튜토리얼이 끝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수첩을 눌렀다.

그러는 사이 밀리엄은 나직하고 감미로운, 그러나 여전히 조금 냉랭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경찰에 신고는 했습니다. 아까 그 남자의 인상착의도 제가 경관들에게 증언해두었고요.”

“가, 감사합니다…….”

감사인사를 전한 나는 수첩으로 시선을 내렸다. 펼쳐진 페이지엔 짤막한 정보 두 줄이 적혀 있었다.

[ 1. 밀리엄 켄트우드 ]

- 전직 왕립수사국 수석수사관

- 안젤리나 캠벨의 오빠

어, 안젤리나 캠벨이라면 조지 캠벨이 죽였다는 며느리인데.

일순 <레드 헤링>에서의 설정을 떠올린 나는 나도 모르게 시선을 들어 밀리엄을 바라보았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밀리엄 켄트우드는 수년 전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으로 부모를 잃고 왕립수사국 수사관이 되었다는 설정의 인물이었다.

남은 가족이라곤 여동생 하나가 전부인.

아니…… 이건 인간적으로 좀 너무한 것이 아닌가?

밀리엄 켄트우드는 <레드 헤링> 스토리의 명실상부한 최대 피해자였다.

프롤로그에선 양친을 잃었고, 결말에선 겨우 사귄 벗을 잃었으며 에필로그에선 신념과 직업을−자의였지만−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 불쌍한 사람한테서 마지막 남은 혈육까지 빼앗을 생각을 했지?

밀리엄 켄트우드의 불행을 사랑해도 너무 사랑하는 것 같은 제작진의 안배가 어떤 의미에선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인간들 같으니.

별안간 온 세상이 제작진의 변태 같은 안배를 입은 거대한 함정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서늘히 끼쳐오는 소름에 어깨를 부르르 떨며 수첩을 덮었다.

수첩은 아이콘이 되어 사라졌고, 나는 좀 전보다 훨씬 어색해진 기분으로 밀리엄을 응시했다.

선명한 금색 눈은 음울하고 피로해 보였다.

그러니까 뭐냐. 안젤리나 캠벨이 밀리엄 켄트우드의 유일한 혈육이었고 그녀를 죽인 사람은 베로니카의 백부라고 결론 난 상황이란 소린데.

나로서는 밀리엄이 베로니카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 좀체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알 길이 없었다.

길바닥에 내버려두지 않고 병원에 데려와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준 걸 보면 딱히 대단한 악감정은 없는 것 같지만…….

피차 경황이 없었던 아까 전과 달리, 지금 밀리엄이 보이는 태도에는 명백하게 냉랭한 구석이 있었다.

이럴 때 대화 이벤트가 발생해서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좋겠는데 시스템창은 야속하게도 조용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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