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튜토리얼 (1)
어떤 게임이 있었다.
표현이 과거형인 이유는 이제 누구도 그 게임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발신인 불명의 도전장을 받은 왕립수사국 수사관 밀리엄과 명탐정 제임스가 고립된 대저택에서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의 모바일 추리어드벤처게임 <레드 헤링>.
피쳐폰 시대의 끝물에 출시된 <레드 헤링>은 제법 퀄리티 좋은 명작 소리를 들으며 코어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나는 그 게임을 중학생 때 플레이했다. 그리고 아주 좋아했다.
미형의 작화도 좋았고, 음울하고 쓸쓸한 분위기는 몹시 취향이었고, 뒷맛이 씁쓸하게 남는 스토리도 마음에 들었다.
하나뿐인 트루엔딩부터 수십 개의 배드엔딩까지 모을 수 있는 엔딩을 전부 모으고도 몇 번이나 다시 플레이했을 만큼 좋아한 게임이다.
언젠가 후속작이 나온다면 꼭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10년 후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그렇다고 안 할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나는 스토어에 들어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설치를 터치했다.
후속작의 제목은 <블루 달리아>였다.
나는 앱이 설치되길 기다리며 게임 소개를 대충 훑어보았다.
백부인 캠벨 남작의 사망 이후 그의 작위와 유산을 물려받게 된 주인공 베로니카 캠벨이 <레드 헤링>의 주인공이었던 밀리엄과 함께 백부 일가의 사망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나는 엄지손톱만 한 게임 아이콘 속에서 추리게임 주인공답게 진지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흑발벽안의 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치가 완료되고, 세피아톤의 타이틀 화면이 켜짐과 동시에 슬프고 음울한 왈츠풍의 음악이 이어폰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게임 시작 버튼을 터치했고.
다음 순간 눈앞이 새카매졌다.
***
눈을 떴을 때 제일 처음 보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양손을 명치 위에 곱게 포갠 채 바로 누운 자세로 깨어난 나는, 현재 분명 내 것이 아닌 침대에 앉아 난생처음 보는 방 안을 열심히 두리번거리고 있는 중이다.
깔끔하고도 고풍스러운 침실. 좀 낡은 것 같으나 푹신한 침대. 커다란 옷장과 그 옆의 전신거울. 색이 진한 원목 화장대.
시대극 소품 같은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장과 세트로 맞춘 듯한 책상 위엔 박물관에서나 본 것 같은 타자기가 놓여 있다.
누가 봐도 현대인의 공간은 아니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은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새하얀 프릴블라우스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청남색 치마. 태어나서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스타일이었다.
한 마디로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거울을 봐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갑자기 눈앞의 허공에 이상한 것이 나타났다.
[ 베로니카의 방 ]
나는 입을 허 벌린 채로 시야 중앙에 둥둥 떠 있는 문구를 응시하다가, 나도 모르게 몇 걸음 걸어가 글자를 잡으려 손을 휘저어보았다.
꼬부랑 꼬부랑 고풍스런 느낌을 자아내는 글자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만져지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금세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가만 있어보자. 누구의 방이라고?
순간 등골이 싸해지는 감각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옷장 옆의 전신거울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건 예상대로 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낯이 익었다.
단정하게 핀으로 고정시킨 올림머리는 갈색기가 전혀 돌지 않는 새카만 흑발, 거울을 보느라 마주쳐버린 눈은 푸른색.
누군지 유추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까 게임 아이콘 속에서 보았던 ‘베로니카 캠벨’이 실사화 된다면 꼭 저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자꾸만 벌어지려는 입을 손으로 막으며 탄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내가… <블루 달리아>의 베로니카 캠벨이 된 건가?
여긴 게임 속 세상이고?
“미친…….”
나도 모르게 험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물론 들려오는 목소리도 내 것이 아니었다.
말도 안 돼. 진짜 말도 안 돼.
일단은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아야 한다. 이건 꿈일 거라는 지극히 합리적인 의심.
나는 손을 다시 들어 내 뺨을 찰싹 때려보았다.
일단은 현실로 인정해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생생함이었다.
하필이면 이제 막 시작해서 뒷 내용도 알지 못하는 추리게임에 들어오다니 무슨 이런 낭패가 다 있단 말인가…….
마음 같아선 벽에 머리를 박으며 얼른 나를 여기서 내보내라고 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 심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허공에 새로운 문구가 새겨졌다.
[ 튜토리얼 1. 탐색]
: 주변을 탐색하여 단서를 모아라.
그래. 내가 아무리 거부해도 여긴 추리게임 속이다 이거지.
수시로 허공에 떠오르는 저게 시스템창인 모양인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것만 제외하면 모든 게 현실 같았다.
설정 버튼 없음. 일시정지 버튼 없음. 게임종료 버튼도, 당연히 없음.
나는 잠시 막막한 기분으로 멍하니 섰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어찌 되었건 주인공 몸에 들어왔으니, 게임이 시키는 대로 주인공의 의무를 다해보는 게 좋겠다. 정해진 시나리오를 착실히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무언가 있겠지.
나는 다시 한번 이 게임의 줄거리를 되새겨 보았다. <블루 달리아>는 베로니카 캠벨이 백부인 캠벨 남작 일가 사망 사건의 비밀을 파헤치는 게임이다.
하지만 여긴 베로니카의 방이라고 했으니 당면한 목표가 탈출은 아닐 터.
그리고 스토리를 가진 게임의 튜토리얼은 보통 플레이어가 아직 잘 모르지만 게임에서는 기본이 되는 배경정보를 설명해주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정보를 주기에 가장 적합한 소품이 무엇일지 고민하며 이리저리 시선을 굴렸다.
정답으로 추정되는 물건을 발견한 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침대 옆의 탁자 위에 곱게 접힌 신문이 놓여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신문을 집어 들었다
[ ‘어제 자 신문’을 획득했다. ]
제대로 고른 모양이었다.
나는 신문의 1면을 펼쳐 제일 먼저 날짜부터 확인했다.
1899년 11월 6일.
면의 기사는 며칠 전 캠벨 남작가에 일어난 ‘비극적 사건’의 후일담을 다루고 있었다.
1899년 10월 28일, 조지 캠벨 남작이 부인과 아들 부부를 살해한 후 자살했다는 대목을 읽는 순간 또다시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 키워드 ‘캠벨 남작가의 비극’ 획득.
획득한 키워드는 ‘수첩’ 아이콘을 눌러 확인 가능. ]
시야의 우측 상단에 수첩 모양 아이콘이 생겨났다.
나는 아이콘을 슬쩍 곁눈질로 확인한 다음 다시 기사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사건을 담당한 왕립수사국의 브레너 수석수사관은 유서가 발견되지 않아 남작의 범행동기를 유추하기 어렵다고 밝혔으며 어쩌고저쩌고.
주르륵 이어진 기사는 재력가였던 남작의 유산과 작위가 하나 남은 혈육인 조카 베로니카 캠벨 양에게 상속된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었다.
[ 키워드 ‘남작의 유산’ 획득. ]
보는 김에 다른 기사들도 더 살펴보았지만 키워드 획득 문구는 더 이상 뜨지 않았다.
신문을 내려놓은 나는 시야 한구석의 수첩 아이콘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 안에 낡은 수첩이 툭 하고 떨어져 펼쳐졌다.
[ 1. 캠벨 남작가의 비극 ]
수도 제일의 재력가 중 하나인 조지 캠벨 남작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일가족을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
[ 2. 남작의 유산 ]
조지 캠벨의 작위와 유산은 캠벨 가의 유일한 생존자인 베로니카 캠벨에게 상속되었다.
기사에서 읽은 내용이 보다 간결한 문장으로 수첩에 정리되어 있었다.
좋아. 이런 기능도 있단 말이지, 하며 수첩을 덮자 손 안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나는 다시 방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번에 눈에 들어온 것은, 신문과 마찬가지로 추리게임에 단골로 등장하는 단서 중 하나인 벽걸이 달력이었다.
생각해보자. 이건 게임이고, 베로니카는 주인공인 만큼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선 안 된다.
그러니 튜토리얼에서는 베로니카가 외출할 만한 어떤 이유 같은 걸 제시해주지 않을까?
나는 달력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늘 날짜인 11월 6일에 쳐져 있는 동그라미가 눈에 들어왔다.
동그라미 옆에 작은 글씨로 ‘14:00 홉스 변호사 사무소’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달력 맞은편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12시 반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 위로 새 시스템 문구가 떠올랐다.
[ 약속 시간에 늦지 않도록 외출 준비를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