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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의 상속녀인데 추리게임이라니-2화 (2/121)
  • 2화. 튜토리얼 (2)

    베로니카가 제 시간에 홉스 변호사를 만날 수 있도록 외출 준비를 하고, 변호사 사무소를 찾아가는 것이 튜토리얼의 내용인 모양이었다.

    다행히 입고 있는 옷은 외출복인 것 같다. 11월이라 밖이 쌀쌀할 테니 겉옷만 챙겨 입자. 마침 방문 옆 옷걸이에 코트가 걸려 있었다.

    문제는 내가 홉스 변호사 사무소의 위치를 모른다는 데 있다.

    그러니 지금은 방 안을 샅샅이 뒤져서 홉스 변호사 사무소의 위치를 알아내야 한다.

    아, 인터넷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가상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하는 이 게임에 인터넷 따위가 존재할 리 만무하다.

    게다가 제대로 된 추리게임이라면 인터넷을 사용하려 해도 컴퓨터 전원 케이블이 사라져 있다거나, 암호가 걸려 있다거나 해서 플레이어를 고통스럽게 만들겠지.

    겉옷 주머니를 뒤지고 신문 사이사이를 뒤지고 책장을 뒤져대며 나는 신경질을 냈다.

    튜토리얼인데 변호사 사무소 주소 정도는 그냥 알려줘도 되잖아!

    아니, 모르는 게 설정오류 아니야? 나는 지금 베로니카 캠벨이고 이건 베로니카가 직접 잡아놓은 약속인데?

    나는 이를 악물고 방 곳곳을 이 잡듯 뒤졌다.

    방 안의 물건들을 열심히 만져보면서 나는 게임 플레이에 유의미한 물건을 만질 때만 시스템창에 물건의 이름이 떠오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예를 들어서, 화장대 위의 빗을 집어 들었을 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침대 옆 탁자에 신문과 함께 올려져 있던 「녹스빌 저택의 수수께끼」라는 책을 들었을 때는 시스템창이 반응했다.

    [ 「녹스빌 저택의 수수께끼」를 획득했다.

    지금은 쓸모가 없어 보인다. ]

    ‘지금은’ 쓸모가 없다고 했으니 언젠가는 쓸모가 있겠지. 최소한 빗보다 쓸모가 있으리란 점만은 확실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던 내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책상 앞이었다.

    검은색 타자기. 하얀 종이 뭉치들. 간단한 필기구 따위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책상 아래쪽엔 세 개의 서랍이 있었다.

    나는 제발 서랍 안에 변호사 사무소 주소가 들어 있기를 바라며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놀라서 뒤로 자빠질 뻔했다.

    서랍 안에는 권총이 들어 있었다.

    나는 검지를 슬쩍 들어 총의 손잡이 부분을 콕 만져보았다. 시스템창이 반응했다.

    [ ‘더블액션 리볼버’를 발견했다. ]

    살다 살다 진짜 총을 만질 일이 생기다니.

    잘못 만졌다가 총알이 발사되면 어떡하지. 오발사고로 데드엔딩이 뜨면?

    물론 데드엔딩도 엔딩은 엔딩이니 본래 세계에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그냥 죽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걸 위해 목숨을 건 도박을 할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만약의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총이 든 서랍을 조용히 닫으려던 때였다.

    서랍 안쪽에 직사각형 모양의 종이가 끼워진 것이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종이를 꺼내들었다. 손바닥보다 약간 작은 종이에는 깨알 같은 글씨들이 인쇄되어 있었는데, 뭐라고 쓰여 있는지 확인하기도 전에 시스템창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 ‘벤자민 홉스의 명함’을 획득했다.

    하단에 사무소 주소가 쓰여 있다. ]

    사무소 주소가 쓰여 있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연기처럼 사라지는 시스템 문구 뒤로 명함의 내용이 보이기 시작했다.

    ‘홉스 변호사 사무소. 헤일로 스트리트 301A’

    찾았다. 찾았어. 내가 사무소 주소를 찾아냈어.

    [ ‘지도’에 새로운 장소가 추가되었다. ]

    수첩 아이콘 밑에 지도 모양 아이콘이 새롭게 나타났다. 아이콘 위로 손가락을 꾹 누르니 누렇게 낡은 재질의 커다란 종이지도가 허공에 펼쳐졌다.

    널따란 지도에 표시된 장소는 두 군데뿐이었다. ‘베로니카 캠벨의 집’과 ‘홉스 변호사 사무소’.

    주소를 알았으니 이제 찾아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나는 옷걸이에 걸린 검은색 케이프코트를 걸치고 손가방을 들었다. 손가방 안에는 아까 방을 뒤지면서 발견한 지갑에서 꺼낸 돈을 챙겨 넣었다. 마차를 잡아탈 돈이었다.

    나갈 준비를 마친 나는 방문 쪽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그러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뭐야…….”

    손잡이가 끝까지 잘 돌아가는 것을 보아 문이 잠긴 상태는 아니었다. 고장 난 듯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문이 열리지 않도록 꽉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 아직 나갈 준비를 마치지 않았다. ]

    뭘 빼먹었다는 거야. 옷도 챙겼고 가방도 챙겼고 돈도 챙겼고 주소도 알아냈는데!

    그리고 그때, 문 옆에 박아놓은 커다란 메모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늘에 가려져있어서 아까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것.

    무슨 식재료는 어느 가게가 싸고 맛있었다는 사소한 정보부터, 아마도 베로니카 캠벨의 신조로 보이는 명언들까지 온갖 잡다한 메모들이 잔뜩 붙어있는 메모판이었다.

    나는 메모들을 위에서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 유독 크고 진한 글씨로, 별표까지 쳐가며 강조해놓은 메모 하나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내 몸은 내가 지킬 것.’

    아, 설마.

    나는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바라며 다시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까 열었던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권총… 뭐였더라, 더블액션 리볼버 씨가 여전한 존재감을 자랑하며 그 자리에 있었다.

    아까는 슬쩍 만지기만 했었지. 시스템 문구도 ‘획득했다’가 아니라 ‘발견했다’라고만 떴고.

    나는 큰맘 먹고 손을 뻗어 총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 ‘더블 액션 리볼버’를 획득했다.

    이제 안심하고 외출할 수 있다. ]

    시스템 문구가 떠오름과 동시에 손에 들려 있던 총이 연기처럼 흩어져 시야의 우측 상단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날아간 연기가 지도 아이콘 아래에 권총 모양 아이콘으로 자리 잡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 과제 001. ]

    기본 아이템 장착 달성! (보상 : 모노클 1개)

    [ 과제 002. ]

    첫 번째 탐색 달성! (보상 : 모노클 1개)

    [ 튜토리얼 1. 탐색 ]

    : 힌트 아이템 ‘모노클’을 장착하면 탐색장소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힌트 아이템이 생긴 건 고마운 일이지만, 권총이 기본 아이템이라니.

    불길하게 왜 이러냐, 진짜…….

    ***

    시야 한쪽에서 존재감을 빛내는 권총 아이콘을 애써 무시한 채 베로니카의 집을 나선 나는 마차를 잡아타고 곧장 변호사 사무소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캠벨 양. 아니, 이제는 캠벨 남작님이라고 불러드려야겠군요.”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싶은 이지적인 인상의 변호사 벤자민 홉스가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벤자민 홉스가 권하는 대로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그가 내미는 서류뭉치들을 확인했다.

    평범한 재산 목록이었다. 평범하다고 하기엔 양이 아주 많았지만.

    손꼽히는 재력가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는지, 캠벨 남작의 재산이란 정말 어마어마했다.

    계좌에 들어 있는 돈이야 나는 이곳 화폐단위에 익숙하지 않으니 그냥 0이 매우 많구나, 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부동산이 대단했다.

    문제의 사건이 벌어졌던 저택을 포함해 수도에만 저택이 네 채. 타운하우스 열 채. 상업지구의 건물도 다수 보유중이라 매달 세를 받고 있으며, 지방의 컨트리하우스는 또…

    와. 장난 아닌데.

    여기저기 가진 주식은 또 어찌나 많은지, 몇 뭉치나 되는 종이증권들을 일일이 확인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렇게 넘기고 또 넘겨도 계속 뭐가 나오는 통에 입을 허 벌리고 경악하다가, 뭐라도 말을 해야겠다 싶어 ‘어, 엄청 많네요.’ 따위의 시답잖은 소리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 튜토리얼 2. 대화 ]

    : 인물과의 대화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라.

    갑자기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뭐, 뭐지? 별안간 인어공주가 된 기분으로 입을 뻐끔거리던 내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문구가 나타났다.

    [ 1. 저, 그럼 상속 절차는 이제 모두 마무리된 건가요? ]

    [ 2. 전부 사회에 환원하겠어요! ]

    보아하니 대화 이벤트가 발생하면 할 수 있는 말이 선택지에만 국한되는 모양인데, 이 와중에 2번 뭐야. 미친 거 아니야?

    나는 2번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1번을 따라 읽었다. 예상대로 목소리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저, 그럼 상속 절차는 이제 모두 마무리된 건가요?”

    “작위승계에 대한 폐하의 인가도 받으셨으니, 예. 그렇습니다. 절차가 많이 복잡해 힘드셨지요.”

    [ 키워드 ‘남작의 유산’ 해결. ]

    벤자민 홉스의 말과 함께 떠오른 시스템 문구를 바라보며 나는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를 계속 들었다.

    “오늘 아침 수사국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공식적으로 수사가 종결되었답니다.”

    [ 1. 그런가요. ]

    [ 2. 그렇군요. ]

    ……이 성의 없는 대답들은 뭐지?

    가까운 친척들이 하루아침에 넷이나 죽은 사건인데 이래도 되는 건가.

    애당초 이 게임은 베로니카가 백부 일가 사망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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