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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3화 (3/121)
  • 3화. 튜토리얼 (3)

    진상을 파헤치고자 마음먹으려면 당연히 그만큼의 관심이 필요한 법인데, 어째선지 눈앞에 제시된 선택지에서는 손톱만큼의 관심도 읽히지 않았다.

    “그런가요.”

    나는 일단 대답했고, 벤자민 홉스가 설명을 이어갔다.

    “유서는 끝까지 발견되지 않았지만, 정황이 워낙 명확하고 새로운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 터라 당초의 수사방향대로 결론이 난 모양입니다.”

    [ 키워드 ‘수사 결과’ 획득 ]

    [ 과제 003. ]

    첫 번째 대화 달성! (보상 : 모노클 1개)

    오, 첫 번째 대화는 이렇게 끝인가? 난이도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튜토리얼이고, 실전에 들어가면 대답 한 번 잘못했다가 데드엔딩 테크를 탈지도 모르니 주의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나는 이제껏 플레이해온 모든 추리게임에서 내가 택했던 온갖 잘못된 선택지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전부 오래된 것들이라 잘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능이 기억하는 몇 가지 법칙이 있었다.

    괜히 시비 털지 말 것. 대놓고 의심하지 말 것. 정보공유에는 신중을 기할 것. 수상한 점이 없는 사람을 가장 수상히 여길 것.

    이놈의 세상에 믿을 건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 또 명심할 것.

    다른 게임에도 물론 적용할 수 있는 법칙들이지만, 내가 들어와 있는 이곳이 <레드 헤링>의 후속작이라는 점에서 이 법칙들은 아주 중요했다. <레드 헤링>은 주요 등장인물의 태반이 살인자인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감추기 위해 언제든 새로운 살인을 저지를 각오가 되어 있었고, 삐끗해서 잘못 나간 말 한 마디가 창 밖에서 날아오는 총알이나 장식용 석궁에서 발사된 화살 또는 와인에 탄 극독이 되어 돌아오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사건의 흑막 또한…….

    ‘나를 믿어주어 고맙습니다.’

    …아무튼, 후속작에서라고 그 독기가 어디 가겠는가. 나는 대화 이벤트가 돌아올 때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임하기로 다시 한 번 굳은 결의를 다졌다.

    “어쨌든 남작님. 그간 이래저래 고생 많으셨습니다. 서류는… 들고 오신 가방에 들어갈 것 같지 않으니 따로 가방을 내어드리죠.”

    “앗, 그렇게까지… 감사합니다.”

    나는 친절하게도 가방까지 내어주겠다는 홉스 변호사를 향해 꾸벅 인사하며 그가 내미는 서류가방을 받아들었다.

    “여러 가지로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변호사님.”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생각나는 것 중 가장 그럴 듯하게 느껴지는 인사를 건넸고, 벤자민 홉스는 허허 웃으며 보람찬 얼굴로 나를 배웅해주었다.

    그대로 복도를 가로질러 건물을 빠져나온 나는 갓길에 서 있던 마차를 잡아탔다.

    그리고 중간에 내려서, 아까 마차를 타고 변호사 사무소로 향하며 미리 봐두었던 집 근처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샀다.

    청년갑부가 된 김에 근사한 외식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그 정도로 입맛이 돌지도 않았고, 왠지 목이며 어깨가 뻐근한 게 얼른 집에 돌아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집까지는 딱히 마차씩이나 탈 만한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한 손에 서류가방을, 다른 손에 샌드위치 봉투를 달랑달랑 들고서 또각또각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길을 잃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이곳 지리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초행길인 것도 맞다. 하지만 나는 길눈이 제법 밝은 편이었고 베로니카의 집이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직선으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는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분명 맞는 길로 걷고 있었을 텐데, 왜 막다른 길이 나왔을까?

    눈앞을 답답하게 막고 있는 갈색 벽을 올려다보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는데, 대낮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일순 덮쳐오는 불길함에 등을 돌려 사람들이 있는 거리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윽……?!”

    누군가 뒤에서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나는 목에 감긴 밧줄을 부여잡고 발버둥 쳤다. 눈앞의 모든 것이 둘로 나뉘어 보였다가 희미해지기를 반복했다.

    숨이 턱 끝까지 막혀 컥컥 소리가 나고, 가뜩이나 뻐근했던 목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아파오고, 눈꼬리엔 금세 축축한 물기가 맺혔다.

    이게 뭐야. 튜토리얼부터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나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공포 속에서 발버둥 치며 어떻게든 시야를 유지하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오른쪽의 리볼버 아이콘이 반짝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그와 동시에 시스템 문구가 혼미한 시야를 채우며 떠올랐다.

    [ 튜토리얼 3. 호신술]

    : 리볼버를 사용해 위기에서 벗어나라!

    이런 미친 게임!

    나는 한 손으로 밧줄을 잡고, 다른 손을 덜덜 움직여 허공으로 뻗었다. 간신히 올라간 손으로 리볼버 아이콘을 누른 뒤 재빨리 치맛자락 안쪽으로 손을 감추었다.

    손에 착 감기는 권총과 검지에 걸린 방아쇠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뭐, 장전 같은 건 안 해도 되겠지? 그 정도는 해놓고 손에 쥐여주는 거겠지? 젠장!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일단 저지르고 보자!

    나는 필사적으로 치던 발버둥을 멈추고, 내 치맛자락 뒤에서 느껴지는 괴한의 다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아악!”

    뒤이어 들린 것은 남자의 비명이었다.

    나는 괴한이−아마도 다친 다리를 부여잡느라− 밧줄을 놓친 틈을 타 목에 감긴 밧줄을 풀어내고 빠르게 뜀박질을 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고 말았다. 안 돼!

    [ 과제 004. ]

    첫 번째 호신술 달성! (보상 : 모노클 1개)

    이 와중에 달성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달성이야! 처음이자 마지막 호신술이 되게 생겼는데!

    “사… 살려주세요! 아무도 없어요?!”

    사람을 쏘았다는 사실에 당황하거나 떨 새도 없이 나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온 힘을 다해 외치며 뒤를 휙 돌아보았다.

    검은 중절모를 쓰고 검은 헝겊을 얼굴에 두른 검은 옷차림의 남자가 구멍 난 허벅지를 부여잡고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모자 아래로 살짝 튀어나온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와 푸른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새파란 벽안이 보였다.

    나는 힘이 풀린 다리를 질질 끌고 필사적으로 더듬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쓰러졌던 남자가 상처 입은 짐승 같은 신음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이건 튜토리얼이잖아! 튜토리얼부터 주인공이 죽는 거야? 베로니카는 사실 페이크 주인공이었던 거야?

    어쩐지 설득력 있는 발상이라 소름이 오소소 끼쳤다.

    어쩌면 베로니카 캠벨은 튜토리얼용 플레이어블 캐릭터일지도 몰라.

    사실은 베로니카를 포함한 캠벨 가문 사람들의 사망 사건을 파헤치는 게 게임의 줄거리고 난 그냥 개죽음을 당하기 위해 이 세상에 끌려온 걸지도!

    하다하다 그런 생각까지 들자 내가 주인공인데 설마 벌써 죽기야 하겠느냔 믿음에 와자작 금이 갔다.

    다리엔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고 팔은 덜덜 떨렸으며 목은 부러진 것처럼 아팠다. 어느새 일어선 괴한이 절뚝이며 다가왔다.

    그렇게, 정말 이대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찰박, 찰박, 찰박!

    젖은 땅을 밟고 달려오는 듯한 발소리가 등 뒤에서 가까워졌다. 사람이다!

    내 쪽으로 다가오던 괴한 또한 인기척을 눈치챘는지, 무어라 육두문자 같은 것을 씹어뱉고는 절뚝이는 다리를 붙들고 뒤를 돌아 막다른 골목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무슨 일입니까!”

    등 뒤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괴한이 그리 높지 않은 벽 위로 훌쩍 뛰어오른 순간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괴한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저 사람이… 콜록, 저 사람이 갑자기 제 목을 졸라서, 그래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그래서 총으로 쐈다’는 말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밧줄과 내 손에 들린 총을 본다면 알아서 상황을 짐작하겠지.

    벽 위의 괴한은 벽을 완전히 넘어가기 직전, 내 등 뒤에 나타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기라도 하듯 고개를 돌렸다.

    멀어서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나는 순간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고 생각했다.

    “거기 서!”

    남자는 그렇게 외치며 나를 지나 벽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괴한이 벽을 넘어가는 게 더 빨랐다.

    괴한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나는 어딘지 황망해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을 콜록거리며 응시했고, 내 기침 소리에 남자가 급히 뒤를 돌았다.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가슴께에 가져다 대며 나에게 다가오던 그는 일순간 멈칫했다.

    “괜찮으십… 캠벨 양?”

    뭐야. 베로니카를 아는 사람인가?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나는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추수철의 밀밭 같은 연한 갈색 머리. 색이 짙고 선명한 금빛 눈동자. 선이 날카롭지만 결코 예민해 보이지는 않는 수려한 인상.

    내가 이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와 만난 사람이라곤 변호사 벤자민 홉스 하나가 전부인데, 남자에게선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풍겼다.

    나는 잠깐 동안 멍하니 머릿속을 더듬었다. 분명 초면일 텐데 왜 익숙하지?

    그리고 다음 순간, 뇌리를 스쳐가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타이틀 화면의 일러스트에서도 보았지만, 그보다는 더 오래전 보았던 작은 화면 속의 스탠딩 일러스트가 더 익숙한 남자.

    “미, 밀…… 콜록.”

    밀리엄 켄트우드. <레드 헤링>의 두 주인공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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