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 전갈자리의 남자
※본 외전은 ‘만약 대학 시절 독경과 주인이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감상에 참고 바랍니다.
주인과 독경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공항으로 죽 뻗은 도로를 막힘없이 달렸다.
그리고 무사히 출국 수속을 마친 후, 비행기에 올랐다.
긴 비행에 지칠 때쯤, 그들은 마침내 리스본에 도착했다.
그러나 쉴 틈은 없었다. 남부 지방으로 향하는 버스에 다시 몸을 실어야 했기 때문이다.
덜컹거리는 낡은 버스를 타고 네다섯 시간을 더 달린 끝에야, 두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조용하고 한가로운 어촌과, 서퍼들로 복작이는 관광지가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었다.
주인은 동양인이라고는 자신들뿐인, 그 낯선 동네 구석진 곳에 있는 숙소로 독경을 안내했다.
인터넷으로 미리 살펴보고 예약했음에도, 숙소는 기대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그녀는 몹시 의기소침해졌다.
낡은 침대와 해진 소파,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개수대, 이가 나간 물 잔과 접시들이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마음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탓이다.
방 한쪽에서 조용히 짐을 풀던 그가 무거운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슬쩍 곁으로 다가왔다.
“미안해, 여기 좀 엉망이지?”
주인이 힘없이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독경이 그녀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답했다.
“아니요, 이 정도면 괜찮은데. 난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마음 쓰지 마요.”
“그래도....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거잖아....”
그 말에 그가 그녀의 몸을 빙글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윤이 흐르는 두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낮게 읊조렸다.
“난, 선배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요.”
그러고 나서 독경은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약속해 줘요. 영원히 내 옆에 있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않겠다고....”
그가 상자를 열어 작은 반지를 꺼내더니, 맞잡은 손가락에 살포시 끼웠다. 반지는 처음부터 그녀의 소유인 양 딱 들어맞았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주인이,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애틋하게 속삭였다.
“아, 이독경....”
독경이 그녀의 손에 남성용 반지를 꼭 쥐여 주었다.
“나도 끼워 줘요.”
그녀가 어쩐지 긴장감에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그의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예쁘기도 해라.”
반지로 하나 된 두 손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독경이 고른 치열이 다 드러날 만큼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굽혀 주인의 손등에 진하게 입을 맞추다, 이내 제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철썩 갖다 댔다.
“음, 이독경....”
갑작스럽게 달려든 입술에 놀란 주인이 그의 어깨를 밀었지만, 독경은 도리어 그녀의 등허리를 거침없이 훑다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흣!”
주인의 입에서 하릴없이 신음이 터졌다.
그러자 독경이 그녀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확 벗겨 버렸다. 졸지에 헐벗은 가녀린 상체가 부르르 떨렸다.
“잠깐만! 우리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 번도 못 씻었잖아!”
그녀가 뺨을 붉히며 소심하게 반항했다.
“음, 난 괜찮은데....”
그가 점점 서늘해지는 피부를 손으로 뭉근히 쓸며 다시 키스를 이어 갔다. 거칠고 투박한 손끝이 어느새 등 뒤에서 꾸물거리며 브래지어를 풀고 있었다.
“아니, 난 안 괜찮아! 우리 일단 먼저 씻자.”
“그럼, 같이 씻을까요?”
그사이 독경이 기어이 끈을 풀었다. 출렁이며 쏟아지는 살덩이를 빤히 보던 그가, 입맛을 다시며 엄지손가락으로 유두를 슬쩍 문질렀다.
주인이 제 몸을 가지고 손장난에 여념이 없는 굵은 손목을 확 낚아채더니, 다급하게 끌어당겼다.
“그, 그래! 같이 씻자, 같이!”
삐걱대는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간 욕실은 예상보다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애초에 기대감 자체가 낮았는지도.
“잠깐만 기다려요. 물 온도 맞출게요.”
독경이 제 웃통을 훌쩍 벗어젖히며, 칙칙한 색의 샤워 커튼을 열고는 욕조로 다가갔다.
잠시간 수도꼭지를 이리저리 돌리며 온도를 맞추던 그가, 문가에 서 있는 주인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녀가 두 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리며 쭈뼛쭈뼛 다가오자, 그가 피식 웃었다.
“옷 벗어야죠. 내가 벗겨 줄까요?”
“아, 아니!!”
주인이 황급히 돌아서며 바지 단추를 천천히 끌렀다. 그라면 분명, 씻기도 전에 옷을 벗기면서 여기저기 만지고 들 것이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독경이 그녀의 잘록한 등허리와 풍만한 둔부를 음란한 눈길로 감상하며, 지퍼를 쑥 내렸다.
“다 됐어?”
주인이 조심스럽게 뒤를 돌다 순간, 주춤거렸다.
그는 느른한 표정으로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었는데, 알몸의 중심부가 허공을 향해 빳빳이 들려 있어 시선을 잡아끌었다.
절로 밑을 향하는 눈을 억지로 올리며, 주인이 경고했다.
“다 씻기 전까진 안 돼!”
“누가 뭐래요? 빨리 와요. 입술 파래졌어요.”
독경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수온은 쌓인 피로를 풀어 줄 만큼 적당히 따뜻했다.
그녀가 쏟아지는 물줄기를 흠뻑 맞으며 땀과 먼지와 여독을 씻어 내는 사이, 샤워 타월에 비누 거품을 풍성하게 묻힌 그가 말했다.
“씻겨 줄게요. 이리 와요.”
언제나 느끼지만, 두툼한 손은 생김새와 달리 무척이나 세심하게 움직였다.
주인은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비누칠하는 손길에 눈을 감으며, 그것이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감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독경이 거품을 잔뜩 묻힌 젖가슴과 엉덩이를 양손으로 집요하게 주무른 탓이다.
“그만해!”
주인이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후, 엄청 기분 좋았는데....”
독경이 부끄러움도 없이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러고는 샤워 타월을 스리슬쩍 건넸다.
“이번엔 선배가 해 줘요.”
촉촉하게 젖은 까무잡잡한 피부는 누가 봐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뇌쇄적이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다부진 삼각근과 판판한 대흉근을 신중하게 문지르며 내려갔다.
자신의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뜨거운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잠시 뒤 주인의 손길이 여러 갈래로 쩍쩍 갈라진 복근을 지나쳐 등 쪽으로 넘어가려는데, 습기를 머금은 중저음이 귓가에 닿았다.
“아래 먼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독경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더니, 길게 뻗은 제 성기를 움켜쥐게 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고는 앞뒤로 움직이며 느리게 중얼거렸다.
“하, 비행기 탈 때부터 계속 하고 싶었는데.... 공연음란죄로 잡힐까 봐 참느라 죽는 줄 알았네....”
그는 음탕하기 짝이 없는 속마음을 거침없이 입 밖으로 지껄이며 손을 더욱 빠르게 놀렸다.
그녀의 보드라운 손바닥과 거품이 묻은 굵은 기둥이 마찰을 일으키며, 점점 더 흥분감이 치밀었다.
“하아, 선배....”
독경이 주인의 입안으로 다급히 혀를 비집어 넣으며, 허리까지 앞뒤로 흔들어 댔다. 그러고는 잠시 뒤, 뜨겁고 끈적한 액을 상대의 윗배에 한 움큼 싸질렀다.
“후우....”
그가 맞붙었던 입술을 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주인이 상기된 뺨과 반쯤 풀린 눈을 올려다보며 안도했다. 급한 불은 껐으니, 잠깐은 괜찮겠지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독경이 한번 시작한 이상, 끝을 볼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가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며 야릇하게 웃었던 것이다.
“이번엔 선배 차례?”
얄궂기 짝이 없는 미소를 주인이, 외면했다.
“머, 먼저 마저 씻어야지!”
그 반응에 쩝, 하고 입맛을 다신 독경이 비누칠을 끝내고는 샤워기를 틀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거품을 씻어 냈다.
그녀의 긴 속눈썹 아래로 알알이 떨어지는 물방울을 홀린 듯 바라보던 그가 눈앞의 나신을 위아래로 훑었다.
우유 빛깔처럼 뽀얗고 투명한 피부에 반질반질한 물기가 좔좔 흘렀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독경이 입을 크게 벌려 먹음직한 유방을 덥석 물었다.
“앗!!”
주인이 그의 어깨를 꽉 붙잡으며 탄성을 질렀다.
그는 손으로 주위 살점을 마구 주무르며 입술로 젖을 빨고 문댔다. 그러다 단단히 힘을 준 혀끝으로 젖꼭지를 살살 굴리기 시작했다.
“흐응....읍....”
그녀는 혹시나 소리가 샐까 봐 염려하며 신음을 목 뒤로 삼켰다.
그렇게 정신없이 양쪽 가슴을 번갈아 애무하던 독경이, 아예 욕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아랫배에 입을 쪽쪽 맞추며 볼을 비볐다.
그러고는 주인의 한쪽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는 가랑이를 활짝 벌렸다.
“읏.”
그녀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음부에 코를 박으려는 그의 턱을 재빨리 붙들었다. 펄펄 끓는 본능만이 남은 검은자위가 위를 향했다.
“왜....”
“치, 침대로 가자고.... 여긴 소리도 너무 크게 울리고....”
“난, 그래서 더 흥분되는데?”
지성이라고는 한 줌도 찾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독경이 한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쥔 채, 다른 손으로 재빨리 음부를 슥 쓸었다. 그러자 손끝에 말간 점액이 묻어 나왔다.
“하, 선배도 흥분했잖아요?”
아닌 척했지만, 사실 주인 또한 그의 성기를 손에 쥔 순간부터 이미 달아 있었다. 다만, 민망함에 어찌 표현해야 좋을지를 몰랐을 뿐.
그녀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그가 사타구니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러고는 최대한 길게 뺀 넓적한 혀로 촉촉한 음부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죽 훑었다.
“아흐....”
주인이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얼굴을 떼어 내려 몸부림을 쳤지만, 독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더욱 세게 처박았다.
그의 혀끝이 그녀의 도드라진 음핵을 둥글게 굴리다, 이내 위아래로 빠르게 핥기 시작했다.
“아응.... 으읏....”
사포처럼 꺼칠한 혓바닥에 비벼지는 자극에 주인의 붉은 입술이 점점 벌어지며 침이 고였다.
독경이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입가를 떼어 후끈한 숨결을 아랫배에 토하고는 농염하게 속삭였다.
“내가, 가게 해 줄게요.”
그러고는 두툼한 엄지로 음핵을 빠르게 문질렀다.
“읏, 흐흣.... 아흐흥....”
주인이 쉴 새 없이 신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세차게 털었다. 그러자 몸에 남아 있던 물기가 영롱한 빛을 내며 사방으로 튀었다.
그가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불뚝 솟을 만큼 격렬하게 음핵을 짓누르며 비벼 댔다.
주인은 감당할 수 없는 쾌락이 몰려올 것을 예감하며, 그의 손을 제 손으로 간절히 붙들어 막았다.
그러나 자신이 선물한 반지를 끼고 있는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을 보자, 독경은 외려 격정에 휩싸였다.
그가 더욱 집요하게 돌기를 자극하며, 그녀의 탄탄한 아랫배에 새빨간 자국을 냈다.
“아, 선배.... 그 반지, 죽을 때까지 절대로 빼면 안 돼요.... 아니. 죽을 때도 꼭 끼워 놓을 거예요, 내가....”
“하으....으응.... 아앗!!”
그 말에 주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마침내 쾌락의 정점에 이른 사지가 감전을 일으킨 것처럼 경련했기 때문이다.
그가 남은 쾌감으로 잘게 떨리는 그녀의 하반신을 양팔로 꽉 끌어안았다.
삐걱, 삐걱....
숙소의 낡은 침대는 조금만 움직여도 부서져 내릴 것처럼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아니, 애초에 꼭 침대 탓만은 아닌지도 몰랐다. 독경처럼 몸집이 큰 남성이 격렬하게 요동치면, 어떤 침대도 버겁다고 느끼지 않을지.
서로의 끈적한 체액을 온몸에 묻힌 주인과 독경은 결국, 다시 몸을 씻어야 했다.
그 뒤 물기를 대강 털고 나온 그녀를 그가 번쩍 안아 들더니 침대 위에 풀썩 내려놓았다.
검푸른 잉크를 푼 것처럼 불투명한 공기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날카로운 눈을 보며, 주인은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낯선 땅에 도착한 순간부터, 독경은 노골적으로 끝 모를 욕망과 소유욕을 거리낌 없이 표출하는 중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녀의 가녀린 몸 위에 커다란 상체를 딱 붙이고는 지그시 압박하며, 상대의 반지 낀 손을 애무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은 채 쭉쭉 빨아 대다, 사이사이 파인 부위를 혀끝으로 쓸어내리는 모습이 꽤 그악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그동안에도 독경은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시선을 주인이 외면해 보았지만, 그마저도 불허했다.
“나 봐요.”
그가 마디가 굵은 제 왼손 약지를 그녀의 입술 틈으로 밀어 넣으며 명령했다.
잇새를 억지로 벌리고 들어온 단단한 손가락이 입안의 말랑한 살점을 슥 훑었다. 그러고는 혀뿌리를 꾹꾹 누르다, 이내 앞뒤로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질척거리는 마찰음이 두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후.”
독경이 그녀의 입천장을 손끝으로 살살 긁으며 한숨을 뱉었다.
오기가 생긴 주인이 흥분으로 점점 비틀리는 그의 입꼬리를 주시하며, 더욱 유연하게 혀를 놀렸다.
이쯤 되니 서로의 반지 낀 손가락을 애무하는 것이 마치 사랑을 확인하는 의식처럼 보일 정도였다.
퐁.
이윽고 그가 충분히 젖은 손가락을 둥글게 만 입술에서 빼냈다.
반지 낀 손가락이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것을 흡족하게 보던 독경이 중지와 약지를 겹쳐 주인의 음부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으응....”
그가 질벽 안으로 천천히 파고드는 굵은 손가락을 가만히 지켜보다, 이내 악동처럼 천진하면서도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러니까, 진짜 내 것 같다.”
그러고는 상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사이 그녀는 양 볼을 붉힌 채 눈을 감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독경의 손가락이 내벽을 쑤시고 휘저을 때마다, 주인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제 어깨를 꽉 붙든 그녀의 손톱이 점점 살 안으로 깊숙이 박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독경은 그녀의 이마를 거쳐 뺨과 목덜미, 그리고 윗가슴까지 내려가며 쪽쪽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은 가혹하게 움직여 댔다.
“아으응....”
잠시 뒤, 그녀가 교태 섞인 신음을 냈다.
그것이 어떤 신호라 여긴 그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가늘고 긴 상대의 양쪽 허벅지를 잡아 가랑이를 쫙 벌리게 했다.
“앗!”
주인은 자신의 내밀한 부위가 허공에 활짝 드러나자, 어떻게든 다리를 오므리려 시도했으나 이미 한발 늦었다.
독경이 딴딴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를 손으로 가볍게 쓸며 입구에 가져다 댄 것이다.
주인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기분 탓인지 상대의 그것이 오늘따라 색이나 핏줄이 짙어 보이며, 더욱 흉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인이 긴장한 채로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낯선 공간이 주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본격적으로 사나운 소유욕을 내비치는 독경에게 하릴없이 위축됐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선단에서 맑은 액이 주룩 흐르는 성기를 그녀 안으로 욱여넣을 뿐이었다. 터질 것처럼 조이는 압박감에 이가 저절로 악 맞물렸다.
“아니, 좀 전에 풀었는데.... 으, 선배. 힘, 힘 빼요....”
독경이 짓씹듯 중얼거리며 그녀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나 단전 아래로 굵직한 무언가가 무자비하게 침입하는 것을 느낀 주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아으, 아파.... 조금만 천천히....”
“후,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몸에 힘 좀 풀어요. 이러다 나 터지겠어요!”
그의 간청에 그녀가 멈췄던 호흡을 간신히 내뱉었다.
그사이 독경이 주인의 허리를 살짝 들어 올려, 오목한 등허리에 베개를 받쳤다. 그러자 입구가 위로 향하며, 들어가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한결 편하게 길이 열리자, 그가 제 허리를 아래로 꾸욱 누르며 뿌리 끝까지 박아 넣었다.
“하....”
“읏....”
두 사람이 동시에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독경이 주인의 잘록한 허리를 양손으로 꽉 쥔 채, 제 것을 꾹 넣었다 살살 빼며 내벽을 자극했다.
그렇게 몇 번을 느릿하게 들락날락하다, 이내 조금씩 속도를 높였다.
살과 살이 맞부딪히며 철퍽거리는 마찰음과 서로의 체액이 쩍쩍 달라붙는 젖은 소음이 좁은 공간을 점차 달아오르게 했다.
“아, 좋아요.... 좋아요, 선배....”
흥분감에 들뜬 중저음의 음성이 주인의 고막에 닿았다. 그녀가 구릿빛의 선명한 복직근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화답했다.
“흣! 나, 나도....”
그 말에 독경이 그녀의 상체를 끌어안으며 눈을 맞췄다. 야릇하게 풀린 두 사람의 얼굴이 코앞에서 맞닿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입을 벌린 채 혀를 내밀어 서로를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그가 제 하체를 더욱 강하게 퍽퍽 내리찍었다.
맞댄 입술 틈으로 신음이 줄줄 샜다.
“아아.... 아흣.... 읏, 이독경....”
“아, 선배.... 선배.... 윽!!”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연신 그녀를 부르던 그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졌다. 뜨거운 정액이 울컥 쏟아지며 밑을 흠뻑 적셨다.
그동안에도 독경은 몇 번이나 허리를 짓이기며, 남김없이 토해 낼 것처럼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주인이 핏발이 오른 채 부릅뜬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그가 다시 입을 맞추며, 진득하게 혀를 섞었다. 그러고는 부르튼 입술을 떼며 나른하게 말했다.
“그렇게 보고 있으면 또 흥분되는데....”
그 말에 흠칫 놀란 주인이 하체 쪽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내렸다.
그러자 애액과 정액으로 뒤섞인 채 번들거리는 독경의 성기가 다시 꺼덕거리며 위로 들리는 광경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
그녀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애꿎은 입만 뻐끔거렸다. 그 반응이 우스웠는지 그가 몸통이 울릴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뭘 그렇게 놀라요? 새삼스럽게.”
“넌, 정말....”
주인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독경은 꿈쩍도 하지 않고는, 오히려 그녀의 몸을 한 손으로 휙 뒤집었다. 그러고는 탄탄한 둔부 사이에 제 성기를 끼웠다.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촉감을 그곳으로 온전히 느끼며, 그가 뻔뻔하게 재잘거렸다.
“날 발정 난 개로 길들인 건 선배잖아요. 그러니, 책임져야죠.”
“난, 그런 적 없....”
기가 막힌 그녀가 따지려 입을 열었지만, 뒷말을 이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등 뒤에 밀착한 그가 곧장 제 것을 삽입하더니, 격렬하게 허리를 털기 시작한 것이었다.
“읏, 으읏....”
주인이 항복을 선언하는 것처럼 두 팔을 머리 위로 들며,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길고 하얀 손가락 열 개가 침대 모서리를 우악스럽게 꽉 붙잡았다.
“후우, 선배....”
독경이 그녀의 어깨뼈에 제 입술을 마구 비비며 헐떡거렸다. 넓고 두툼한 손바닥이 출렁이는 유방을 야만적으로 쥐고 흔들었다.
“읏!”
그렇게 한참을 흘레붙던 독경이 사정감에 못 이겨 몸을 부르르 떨다, 이내 주인의 등 위로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내리 사흘을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맹렬하게 몸을 뒤섞었다.
마치 그동안 억눌렀던 모든 욕구를 한꺼번에 터뜨리는 것처럼, 그는 그녀를 송두리째 제 손아귀에 움켜쥐고는 거침없이 다뤘다.
***
“이독경, 그거 알아?”
“뭐요?”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은 채 주인을 품에 넣고는, 그녀의 약지를 만지작거리던 독경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우리, 여기 온 뒤로 한 번도 밖에 안 나갔어....”
“그런가요? 난 여기 있는 게 더 좋은데....”
그가 그녀의 허리를 제 아랫배 안쪽으로 깊숙이 당기며, 연약한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도 바다는 봐야지. 난, 보고 싶단 말이야.”
“그건 앞으로 질리도록 볼 텐데요, 뭐. 그것보단 이쪽이 훨씬 더 절경인데....”
독경이 안 그래도 음험한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반지 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주인의 나신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는 사흘 내내 그녀가 천 한 조각 걸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게다가 침대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게끔 했다.
필요한 것은 독경이 다 가져다줬고, 씻을 때조차도 그의 어깨에 둘러메진 채 이동했다. 그리고 비좁은 욕실에서 다시 진득하게 몸을 섞기를 반복했다.
“오늘은 나가고 싶어.... 나가자, 응?”
주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독경이 하는 수 없이 끙 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 남은 욕구를 해소하려면 멀었지만, 하루쯤은 머리를 식히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거기다 요 며칠 동안 먹는 것도 부실했으니, 푸짐하게 식사를 하는 것도 괜찮은 생각 같았다.
독경은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가지고 있던 옷 중 가장 화사한 민트색 셔츠를 차려입었다. 그 옷은 여권 사진을 찍을 때 입기 위해 주인이 선물한 것이었다.
그사이 새하얀 원피스를 우아하게 소화한 그녀가 그의 옷깃을 정돈해 주고는, 다정하게 팔짱을 끼었다.
독경이 그런 주인을 애정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며, 문을 열었다. 그린 듯 아름다운 한 쌍의 젊은 남녀는 기대감에 부푼 발걸음을 내디뎠다.
낡은 숙소를 만회해야겠다고 결심했는지, 그녀는 꽤 오랜 검색 끝에 마을에서 제법 괜찮은 해산물 레스토랑을 찾아냈다.
수평선을 따라 죽 뻗은 모래사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창가 석에 앉은 두 사람은, 이 지방 전통식을 주문했다.
예상보다 입에 잘 맞았는지 아니면 며칠 동안 부실했던 식사 때문인지, 주인과 독경은 모든 요리를 남김없이 싹싹 긁어 먹었다. 그러고는 술도 한잔 가볍게 걸쳤다.
그녀가 살짝 취기 오른 눈으로 멀거니 풍경을 감상하다, 순간 흠칫 놀랐다.
해변 근처에 선글라스를 낀 채 서 있던 각진 얼굴의 남자가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주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 이 순간, 어디에선가 자신을 쫓고 있을 난폭한 사냥개가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주인이 다시 한번 두 눈을 크게 깜박인 뒤, 남자를 주시했다. 그러자 상대는 짙은 갈색 머리를 지닌 평범한 관광객의 얼굴로 돌아왔다.
“하아....”
주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바로 독경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아요?”
“아, 아냐. 아무것도.”
주인은 선뜩하게 조여 오는 초조함을 억지로 모른 척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겨울이라지만 온화한 기후 덕분에, 이곳의 바닷바람은 선선한 편이었다.
짭짤한 소금기를 머금은 공기가 밤바다만큼이나 새카만 이방인들의 머리카락을 적당히 헝클어뜨렸다.
먹물처럼 검은 파도가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은 주인과 독경의 발치에서 넘실거렸다.
온종일 파도를 즐긴 서퍼들은 어느새 하나둘 짐을 챙겨 떠나기 시작하고, 그 빈자리를 어둠이 슬며시 메워 나갔다.
잠시 일몰 후의 요적한 풍경을 가만히 감상하던 주인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맑고 곱지만 어딘가 쓸쓸한 목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독경의 귓가를 애태웠다.
“난 여기가 세상 끝인 줄 알고 왔는데, 어떤 사람들은 시작이래.... 참, 이상하지?”
두 사람의 눈앞에서 일렁이는 바다는 지중해의 끝이라 불렸지만, 동시에 대서양의 시작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오래전, 야망에 부푼 모험가들은 이곳에서 신대륙의 꿈을 안고 드넓은 바다로 거침없이 출항했다.
끝과 시작, 절망과 희망, 고요와 소란이 뒤섞인 기이한 공간에 발을 들인 것 같은 까마득함이 그들을 에워쌌다.
독경이 바닷바람에 추울세라 주인의 아담한 몸을 감싸 안고는 나직하게 귀엣말을 전했다.
“끝이든 시작이든 나한테는 아무 상관 없어요. 그냥 이렇게 선배랑 단둘이 있을 수만 있다면....”
그다운 대답에 그녀가 부스스 웃었다.
“이독경, 행복....해....”
주인이 물었다. 독경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단호하게 답했다.
“네. 선배는요?”
“나도....”
가슴 한쪽을 따끔하게 갉아 먹으며 커져 가는 막막함과 불안감을 애써 갈무리하며, 주인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독경이 송곳니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천진하게 웃으며, 상대를 안은 팔뚝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후끈한 열기가 한기로 잘게 떨리는 그녀의 마음에 한 줄기 위안을 주었다.
***
그렇게 이 주가 흘렀다. 두 사람은 낮에는 마을과 바닷가를 산책하며 여유롭고 낭만적인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밤이 오면, 그들은 펄펄 끓어오르는 본능에 몸을 맡겼다. 낡고 비좁은 침대 위에서 팔다리가 나무 넝쿨처럼 뒤엉킨 채 헐떡였던 것이다.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영원히 계속되기를 간절하게 기도할 만큼.
그러던 어느 새벽녘, 주인은 여전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깊은 잠에서 깰 정도로 무척이나 목이 말랐다.
혀로 건조한 입술을 축이며 마른침을 한 번 삼킨 후,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새벽이라고는 하나 커튼을 친 실내는 여전히 한밤처럼 어두웠다.
약간이나마 어둠이 눈에 익기 시작하자, 주인은 침대 밖으로 발 하나를 뻗으며 일어서려 했다.
그때, 어느새 잠에서 깬 독경이 작고 하얀 귓가에 은밀히 속삭이며 어깨를 붙잡아 제지했다.
“선배, 가만있어요.”
어딘가 잔뜩 날이 선 서늘한 목소리에 그녀가 주춤거리는 사이, 그가 발가벗은 채 훤히 드러난 알몸에 이불을 둘러 주었다.
그러고는 보호라도 하는 것처럼 허리를 끌어안으며 제 쪽으로 당기더니, 캄캄한 허공에 대고 위협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너, 뭐야?”
으르렁거리듯 불길하게 진동하는 음성에, 주인이 흠칫 놀랐다. 그녀가 숨을 죽인 채 어둠을 응시했다.
그러자, 조금 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검은 형체가 눈에 띄었다. 성인 남성의 너른 등으로 짐작되는 인영이 두 사람을 향해 서서히 돌아섰다.
“주인 양, 소꿉놀이는 이쯤하고 집으로 가시죠?”
주인이 비명이 터지려는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황급히 틀어막았다. 황량하게 느껴질 만큼 무감하고 탁한 음성을 그녀는 진저리 날 정도로 잘 알았다.
제 부친의 사냥개, 김강석이었다.
강석은 체격이 건장한 수행원들을 몇 명 더 끌고 머나먼 이곳까지 왔다. 그들은 주인과 독경이 반항할 상황을 대비해 데려온 인원들이었다.
그러나 주인은 의외로 순순히 그의 지시를 따랐다. 오직, 그녀의 동행인만이 못마땅한 눈길로 쏘아보며 온몸으로 거부 의사를 표현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설득에 독경도 결국 마지못해 항복하는 태도를 취했다. 아니,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강석이 그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음험하기 짝이 없는 혈기 왕성한 청년의 새까만 눈에 주목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제 고용주에게 빈손으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독경 또한 예상외로 삼엄한 감시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떻게든 무력으로 그녀를 데리고 도망쳐 볼까도 싶었지만,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주인의 태도가 몹시도 완강한 탓에 협조를 얻을 수도 없었다.
이대로 두면 그녀 홀로 돌아갈 것이 뻔했기에, 그는 쓰디쓴 분을 억지로 삼키며 인내했다.
사실, 주인은 진작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이 도피가 길지 못하리라는 것을. 머지않아 끝이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을. 그 어디에 숨는다 한들 태성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리고 때마침, 검은 양복을 입은 불길한 기운의 남자가 눈앞에 등장했다. 그러자 실낱같이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의지가 툭 하고 끊어졌다.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은,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었는지도 몰랐다.
주인은 무기력한 체념과 자책에 휩싸인 채,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그런 그녀 곁을 사나운 표정을 한 독경이 호위하듯 바짝 뒤따랐다.
강석조차 말을 걸기 힘들 만큼 흉흉한 기세였다.
***
“이 모자란 년이 아주 집안을 망신 주려고 작정했구나.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저런 잡종 같은 놈이랑 야반도주를 해!!”
본가에 끌려와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앉은 주인과 독경을 향해, 현태성 회장은 바락바락 고함을 질러 댔다.
비열한 잿빛 눈동자가 성질을 이기지 못해 희게 뒤집혔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목덜미에 핏대가 툭 솟았다.
주인은 한참이나 이어진 부친의 원색적인 힐난에도, 묵묵히 바닥만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한 발 떨어져 앉은 독경이 그녀의 담담한 뒷모습을 지그시 치켜뜬 두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회장님, 이제 그만하세요. 이쯤이면 주인이도 다 알아들었을 거예요.”
모친인 박은아가 현 회장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말렸다.
그러자 멀찍이서 팔짱을 낀 채 이 광경을 눈요기 삼던 이복 오빠 현상현이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지껄였다.
“알아듣긴 뭘 알아들어. 지금까지 대답 한마디 안 했는데.... 저년이랑 저 새끼 눈깔이 어디 반성하는 사람 눈깔인가? 한 대 칠 눈깔이지.”
말을 마친 그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껏 비웃었다.
아들의 말에 현 회장이 하얗게 센 눈썹을 불만스럽게 꿈틀거리며, 반항심을 팍팍 풍기는 젊은 남녀를 번갈아 보았다.
“현주인 너, 한 번만 더 이딴 짓 하면 내 손에 죽는다. 알겠냐? 대답해라!”
“.....”
그러나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부친이 고집스럽게 수그린 채 한 번도 들지 않은 딸의 정수리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뒷짐을 진 채 우뚝 서서 상황을 관망하던 강석이 속으로 혀를 찼다.
못 이긴 척 대답만 잘하면 수습할 수 있는 사태인데, 그녀는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마음에도 없는 빈말 따위는 할 줄 모른다는 양, 주인은 꼿꼿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곧은 성정을 주변에서 가만둘 리 만무했다. 특히 그녀처럼, 사방에 적의가 깔려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리고 한번 꺾인 마음은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상처만 입을 뿐이었다.
“너.... 너 지금, 나한테 시위하는 거냐? 손이고 발이고 싹싹 빌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뭘 잘했다고 대답을 안 해?”
현 회장이 콧김을 씩씩 뿜으며, 신경질적으로 내지르던 손가락을 바들바들 떨었다.
“네년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들게 해 주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허공으로 팔을 번쩍 쳐들더니, 주인의 뺨을 무자비하게 후려쳤다.
짝!!
공기를 찢는 것 같은 새된 마찰음이 너른 저택 안에 울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고개가 한쪽으로 푹 꺾이며 온몸이 휘청거렸다.
그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본 독경의 눈이 순식간에 까뒤집혔다.
그렇지 않아도 차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느라,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베어 물던 참이었다.
주인과 자신이 저 하찮은 버러지들 따위에게, 왜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어울리지 않게 얌전했던 것은 제 행동으로 인해 그녀가 곤란해질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던 억울함과 노여움이 순식간에 폭발하고야 말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독경이 눈 깜짝할 새 현 회장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힘껏 움켜쥐었던 것이다.
“컥!!”
“죽어.”
상대의 입에서 막힌 신음이 터지자, 그가 냉담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툼하고 단단한 손끝에 힘을 주며 고목처럼 메마른 살점을 파고들었다.
독경의 커다란 등에서 난폭한 살기가 줄줄 흘렀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거실에 있던 모든 이가 경악한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저, 저 새끼 뭐야!!”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상현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다급히 외쳤다. 그러자 강석이 옆에 서 있던 직원들에게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저 새끼 떼어 내고, 회장님 보호해라!”
그 말에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서넛이 우르르 달려들어 현 회장을 우악스럽게 붙든 손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썼다.
독경은 그들을 성가신 하루살이쯤으로 취급하며, 손아귀에 더욱 힘을 가했다.
현 회장이 숨 막히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발을 어지럽게 허우적댔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손 안 떼!! 빨리 떼란 말이야!!”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욕지거리를 뱉으며 다시 덤볐다.
하지만 독경은 그들에게 목이 졸리고 머리를 뜯겨도 여전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입가에 허연 침을 흘리는 현 회장을 오시할 뿐이었다.
“이 새끼가....”
보다 못한 강석이 꿈쩍도 않는 독경을 처리하려 나섰다.
그는 단단한 주먹으로 아직 어린놈의 옆구리를 힘껏 쳤다. 권투 선수 출신인 제 주먹을 맞고도 멀쩡한 사람을 그는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시커먼 애새끼는 어찌 된 영문인지, 눈살만 팍 찌푸릴 뿐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허!”
강석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주인이 외쳤다.
“이독경, 그만!!”
앙칼진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고막에 닿자, 미동 없던 몸이 서서히 돌아섰다. 그때, 빈틈을 노리던 수행원 중 한 명이 독경의 뒷덜미를 퍽 하고 가격했다.
그의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기회를 포착한 장정들이 잽싸게 달려들어, 굵직한 팔다리를 하나씩 붙잡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곤란하게 만든 청년에게 억하심정을 느꼈는지, 몹시도 가혹하게 커다란 몸을 찍어 누르듯 쓰러뜨렸다.
바닥에 뭉개진 독경의 얼굴이 더욱 험악한 기색을 띠었다.
그사이 무자비한 손아귀에서 힘겹게 빠져나온 현 회장이 아들과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뒤, 짙은 주름으로 가득 찬 표독한 얼굴이 더듬더듬 명령을 내렸다.
“저....저, 미친 개새끼....죽여 버려.... 쥐도 새도 모르게.... 물고기 밥으로 던지든, 닭 모이로 갈아 버리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처리해!!”
“아, 아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보복에 주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가 부친의 바짓가랑이를 억세게 부여잡으며, 초조하게 소리쳤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시키는 대로 뭐든 다 할게요. 그러니까 저랑 이독경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주인의 반질거리는 까만 눈동자에 공포와 경악이 어렸다. 어떤 모멸로도 무너지지 않던 철옹성을 함락한 것은 다름 아닌, 두려움이었다.
현 회장이 잿빛 눈을 교활하게 번뜩인 채, 눈물을 주르륵 쏟으며 애원하는 딸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뀌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진짜, 뭐든 할래?”
여유를 되찾은 현 회장이 언뜻,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주인이 말라붙은 입술을 바르르 떨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
독경이 비열한 악마와 거래를 하려는 가련한 영혼을 말리기 위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위에서 짓누르던 사내 중 하나가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늙은 여우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럼, 유학 가서 삼진건설 최 회장 둘째 아들이랑 약혼해라. 너도 전부터 외국 나가고 싶어 했잖니.”
집에서 벗어나려는 방편으로 주인은 유학을 꾀했었다.
그러나 부친의 반대에 무산되면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국내 대학으로 진로를 틀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곳에서, 독경을 만났다.
눈치 빠른 주인이 현 회장의 머릿속을 가볍게 헤집었다.
삼진건설은 최근 수도권 인근에 대규모 실버타운을 조성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헬스케어 분야가 주력인 태성으로서는 먹음직스러운 사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현재 미국에서 유학 중인 최 회장의 아들에게 제 딸을 볼모로 넘기며, 사업권을 따낼 야망에 부푼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 모든 속내를 간파했다 한들, 주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제 부친이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독경에게 위해를 가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러니까, 이독경 한 번만 봐주세요.”
“흡!!”
그 말에 독경이 막힌 잇새로 거센 숨소리를 내며 온몸에 힘을 바짝 주었다.
그러자 그를 제압하고 있던 장정들이 끝 모를 괴력에 당황하며, 짐승처럼 성난 근육을 꿈틀거리는 상대를 더욱 꽉 눌렀다.
독경의 핏발 선 눈이 현 회장에게 고정됐다. 흉흉한 살기로 가득한 눈빛에 현 회장은 저도 모르게 홧홧한 목을 매만졌다.
저 난폭한 기운에 압도되기 전에 수습부터 해야 했다.
“좋다, 넌 당장 짐 먼저 싸라. 그리고 김 실장은 저 자식 좀,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 버리고.”
그 말에 주인이 사지를 파르르 떨며, 강석과 독경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선글라스 안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이독경 잘못되면 나도 죽을 거예요. 그러니까 약속, 꼭 지켜요.”
눈길은 강석을 향했지만, 실제로는 현 회장에게 하는 말임을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이가 알았다. 모를 수 없었다.
강석은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그녀에게 고개를 한 번 까닥하고는, 곧이어 수하들에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독경의 양팔을 붙잡아 일으키더니, 현관 쪽으로 움직였다.
“선배, 선배!! 이건 아냐, 이건 아니라고요!!”
당혹과 원망이 한데 뒤섞인 목소리가 심장을 후벼 팠지만, 주인은 애써 외면했다. 발버둥 치는 그를 장정들이 끙끙대며 끌고 가는 기척이 등 뒤에 선연했다.
독경의 혼탁한 까만 눈에 버림받은 이의 황망함이 깃들었다.
끝끝내 제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매정한 뒷모습만 하염없이 응시하며, 족쇄처럼 팔다리를 붙드는 자들에게 벗어나려 기를 썼다.
그러나 그는 결국 양손을 뒤로 결박당한 채, 입에는 재갈이 물리고, 눈은 안대로 가려진 뒤 차에 실렸다.
그리고 한참을 이동한 끝에, 어느 허름한 창고에 갇혔다. 주인이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 묶어 둘 심산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독경은 어느 깊은 밤, 맨발로 기어이 탈출해 주인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그의 분투가 무색하게, 그녀는 이미 쫓기듯 머나먼 타국으로 떠난 뒤였다.
***
독경은 주인이 사라진 현실을 부정하며, 육중한 철문 앞에서 며칠을 꿋꿋이 버텼다.
그러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늦은 오후 무렵, 짙은 선글라스를 낀 남자와 다시 조우했다.
흠뻑 젖은 몸으로 미동 없이 서 있는 사내를 보며, 강석은 혀를 쯧 찼다.
“네가 찾는 사람은 여기 없다. 버려진 개새끼처럼 이러지 말고 네 갈 길 가라.”
“.....”
냉정하기 짝이 없는 설득에도 독경은 아무런 대꾸 없이 묵묵히 저택만 올려다보았다.
“회장님 눈에 한 번만 더 띄면, 그땐 진짜 죽는 거야. 출장에서 돌아오시기 전에 빨리 꺼져라.”
“.....”
벽과 대화해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라 생각하며, 강석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비에 젖은 담배에 간신히 불을 붙인 그가 뿌연 연기를 길게 뱉으며 읊조렸다.
“미련한 새끼. 네 목숨 하나 살리려고 현주인은 제 인생을 다 걸었어. 철없는 애새끼처럼 굴지 말고 정신 차려.”
이번에는 독경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상대의 동요를 간파한 강석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네가 이럴수록 곤란해지는 사람은 주인 양이다. 진심으로 상대를 위한다면, 벼랑 끝에 내몰지는 말아야지.”
온갖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탁한 눈동자가 서서히 강석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잡아먹을 기세로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독경의 눈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독경이 난데없이 커다란 몸을 돌려 바짝 앞으로 다가갔다. 강석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가 손을 뻗어 선글라스를 확 벗겼다. 강석의 당황한 한쪽 눈과 독경의 침착한 두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독경이 보란 듯 선글라스를 움켜쥐더니, 어마어마한 악력으로 박살 내 버렸다. 그러고는 조각난 잔해들을 바닥에 우수수 떨구고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내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하?”
강석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탄식을 내는 사이, 건방진 사내새끼는 어스름하게 깔린 안개 속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주인과 함께할 때는 빛이 그의 친구였지만, 그 빛이 사라진 지금은 어둠이 그의 동반자였다.
강석이 무저갱 같은 암흑으로 물들어 가는 다부진 등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캘리포니아의 이모 댁에 머물며 진학을 준비하던 주인은 친구인 김윤희에게 독경이 자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학교만큼은 무사히 끝마치기를 바랐으나, 그는 그런 것 따위에는 미련 없었는지 단칼에 잘라 버렸다.
주인은 씁쓸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금 울었다. 이제 더 이상 그와의 연결점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몹시도 막막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어느 하늘 아래 숨 쉬고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살아 있다면, 살아 있어 주기만 한다면 애달프게 그리운 이 마음쯤은 참아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회색 셔츠에 잿빛 정장을 느슨하게 걸친 사내는 이 층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아래를 응시했다.
그곳은 현란한 조명이 화려하게 돌아가며, 시끄러운 음악이 쿵쿵 울리는 무대였다. 하지만 그의 관심이 미친 곳은 정확히 말하자면, 가장자리에 있는 아치형 좌석이었다.
그 자리에는 고급 정장을 입은 채 차 한 대 값이 훌쩍 넘는 명품 시계를 찬 남성들이, 무대 위 여자들을 음흉하게 훑고 있었다.
“저 새끼들은 룸에 안 있고, 왜 저기 있는 거야?”
사내가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부동자세로 옆에 있던 해사한 얼굴의 청년이 쭈뼛거리며 답했다.
“아, 그게.... 오늘은 룸에 있기 답답하다고....”
“등신들. 놀던 대로 놀지, 꼴값하네.”
진한 이목구비의 남자가 경멸 어린 조소를 서슴없이 내뱉었다. 갈색 머리 청년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아, 그리고 현상현 부회장님께서 오늘은 사장님 얼굴 꼭 보고 싶다고 인사 오라고 하셨어요.”
“됐어, 네가 대신 가.”
“또요?”
“정 그럼, 이번에 새로 들어온 샴페인 있지? 그거 가져가서 대충 입막음해.”
“흠, 네....”
짧은 대화를 마친 두 남자의 눈길이 다시 그들에게 향했다.
그 순간, 호화로운 클럽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단정한 차림의 여자가 무대를 가로질러 남성들 무리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초지일관 심드렁하던 사내의 가로로 긴 눈이 급격하게 커졌다.
조명 밖 어둠 속에서 흥미를 가득 품은 안광이 번뜩였다. 그가 들킬세라 몸을 잔뜩 웅크리며 눈앞의 상황에 주목했다.
그동안 단발머리를 찰랑이던 여자는 거침없이 인파를 뚫고 지나가더니, 일행 중 가장 거만하게 앉아 있던 남자의 면상에 손에 든 서류 뭉치를 던지며 일갈했다.
“오빠, 미쳤어??”
그때, 어둠 속에 은폐한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사내의 얼굴에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말아 올린 입술 틈으로 잘 벼린 송곳니가 살짝, 드러났다.
그가 몹시도 음험한 중저음으로 만족스럽다는 양 혼잣말을 했다.
“재밌네.”
***
또각또각.
여자의 도전적인 구두 굽 소리가 기다란 클럽 복도에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장소에 걸맞지 않게 몹시도 간결한 정장 차림을, 지나는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보았으나 정작 당사자는 아랑곳없이 꼿꼿하기만 했다.
그녀의 관심은 온통 방만한 자세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이복 오빠에게 가 있었던 탓이다.
잠시 뒤, 그 앞에 우뚝 선 여자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망설임 없이 뿌렸다.
“오빠, 미쳤어? 이 업체 문제 많다고 내가 재계약하지 말랬잖아!!”
그녀의 깐깐한 음성이 요란스러운 음악을 단박에 꿰뚫었다.
“주, 주인아!! 여긴 어떻게??”
그때, 안경을 쓴 비쩍 마른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곤란한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주인이 그런 그를 마주 보며 호통을 쳤다.
“박중우 팀장님, 똑바로 일 안 하실 거예요?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아, 그게....”
중우가 코끝에 걸린 안경을 손으로 추켜올리며, 힘없이 말끝을 흐렸다.
상현이 들고 있던 잔을 탁 내려놓으며, 한쪽 입가를 짜증스럽게 비틀었다.
“부회장 자리가 하청 업체 재계약까지 일일이 관여할 정도로 한가해 보여? 잘못 짚었으니까, 술맛 떨어지기 전에 빨리 꺼져.”
주인이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끼었다.
“하청 업체랑 짜고 단가 높여서 그 차익으로 뒷주머니 차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오빠야말로 잘못 짚었어. 언제까지 회장님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현이 어금니를 으득 씹으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금방이라도 던질 것처럼 술잔을 꽉 쥐었다.
“너 같은 게 감히 날 협박해? 건방지게....”
그때, 중우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부회장님 진정하시죠. 현 팀장도 마찬가지고. 여기서 싸워 봤자 구설에나 오르고, 회사 이미지만 나빠집니다. 자세한 얘기는 내일 회사에서 하시죠.”
“얘기는 무슨.... 당장 계약 해지할 거니까 그리 아세요.”
“저, 쌍년이....!”
단호한 어조로 통보한 뒤 쌀쌀맞게 돌아서는 주인을 향해, 상현이 욕설을 뱉었다. 사사건건 자신을 방해하는 그녀에게 앙금이 쌓인 지는 이미 오래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주인은 정신 사나운 이곳을 벗어나려 부지런히 걸을 뿐이었다. 상현이 벌인 일을 뒤쫓으며 수습하는 것도 이제는 지겨웠다.
주인이 출구로 이어지는 통로를 절반쯤 지날 때였다. 누군가가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다급하게 붙잡으며 지껄였다.
“자기야, 혼자 왔으면 같이 놀래? 오늘 본 애 중에서 제일 예쁜데....”
그녀가 인상을 쓰며 뒤를 돌자, 독한 술 냄새가 확 끼쳤다. 눈앞에 반쯤 풀린 동공으로 자신을 음흉하게 훑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손 좀 놓으시죠?”
주인이 앙칼지게 눈을 치켜떴다.
“아, 그러지 말고 나랑 놀자. 재밌게 해 줄게.”
남자가 흐느적거리며 제 몸을 치대려 다가섰다. 그녀가 한발 물러서며, 경멸 섞인 말투로 쏘아붙였다.
“취했으면 집에나 곱게 가. 애먼 사람 괴롭히지 말고.”
그 말에 젊은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뭐야, 씨발. 재수 없게. 얼굴만 반반하면 다야? 좀 맞아 봐야 정신을....”
말을 하다 만 그가 갑자기 팔을 휙 쳐들더니, 그녀의 뺨을 향해 내리꽂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까무잡잡한 커다란 손이 남자의 뒷머리를 우악스럽게 휘어잡더니 뒤로 내팽개쳤다. 취객은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얼떨떨한 표정으로 널브러진 남자를 멀거니 보던 주인의 귓가에 느른한 음성이 닿았다.
“유선하, 업장 관리 똑바로 안 해? 저런 새끼들은 진작 내보냈어야지.”
“네, 넵!!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녀가 큰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고개를 들어 느닷없이 나타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정장 바지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삐딱하게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는, 어딘가 무척 낯이 익었다.
주인이 멍한 표정으로 눈을 다시 끔뻑거렸다. 긴 속눈썹이 나풀거리며 내려앉았다, 다시 위로 들렸다.
눈앞의 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며 슬며시 입술을 뗐다.
“손님이 많이 놀라신 모양이다. 유선하, 이분 내 사무실로 모셔라.”
주인은 험악한 직업과는 어울리지 않게 해맑은 청년을 따라 클럽 안쪽에 있는 사무실에 들어섰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에 멀뚱히 앉아 있는데, 그가 얼음물을 가져다주며 말을 건넸다.
“많이 놀라셨죠? 여기서 잠시만 쉬었다 가세요.”
주인은 콱 막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대신해,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를 표했다.
청년이 빙긋 웃으며 사뿐히 방을 나갔다. 괴괴한 적막이 감도는 방 안에 그녀만 덩그러니 남았다.
주인은 유리잔 표면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들을 보며,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그러나 이미 멈춘 사고 회로를 다시 켜기가 쉽지 않았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달칵 문이 열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귀를 덮은 머리카락 사이로 느긋한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맞은편에 털썩 앉는 남자의 하반신이 보였다.
얼굴을 들어 상대와 눈을 맞춰야 하는데, 무겁게 짓눌린 것처럼 들 수가 없었다.
그때 시야에, 무릎 위에 얹은 손이 잡혔다. 자신이 알던 큼직하고 까무잡잡한 손이었다.
하지만 손등 위는 처음 보는 흉터들로 가득했다.
주인의 가슴이 다시 쿵, 떨어졌다. 그녀가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폐 안 깊숙이 독한 타르 향이 훅 끼쳐 들었다. 이 또한 생소한 감각이었다.
주인과 만나는 동안, 독경은 담배를 끊었었기에.
자잘한 상처, 진한 담배 향, 이 순간 느끼는 감각들이 그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알려 주는 것 같아, 주인은 씁쓸해졌다.
한순간 굳은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말했다.
“진짜로 많이 놀랐나 보네.”
동굴 안에 있는 것처럼 나직이 울리는 음성이었다. 일순, 주인은 안도감이 들었다. 목소리는 여전했다.
“이런 건 현주인답지 않은데....”
하지만 그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불리자, 주인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얼굴을 번쩍 들었다.
껄렁한 기운을 온몸으로 물씬 내뿜는 남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이네, 주인 선배. 아니, 이젠 선배라고 부를 필요 없나?”
그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했다.
주인이 상대의 변화를 절감하며, 형편없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독경.... 너 왜, 왜....여기 있어?”
그러자 독경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질문을 정정했다.
“아니,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이지. 내 영업장에 찾아온 건 현주인 너니까.”
“아....”
주인이 슬며시 입을 벌린 채 맹한 얼굴로 탄식했다.
그가 미간을 팍 구기며 입을 꾹 다물더니, 애꿎은 목울대를 꿀렁거렸다. 육 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제게만은 스스럼없이 빈틈을 내보였다.
우습게도 주인이 육 년의 간극을 체험하는 동안, 독경은 그 반대를 경험했던 것이다.
긴 속눈썹과 반질반질한 까만 눈, 가녀린 목선, 그리고 자신에게만 무장 해제되는 단단한 마음의 방어막.
기가 막힐 정도로 여전한 모습에, 독경은 내면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아니면 원망과 적의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의 복잡한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주인은 새까만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난, 여기가 네 영업장인지 몰랐어. 그냥 볼일이 있어서....”
“그래, 봤어. 현상현 만나는 거.”
“어, 맞아....”
주인이 멋쩍게 뒷덜미를 주물렀다. 어쩐지 제 오빠와 다투는 광경을 들킨 것이 창피했다. 하지만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피하는 그녀에게서, 독경은 눈을 떼지 않았다.
잠시 뒤, 그가 소파 팔걸이를 마디가 굵은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 좋아. 우리가 오늘 만난 게 의도치 않은 일인 건 알겠어. 그럼, 여기서 질문! 그렇다면 네 이복 오빠가 내 업장 VIP인 건 우연일까, 아닐까?”
독경이 약을 올리는 것처럼 빙글빙글 웃으며 산뜻하게 물었다. 언제나 의뭉스러운 목적을 감춘 채 주변을 맴돌던 그를, 주인이 잊을 리 만무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딱딱해졌다. 뜻밖의 해후에 혼미하던 이성이 그제야 제자리를 찾았다.
“일부러 그랬어? 왜?”
주인의 추궁에 독경이 딴청을 피우듯, 허공을 보며 떠들었다.
“돈도 많은 새끼들이 비싼 술 몇 번 접대했다고, 단골집을 홀랑 바꾸더라고. 그렇게 친한 몇 놈 포섭했더니, 현상현도 금방 이쪽으로 옮겼어.”
“그러니까 왜? 왜, 그런 일을 했냐고?”
그녀가 눈을 예리하게 빛내며 상대를 꿰뚫어 보았다. 그가 자신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시선을 은근슬쩍 모른 체하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여기 있다 보면 별의별 소문을 다 듣는데....”
어딘가 뜬금없이 시작되는 말을 주인이 막았다.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만 말해.”
“하하, 성격은 여전하네. 다 연결되니까 잘 들어 봐.”
독경이 여유 넘치게 너털웃음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어느 날인가, 꽤 흥미로운 얘기가 들리더라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집안 따님이 선 자리에 나왔는데, 글쎄 왼손 약지에 떡하니 반지를 끼고 있었다는 거야.”
그 말에 주인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그녀가 벌떡 일어서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데, 동시에 일어난 그가 가냘픈 어깨를 꽉 붙잡아 눌렀다.
“내 얘기, 아직 안 끝났는데?”
무지막지한 힘을 이기지 못한 주인이 자리에 도로 주저앉았다.
독경이 그런 그녀 옆으로 다가와 바짝 붙어 앉더니, 손가락으로 작고 하얀 귓바퀴를 살살 긁으며 시선을 고정했다.
“근데 그 따님이 하는 말이 더 가관인 거야. 자기는 집안 몰래 약혼한 사람이 있으니, 알아서 거절해 달라나? 선보러 나온 남자 새끼들은 당연히 황당했지. 근데, 진짜 웃긴 게 뭔지 알아?”
독경이 이번에는 손끝으로 선이 고운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물었다. 주인이 대답 대신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 정신 나간 여자가 기막히게 예쁘다는 소문이 돌아서, 발정 난 새끼들이 얼굴 한번 구경하려고 줄을 섰다는 거야. 이쯤이면 선 자리가 끊길 법도 한데, 계속되는 게 이상하지 않았어? 응? 주인아.”
그가 몹시도 얄궂은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다, 블라우스의 벌어진 칼라 사이로 손가락을 쑥 넣었다.
그러고는 손끝에 걸린 목걸이를 죽 잡아당겼다. 옷 밖으로 딸려 나온 목걸이 줄에는 펜던트 대신 모양이 단순한 반지가 걸려 있었다.
“버릴 거면 확실히 버렸어야지. 이러니까 내가 널 못 잊고, 현상현 따위한테 접근한 거잖아.”
독경이 그녀의 귀에 자신의 입술을 맞붙인 채, 뜨거운 숨결로 소곤거렸다. 주인이 아찔한 표정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단단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더니, 옴짝달싹 못 하게 가뒀다. 그러고는 목선을 따라 쪽쪽거리며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 이독경! 그만!!”
주인이 너른 어깨를 붙잡으며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독경은 거의 무아지경 상태에서 미친 듯이 목덜미를 지분거리며 애무할 뿐이었다.
그녀가 그의 어깨를 세게 내려쳤다.
“그, 그만해!!”
그제야 그가 여린 살결에 맞붙였던 입술을 떼며 그녀를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코앞에서 얽혔다.
그때, 주인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양손을 목 뒤로 가져가더니 목걸이를 풀었다. 그러고는 펜던트 대신 끼웠던 반지를 빼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독경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그녀와 반지를 번갈아 보았다.
“오해, 하게 해서 미안해. 그냥 선보기 싫어서 댄 핑계였는데, 네가 알게 될 줄은 몰랐어. 이왕 이렇게 된 거 반지도 돌려줄게. 이것도 진작 줬어야 했는데....”
“하?”
기어들 듯 맥없이 내뱉는 변명에, 그는 황당한 나머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자못 심각했다.
“앞으로 이 근처엔 안 올 거야. 그럼, 오늘처럼 만날 일도 없겠지. 잘 살아.”
주인이 벌떡 일어서서는 문 앞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아니, 걸어가려 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 전까지는.
그 모습을 본 독경이 소파에서 슥 일어섰다. 그러고는 몸을 둥글게 만 그녀를 지나치더니,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심술궂게 웃었다.
“잘 가, 현주인.”
어딘가 상쾌하기까지 한 인사에 주인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건들건들 서 있는 그의 옆을 스쳤다.
그 순간, 독경이 스산한 음성으로 귓속말을 건넸다.
“또 보자.”
주인은 그 말을 애써 흘려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휘청거리는 가녀린 뒷모습을 눈으로 바짝 쫓으며 입맛을 쩝 다셨다. 그러고는 손에 든 반지를 주머니에 넣은 뒤 휴대 전화를 꺼냈다.
“지금 나가는 여자 손님께 직원 한 놈 대리 기사로 붙여라. 도착하면 나한테 보고하라고 전하고.”
***
주말 오후, 주인은 은은한 클래식이 배경음으로 깔린 고풍스러운 호텔 카페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오랜만이다, 주인아.”
맞은편에 앉은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가 환히 웃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게요. 그동안 잘 지냈죠? 한국엔 언제 왔어요?”
그녀도 퍽 편안한 태도로 그를 맞았다.
“얼마 안 됐어. 실은 엊그제. 가족들 빼고 약속 잡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보고 싶었거든.”
남자가 눈매를 우아하게 휘며 솔직한 마음을 툭 터놓았다. 주인이 대번에 표정을 굳히며 그를 안타깝게 불렀다.
“지승 오빠....”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삼진건설 회장의 둘째 아들 최지승이었다.
주인이 미국으로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 회장의 뜻대로 두 사람은 순탄히 약혼식을 올렸다.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러나 길고 지독했던 어느 밤, 독경을 잊지 못한 채 끙끙 앓던 주인은 그에게 파혼을 선언했다.
이미 그녀를 깊이 연모하던 지승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의외로 순순히 수락했다. 언젠가 제게도 마음의 문이 열리기를 바라 마지않으면서.
파혼했지만, 두 사람은 유학 내내 남매처럼 허물없이 지냈다. 주인이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태성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이후 가끔 소식만 주고받다, 모처럼 만난 자리가 바로 오늘이었다.
“나 조만간 한국 지사로 옮길 거야. 그럼 이제, 전처럼 자주 볼 수 있겠지?”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컨설팅사에서 잘나가던 지승은 기어이 한국 지사에 자원했다. 이유는 뻔했다.
주인이 어색하게 입가를 올리며 답했다.
“최 회장님께서 좋아하시겠네요. 오빠랑 바둑 두는 게 유일한 낙이셨잖아요.”
서로의 가족사까지 공유하는 그녀를, 그가 물끄러미 보다 나직이 운을 뗐다.
“너, 아직도 현 회장님 성화에 못 이겨 선보러 다니니? 이제 그런 거 그만하고 나랑 다시 약혼하자. 너만 괜찮다면 난....”
“오빠, 그 말은 안 하기로 했잖아요.”
주인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찻잔을 험하게 내려놓았다.
“오빠가 좋은 사람이라는 거, 내가 제일 잘 알아요. 그래서 고맙고 미안해요. 하지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긴 싫어요. 마음에도 없는 약혼이니, 결혼이니.... 억지로 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니까....”
파르르 떨리는 가늘고 긴 손가락을 바라보며, 지승이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오빠가 미안하다. 한국 온다는 생각에 들떠서 실수했어.”
그가 단정했던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막 카페 안으로 발을 들이는 남자와 눈이 맞았다.
남자는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건장한 체격이었는데, 까무잡잡한 피부와 날렵하게 긴 눈매가 꽤 야성적이고 불량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눈이 마주친 지승을 보며 송곳니가 설핏 드러날 만큼 씩 웃더니, 곧장 성큼성큼 다가왔다.
지승은 낯선 사내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상대가 누구인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끙 하며 앓는 소리를 내는데, 남자가 자잘한 상처로 가득한 손을 불쑥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최지승 씨.”
“이, 이독경!!”
하지만 지승에게 그보다 더 기이한 것은 주인의 반응이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불청객을 향해 날을 바짝 세우는 모습이 생경했던 것이다.
지승이 조심스레 경계하며 물었다.
“누구십니까?”
그러자 사내는 아주 오랫동안 이 질문을 기다린 것처럼, 단숨에 답했다.
“당신보다 현주인이랑 먼저 약혼한 사람.”
“이독경!!”
더 이상 참지 못한 주인이 벌떡 일어서더니, 다급히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다른 데서 얘기해!”
그러자 독경이 자신을 붙잡은 그녀의 손을 느긋하게 감싸 쥐더니, 어울리지 않게 감미로운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방 예약했어.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데, ‘적당히’ 얘기하고 올라와. 기다릴게.”
뭉근한 눈빛을 보내던 독경이 그녀의 손에 객실 카드키를 쥐였다. 주인이 제 손바닥 위에 놓인 납작한 물건을 허탈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그는 그녀의 머리를 다정히 쓸어 주고는 지승을 보며 픽 웃더니, 그대로 휘적휘적 떠났다.
“주인아, 괜찮아?”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지승이 걱정 어린 눈길로 훑었다. 주인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오빠.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아냐, 괜찮아. 그보다 저 사람.... 예전에 그....맞지?”
지승은 자신과 만나기 전 그녀의 사정을 대강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주인 또한 이미 끝난 일이라며 확실하게 못 박았기에 잊은 채 살았다.
그러나 덜 길들여진 들개 같은 존재를 맞닥뜨리는 순간, 그 일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로 이어지고 있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저 남자, 다시 만나는 거야?”
지승이 불만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지 않으려 했으나, 질투가 솟구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우연히....”
주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끝을 흐렸다.
“그럼, 만나지 마. 아니면 나랑 함께 가든가. 저 사람 너무 위험해 보여.”
걱정과 분노가 뒤섞인 경고를 들으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혼자 할 수 있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먼저 일어나서 미안해요.”
주인은 지승을 보지도 않은 채 성의 없는 인사를 건네고는, 독경이 사라진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그 순간, 지승은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그녀의 환영을 보았다.
주인이 호텔 맨 위층의 스위트룸에 들어서자, 통창 너머 풍경을 응시하던 독경이 슬쩍 뒤를 돌았다.
“여기 전망 좋네. 이따 야경도 볼만하겠어, 그렇지?”
“너랑 밤까지 있을 생각 없어. 여긴 어떻게 알고 왔는지나 말해.”
장난스러운 그의 말에, 그녀가 멀찍이 서서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날 너 데려다준 대리 기사, 내 밑에서 일하는 애거든.”
“하!”
그녀가 황당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나름 배려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감시할 사람을 붙이려는 수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태 미행했다?”
“그날 너, 그 상태로 운전했으면 백 프로 사고 났을걸?”
아니, 걱정 반 수작 반인가? 주인이 잠시 입을 벌린 채 그를 보다, 슬그머니 다물며 물었다.
“그래서 여긴 왜 왔는데?”
“또 보자고 했잖아. 돌려줄 것도 있고....”
독경이 바지 안에 넣은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주머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수 없었다.
“이제 필요 없어. 가지든가, 버리든가.”
무관심을 가장한 말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난 너한테 벌주려는 거 아냐. 상 주려는 거지. 약속 지킨 게 기특해서 말이야.”
“약속? 무슨 약속?”
주인이 뾰족하게 되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지 안 빼겠다는 약속....”
독경이 두 눈을 내리깔며 그녀의 왼손을 잡더니, 약지를 뭉툭한 손끝으로 살살 매만졌다.
주인이 그 손을 짜증스럽게 쳐 냈다.
“말했잖아. 선보기 싫어서 핑계 댄....”
그때, 독경이 말을 툭 잘랐다.
“현주인. 너 언제까지 그 집에서 숨도 못 쉬고 살래? 이제 아버지 말 한마디에 벌벌 떠는 애새끼들 아니잖아, 우리.”
자신의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독설에,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한계에 도달했음을, 스스로도 느끼던 참이었다.
“그래서 나랑 뭘 하려고?”
감았던 눈을 찬찬히 뜨며 주인이 물었다.
“글쎄, 일단은 이런 거부터?”
독경이 그녀의 손에 반지를 도로 끼웠다. 원래는 딱 들어맞았던 반지가 헛돌 만큼 헐렁했다.
그가 제 혀를 지그시 씹으며 낮게 읊조렸다.
“이럴 거면 나 왜 버렸어? 이렇게 말라비틀어질 거면 왜....”
서슴없이 터뜨리는 원망에, 그녀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주룩 쏟아졌다. 입가에서 자조가 비죽 흘렀다.
“그러게.... 왜 그랬을까? 그냥, 그때 그 바다에 같이 빠져 죽을걸. 그러면 적어도 함께할 순 있었을 텐데. 바보처럼 용기도 없이.... 어떻게든 살겠다고 비루하게 구걸하고....껍데기만 남아서는....”
어느새 주인이 온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하얗게 질린 채 비틀거리는 그녀를 독경이 다부지게 감싸며 소리쳤다.
“현주인, 정신 차려!! 숨 쉬어, 숨!!”
힘겹게 가슴을 헐떡이는 그녀의 뺨을 그가 다급히 두들겼다. 사나운 얼굴이 통증을 함께 느끼는 것처럼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주인의 시야가 일순 흐려지더니 전기가 나간 것처럼 팍, 꺼졌다. 독경이 바닥으로 푹 꺼지는 마른 몸을 갈급하게 끌어안으며 욕설을 뱉었다.
“씨발!!”
주인이 눈을 떴을 때, 객실 안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불도 켜지 않아 캄캄한 공간 한쪽에 독경이 싸늘한 안광을 빛내며 앉아 있었다.
연신 제 뺨을 문지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던 그가, 반쯤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녀와 눈을 맞췄다.
“씨발....”
독경이 잔뜩 부아가 치민 목소리로 욕설을 뱉더니,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너, 이렇게 아무 데서나 픽픽 쓰러져?”
말투는 퉁명스러웠으나, 그 안에 담긴 불안과 걱정을 주인은 바로 읽었다.
“원래 안 그래. 오늘이 처음이야....”
그녀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때,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그가 막 일어난 어깨를 잡아 도로 눕혔다.
“가만있어. 안정 취하래.”
그 말에 주인이 제 어깨를 부여잡은 커다란 손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괜찮아. 이제 가야 해.”
“그냥 좀, 있으라고....”
독경이 꽉 다문 잇새로 짓씹으며, 축 늘어진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고는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머리를 세차게 비비며, 육 년간 빼곡히 쌓였던 울분을 토했다.
“나, 가차 없이 버린 사람 미워하고 싶은데, 왜 마음껏 미워하지도 못하게 만들어? 왜?? 버리고 떠났으면 잘 살기나 하지.... 이렇게 시든 꽃처럼 말라비틀어져서는....”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새카만 뒷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들었다가, 허공에 우뚝 멈췄다. 갈 곳 잃은 손이 공기 속을 떠돌았다.
“그냥 편하게 미워해도 돼. 그럴 이유, 충분하잖아?”
체념이 짙게 밴 말에 그가 성난 얼굴로 몸을 확 일으켰다. 가로로 긴 눈가에 설핏, 물기가 맺힌 것도 같았다.
“그러게. 이왕 이렇게 만난 거 실컷 분풀이나 할까 봐. 그때, 왜 나 그렇게 버렸어?”
콱.
독경이 뾰족한 송곳니로 그녀의 목을 세게 깨물었다. 물린 곳은 목이었으나, 살점이 뜯겨 나가는 통증은 심장에서 느껴졌다.
주인이 입술을 꾹 다물며 터지려는 신음을 애써 참았다. 그가 맞붙은 살갗 틈으로 뜨겁게 중얼거렸다.
“차라리 한 번 더 도망치자고, 그것도 아니면 같이 죽자고 했어야지. 왜 그렇게 쉽게 단념했어? 왜??”
콱.
다시 한번 단단하고 예리한 이가 여린 살점에 박혔다. 주인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제 몫의 고통을 감내했다. 그러나 흐르는 눈물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독경의 이마에 물방울이 닿았다. 그가 빠르게 상체를 곧추세우며 성마르게 외쳤다.
“씨발, 못 해 먹겠네. 나 같은 새끼 목숨 살리려고, 인생 다 저당 잡힌 사람한테 어떻게 화를 내. 그걸 다 아는데, 어떻게 미워하란 거야.”
어둠 속에서 굵직한 이목구비가 서서히 고통으로 물드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좁혀지는 미간과 파르르 경련하는 눈가와 굳게 깨문 입술에서 날카롭지만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원망은 했지만 증오한 적은 없어, 단 한 번도.”
독경이 결연하게 읊조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허망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 말대로, 그때 그 바다에 같이 빠져 죽을걸.... 하하....”
메마른 웃음이 한숨처럼 흩어졌다.
그 순간, 주인은 그의 눈에서 깊은 공허와 피로를 엿보았다. 산산이 깨져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위태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런 생각, 하지 마.”
그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는 손을 들어, 깎아지른 뺨을 어루만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흠칫 놀란 그가 이내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바닥에 제 볼을 마구 문댔다.
“그래. 안 할 거야, 이젠.... 또 실수하면 사람 새끼가 아니지....”
독경이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저갱처럼 아득한 눈에 한 가닥 광기가 야비하게 어렸다.
“넌, 이제 죽을 때까지 그 반지 못 빼. 내가 말했잖아. 죽는 순간까지도 끼워 놓을 거라고!”
어딘가 모질게 내뱉는 선언에 주인이 입을 열어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대답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양, 그는 제 입으로 상대의 입을 막아 버렸다.
“흡!!”
느닷없는 입맞춤에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입술을 꾹 닫았다.
독경이 굳게 닫힌 입을 제 것으로 거칠게 뭉개다, 곧장 굵은 손가락을 넣어 억지로 벌렸다. 주인이 고개를 휙 돌리며 피하려 했으나, 그의 행동이 더 빨랐다.
조개처럼 꽉 맞물린 입술을 오로지 손가락 힘으로만 벌린 그가, 그녀의 턱을 잡아 고정하더니 두툼한 혀를 사정없이 밀어 넣었다.
“읏, 하지 마.... 그러지 마....”
주인이 그의 어깨를 손끝으로 꽉 그러쥐며, 벌어진 잇새로 간청했다.
하지만 독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캉한 점막을 거침없이 휘저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혀를 단단히 얽은 다음, 이리저리 흔들어 댔다.
그 움직임을 따라, 그녀가 속절없이 휘둘렸다. 그의 입에서 진득한 신음이 샜다.
“후....”
잠시 뒤, 얼굴을 든 독경이 이번에는 고개를 아래로 비스듬히 꺾으며 잇자국으로 빨갛게 부은 목을 혀로 핥았다.
“음....”
따끔하면서도 간지러운 감각에 주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가볍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가 허리를 들더니, 그녀의 블라우스를 양손으로 잡고는 부욱 뜯어 버렸다. 뜯긴 단추가 사방으로 팡팡 튕겨 나갔다.
“뭐, 뭐 하는 거야?”
당황한 주인이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독경이 마른 몸 위에 올라타더니, 온 체중을 실어 눌렀다.
그러고는 브래지어를 위로 쑥 들어 올리며, 양옆으로 퍼지는 가슴을 손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사이 몹시도 고압적인 음성이 흘렀다.
“넌,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내 거였어. 주인은 개새끼를 버릴 수 있지만, 개새끼는 주인을 바꾸지 않거든. 길들였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말을 마친 독경이 자신의 잿빛 셔츠를 그녀에게 한 것처럼 손으로 팍 뜯었다. 과할 정도로 남성미가 넘치는 육체가 주인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예전보다 더 짙어진 피부색, 탄력 있는 근육들. 그리고 사이사이로 깊게 파인 굴곡이 역삼각형의 상체를 더욱 균형 있게 잡아 주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녀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몸 곳곳을 차지한 크고 작은 흉터들이었다.
손등에 난 상처들로 짐작은 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맞닥뜨린 그의 몸은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이, 이게 뭐야....”
주인이 침음을 삼키며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흉터를 하나씩 더듬어 나갔다.
“나 같은 놈이 길바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어?”
독경이 여상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막살라고 너 보내 준 거 아냐!”
그녀가 들끓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며 매섭게 외쳤다.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왜? 신경 쓰여? 내가 아팠을까 봐? 괴로웠을까 봐? 걱정 마. 다른 곳이 너무 쓰라려서 이런 건 느낄 겨를도 없었으니까.”
입가에 조소를 띤 채 떠들던 독경이 바지 지퍼를 내리고는 성기를 툭 꺼냈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주인의 가슴을 그러모으더니, 그 틈으로 제 것을 끼워 문질렀다.
“후우....”
그의 얼굴이 흥분으로 기묘하게 비틀려 갔다.
그녀가 주체할 수 없는 본능으로 조금씩 헐떡이는 그를 올려다보다, 왼 어깨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어깨와 삼각근을 다 덮을 만큼 큼직한 전갈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는데, 징그러울 정도로 세밀한 묘사가 불길한 난폭함을 한층 더했다.
마치 금방이라도 자신을 향해 예리한 독침을 겨눌 것 같은 위협감과 압박감이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 침에 쏘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제 가슴을 야만적으로 농락하는 그에게 연민 따위를 느낄 리 없었다.
주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독경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었다.
그 순간, 그녀가 가지런히 무릎을 꿇고 엎드리더니 그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하아, 씨발....”
독경이 격정적으로 욕설을 터뜨렸다.
주인이 아주 느릿하게 그의 것을 입안으로 빨아들였다. 욕심 같아서는 뿌리째 모조리 삼키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크기가 너무 컸다.
그래서 대신 그녀는 혀끝으로 기둥을 매끄럽게 쓸었다.
그의 등허리가 움찔거리며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금방이라도 피부를 뚫고 나올 것처럼 툭 불거지는 핏줄이 혀에 닿았다.
주인이 조금씩 속도를 올리며 성기를 빨았다. 타액으로 젖은 마찰음이 두 사람의 귓가에 색정적으로 맴돌았다.
“후.”
독경이 미간을 신경질적으로 구기며, 그녀의 뒷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탁 튕기며 작은 머리통을 짓눌렀다.
“흡!!”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딱딱한 살덩이에 그녀의 숨이 턱 막혔다. 입안을 다 채우고도 한참을 남는 크기가 너무도 버거웠다.
하지만 그는 상대의 사정 따위는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다급하게 허리를 털어 댔다.
“아, 씹.... 현주인.... 후, 주인아....”
독경이 미친 사람처럼 넋을 놓고는 주인의 이름을 몇 번이고 애타게 불렀다. 그러면서 제 것을 목젖 깊숙이 욱여넣었다.
“흐, 으읍!!”
그녀의 입에서 헛구역질이 터졌다. 하지만 그는 더욱 격렬하게 허리를 쳐 대며 턱 근육을 꽉 물었다. 반듯한 이마 위로 땀이 주룩 흘렀다.
“읏!!”
잇새로 짧은 탄성이 새며, 독경의 다부진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주인의 입안으로 뜨겁고 끈적한 액체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아주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처럼 사정은 길게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그는 몇 번이나 더 허리를 움직여, 잔여감이 남은 살덩이를 주인의 입안에 꾹꾹 눌러 넣었다.
잠시 뒤, 마지막 한 방울까지 기어이 쥐어짠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몸을 세웠다.
“뱉어.”
독경이 손바닥을 그녀의 입가에 댔다. 주인이 입안에 꽉 찬 정액을 쏟는 사이, 그가 다른 손으로 그녀의 젖은 눈가를 쓸었다.
그러고는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들뜬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앞으로 이건 하지 말자. 내가, 자제가 안 된다....”
독경이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뒤,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잠시 뒤, 수건에 물을 적셔 돌아온 그가 타액과 정액으로 뒤섞여 번들거리는 얼굴을 꼼꼼히 닦아 냈다.
주인이 눈을 감은 채 그의 손에 얌전히 얼굴을 맡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성을 잃은 채 날뛰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다정하고 세심한 손길이었다.
야릇한 분비물을 모조리 씻긴 그가 그녀를 품에 넣고는 털썩 누웠다. 그러고는 음험하기 짝이 없는 중저음으로 속삭였다.
“내가 너, 그 집에서 빼낼 거야. 이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편히 살아. 현태성 죽여 줄까? 사고사로 위장하면....”
“이독경, 그만....”
주인이 그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증오하는 인간이라도 그런 방법을 쓰는 것은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독경이 그녀의 만류에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냉혹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현상현은 어때? 그 새끼 때문에 요즘 너 골치 썩는 거 같던데, 맞지? 그래, 차라리 그 새끼 작업하고 네가 태성 잇는 게 낫겠다.”
그가 비열한 미소를 흘리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쪽 맞췄다. 살벌한 말과 달리, 행동은 퍽 상냥했다.
“글쎄, 안 된다니까. 사람이길 포기하면서까지 그러고 싶진 않아....”
흡사 도덕 책을 읊는 것 같은 반응에 독경은 픽 웃었다. 저렇게 모질지 못하니 미친놈처럼 덤벼드는 자신을 너그럽게 받아 준 것이리라.
“그럼, 제 무덤을 파는 건?”
“무슨 뜻이야?”
주인이 너른 가슴팍에 기댔던 머리를 들어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현상현, 약 못 끊었어.”
그렇지 않아도 큰 주인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더욱 동그래졌다. 그 모습이 스무 살 무렵의 그녀를 떠올리게 해, 독경은 시선을 내린 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짧은 침묵이 흐른 후, 그가 입매를 시원스레 죽 찢으며 덧붙였다.
“말했잖아. 너한테 상 주겠다고. 줄 게 한가득이야.”
그러나 그녀는 엉뚱한 말부터 꺼냈다.
“너, 혹시 약도 유통해?”
“날 뭐로 보는 거야? 그런 지저분한 일엔 손 안 대.”
어딘가 몹시도 힐난하는 것 같은 어조에, 독경이 양팔을 벌려 제 뒤통수에 대더니 나른하게 대꾸했다.
이 상황에도 자신을 걱정하는 주인의 속내를 눈치챘으나,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럼, 현상현이 약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녀의 추궁이 이어졌다.
“VIP 룸에 몰카 달았어.”
어제저녁에 먹은 음식을 설명하듯이, 그가 여상하게 지껄였다.
주인이 잠시 두 눈을 끔벅거리며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이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경악했다.
“그, 그래도 돼??”
“당연히 안 되지.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내 배때기에 칼 박히는 건 순식간일걸?”
독경이 히죽 웃었다.
“근데,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글쎄, 왤까?”
그가 여전히 토끼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원래 난, 업장에서 약하는 애들 다 내보냈어. 엮이면 골치 아프거든. 근데 현상현만은 그냥 뒀지. 그 새끼가 그 룸에서 온갖 미친 짓을 벌여도 모른 척하고 대충 수습해 줬거든. 왜 그랬을까, 내가....”
그 말에 주인은 대답 대신 입술만 지그시 물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의 본성이 윤리적이거나 상식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나 헤어진 지난 여섯 해 동안 독경의 성정은 더욱 뒤틀리고 비열하게 변해 있었다.
그 변화가 꼭 제 탓처럼 여겨져 주인은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옆에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삐뚤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후회가 들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상념에 잠긴 그녀를 보며, 독경이 혀를 쯧 찼다.
“걱정 마. 그 안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는, 너한테 말 안 할 거니까. 그런 추잡한 얘기를 듣기에는 너무 고고한 분이잖아.”
그는 불필요한 너저분한 얘기들로 그녀의 귀를 더럽힐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의외로 무심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상관없어. 그냥 불법적인 일이 너무 거리낌 없이 벌어져서 조금 놀란 것뿐이야.”
“흠....”
독경이 촘촘하고 보드라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배배 꼬았다.
“그래서 그 정보로 뭘 어떻게 할 건데?”
주인이 그에게로 얼굴을 좀 더 기울였다.
“거기 있다 보면 온갖 소문을 접하는데, 나랏밥 먹는 영감들도 이런 데서 얻는 첩보를 좋아하거든. 근데 최근에 그분들이 파는 게 뭔지 너도 알잖아. 안 그래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데, 그쪽에 흘리면 개떼같이 달려들걸?”
그가 짙은 눈썹을 호기롭게 들어 올리며 냉소했다.
“지금은 간만 보고 있지만, 지지율 떨어지면 방어용으로 터뜨릴 게 필요할 거야. 근데 생각해 보면 현상현만큼 훌륭한 희생양도 없다 이거지. 이미 사람들한테 비호감인 데다, 태성이 아무리 잘나간다 해도 건드리지 못할 만큼 부담스런 상대는 아니니까.”
“음....”
그녀가 하얀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고민에 빠졌다.
“근데,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그때, 독경이 손끝으로 그녀의 탱탱한 젖가슴을 꾹 눌렀다. 숨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촉감이 간질거려서 영 신경 쓰였다.
그제야 주인도 자신이 헐벗은 상체를 그의 가슴에 딱 붙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침대 구석에 널브러진 옷을 주워 들었다.
그러자 그가 찢긴 블라우스를 낚아채더니 먼발치로 휙 던져 버렸다.
“어차피, 저거 못 입어.”
“앗!”
그녀가 바닥에 툭 떨어진 제 옷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독경이 주인의 호리호리한 몸을 어깨에 둘러메고는 벌떡 일어섰다.
“내일 아침에 매장 문 열면 하나 사 줄게. 오늘은 이렇게 된 거 야경이나 보자고.”
이럴 심산으로 옷을 찢었나 싶어 그녀가 흘겨보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 하나를 대롱대롱 매단 채 통창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밖은 어느새 짙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독경이 그녀를 내려놓으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야경, 잘 구경하고 있어.”
“넌 안 볼 거야?”
주인이 등 뒤에 딱 달라붙은 그에게 슬쩍 얼굴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무릎을 털썩 꿇고 앉더니, 봉긋한 그녀의 엉덩이에 제 얼굴을 비비며 한껏 가라앉은 음성을 냈다.
“하, 넌 밖에 봐. 난 여기 볼 거야. 육 년 만에 만났는데, 안부 인사는 해야지.”
뻔뻔한 낯짝으로 주절대던, 독경이 치마를 확 걷어 올렸다.
“미쳤나 봐, 진짜.”
주인이 볼멘소리로 타박했으나, 이내 창에 이마를 붙인 채 신음했다. 뜨겁고 습한 숨결이 유리 표면에 작게 얼룩졌다.
그가 탄탄한 엉덩이를 힘껏 주무르다,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던 것이다. 새하얀 피부에 빨갛게 부푼 잇자국이 꽤 음란하게 보였다.
잠시 뒤, 길게 내민 혀끝이 엉덩이 골을 슥 훑었다.
조금 더 아래로 얼굴을 처박은 그가 음순 사이로 혀를 집어넣더니, 집요하게 음부를 빨아 댔다. 어찌나 게걸스럽게 애액을 빠는지 사타구니가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녀가 두 손을 유리창에 짚은 채 흐느꼈다.
“읏, 하아.... 이독경....”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쾌락에 주인은 죽었던 세포들이 다시 펄떡이며 살아나는 것 같은 생동감을 느꼈다.
그제야 긴 시간 막혔던 숨통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차디차게 식어 가던 온몸에 뜨거운 피가 팔팔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핏줄을 따라 야릇한 흥분감도 서서히 번져 나갔다.
“으응....”
주인이 정점을 향해 다가가는 쾌감에 온몸을 뒤틀었다.
그사이 독경이 굵은 팔뚝을 앞으로 감더니 손가락으로 음핵을 짓이기듯 문질렀다. 그의 혀끝이 질구 안을 빠르게 오가고 투박한 손끝이 쉴 새 없이 음핵을 자극했다.
“흣, 아읏....”
그녀의 질구에서 애액이 울컥 터지며, 내벽이 연신 움찔거렸다. 그때, 불시에 벼락같은 절정이 몸뚱이를 반으로 쪼갤 것처럼 강렬하게 내리꽂혔다.
“아흐읏!!”
주인이 허벅지 안쪽을 바들바들 떨며 휘청거렸다. 독경이 옆으로 쓰러지려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침대로 옮긴 두 사람은 다시 진득하게 몸을 섞었다. 그동안 떨어져 있던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무척이나 갈급하고 격렬한 몸짓이었다.
어느새 독경의 몸 위에 올라탄 주인이 두 손을 뒤로 돌려 그의 무릎을 짚더니, 상체를 약간 젖힌 채 유연하게 허리를 놀렸다.
“후, 현주인.... 너, 씹.... 왜 이렇게 허리를, 잘 돌려?”
그가 연신 신음을 흘리며 어이없다는 양 중얼거렸다.
“흣, 왜? 싫어?”
그녀가 위아래로 몸을 들썩이며 되물었다. 크고 단단한 기둥이 뿌리까지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감각이 아랫배에 선명했다.
“설마, 낮에 본 그 새끼랑....떡친 건 아니지....”
이 와중에도 어금니를 바득바득 갈며 유치한 질투심을 드러내는 독경이 우스워, 주인은 웃음이 났다.
“내가 하는 건, 다.... 하, 너한테 배운 거야. 읏....”
그녀가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나긋하게 답했다. 그러자 그가 눈살을 팍 찡그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하, 진짜 넌.... 사람 돌게 하는 재주 있다....”
독경이 갑자기 두툼한 양손으로 잘록한 옆구리를 움켜쥐더니, 제 등허리를 위로 거칠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앗!!”
주인이 갑작스러운 동작에 당황한 나머지 소리를 지르며 중심을 잃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 이끌려 이내 제자리를 찾고는 꿰뚫릴 것처럼 압박을 당했다.
“흣, 흣....”
절로 앓는 신음이 흘렀다. 하지만 다시 정신을 가다듬은 그녀가 맞받아치듯 제 몸을 내리찍었다.
“후우....”
독경이 흥분감에 고무된 채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주인 또한 시선을 내리깐 채 지지 않고 똑같이 노려보았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영혼까지 산산조각 내 씹어 삼킬 것처럼 치열하게 몸을 부딪쳤다.
철썩철썩.
살과 살이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철썩이며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곧이어 주인과 독경이 동시에 반쯤 벌린 잇새로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교성을 내질렀다.
“아, 아흣!!”
“읏....!”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열기를 펄펄 내뿜던 두 몸이 허공에 들린 채 우뚝, 멈췄다.
잠시 뒤, 주인이 그의 몸 위로 풀썩 쓰러지며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냈다. 독경이 제 가슴을 뜨끈하게 간질이는 호흡을 느끼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
그가 눈을 떴을 때, 날은 이미 훤히 밝아 있었다. 독경은 제 가슴팍에 안긴 새까만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잠에서 깬 순간, 그녀가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싶어 내심 불안했던 탓이다.
그러나 주인은 도망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태였다. 그가 등 뒤에서 그녀의 가는 몸을 굵은 팔다리로 꽉 결박했기 때문이었다.
안심한 독경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문지르며 잠투정을 했다. 코끝을 스치는 주인의 라벤더 향 안에 자신의 담배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이제 그녀의 체취마저도 오롯이 손에 넣은 것 같아, 그는 몹시 흡족했다.
그때, 주인이 갈라진 입술 틈으로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웅얼거렸다.
“꿈에서....엄청 큰, 늑대랑....싸웠는데....”
뜻밖의 잠꼬대에 독경이 부스스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이겼어?”
“아니, 싸우다 말고....아이스크림 먹었어....”
“그럼 우리도 화해의 뜻으로 먹을까?”
“그래, 일단 좀 더 자고....”
그녀가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그가 옷을 대충 걸치고는 밖으로 나왔다.
잠시 뒤, 독경은 남녀 셔츠 한 장씩과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객실로 돌아왔다. 주인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금방 깼네? 배고프지? 일단 이거 먹고 있어. 룸서비스 시킬게.”
그가 건네는 딸기 맛 아이스크림을 얼떨결에 건네받으며,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웬 아이스크림?”
주인은 자신이 잠결에 던진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
독경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였다.
“내가 먹고 싶어서....”
그러고는 전화기를 들어 음식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탁자를 가득 채울 만큼 요리가 차려져 있었으나, 주인은 식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
독경이 등 뒤에 딱 달라붙어 자신의 가슴과 엉덩이를 마구 주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두툼하고 꺼칠한 손바닥은 어느새 대담하게 벌어진 가운 사이로 쑥 들어와 허벅지 안쪽을 집적거리고 있었다.
“어휴, 그만 좀 해!”
그녀가 느물거리는 손을 탁 내려치며 짜증스럽게 외쳤다. 그러고는 그의 입에 돌돌 만 파스타를 쏙 넣어 주었다.
독경이 음식을 넙죽 잘도 받아먹으며 중얼거렸다.
“난 배 안 고파. 너 다 먹어.”
“먹지도 않을 걸 왜 이렇게 많이 시켰어?”
주인이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돌아보았다.
“너, 다 먹으라고. 그 집에선 너한테 피죽도 안 줘? 왜 이렇게 말랐어?”
그가 한 줌도 안 되는 손목을 은근하게 감아쥐었다. 그녀가 서글프게 미소 지었다.
“너 버리고 잘 살 만큼 뻔뻔하질 못해서....”
그 말에 독경이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들릴 듯 말 듯 나직이 응어리진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주인이 제 살갗을 비비는 그의 까만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제안한 일은 좀 더 생각해 볼게. 일이 터지면 현상현뿐 아니라, 회사도 만만치 않게 타격을 입을 거라서.... 신중하게 접근하고 싶어.”
그 말에 독경이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태가 벌어지면 후폭풍을 감당할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였기에, 조심스러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알겠어. 하지만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내 작업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장담할 수 없거든.”
***
독경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하루가 멀다고 그가 소유한 클럽에 들락거리던 상현과 그의 주변인들이 며칠째 발길을 뚝 끊었던 것이다.
상현이 주로 이용했던 VIP 룸 한가운데 우뚝 선 독경이 심드렁한 눈길로 내부를 훑었다.
그동안, 선하가 탁자 밑과 천장 장식 옆에 몰래 설치한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카메라를 떼며 말했다.
“카메라가 무사한 걸 보니, 이게 걸린 거 같진 않은데요?”
“그럼, 왜 안 오는 거지? 몰카 때문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나? 혹시 최근에 그 새끼한테 컴플레인 받은 거 있어? 아니면, 시비가 붙었다든가 뭐 그런 거라도....”
“네, 특이한 일은 없었어요. 굳이 꼽자면 며칠 전에 사장님 자리 비우셨을 때, 양 사장이 잠깐 들렀던 것 정도?”
“양 사장이? 왜?”
짙지만 가지런한 독경의 눈썹이 의심을 품은 채 위로 쑥 들렸다.
“그건 저도 모르죠. 잠깐 현상현 얼굴만 보고 간 거라, 별일 없었거든요.”
선하가 양어깨를 보란 듯 가볍게 으쓱였다.
“며칠 전이면, 나 시티뷰호텔 갔을 때?”
“네.”
독경이 주인과 하룻밤을 보내는 동안, 상현은 그와 사이가 껄끄러운 양 사장이라는 자를 만나고 있었다.
양 사장은 이 일대 클럽을 몇 군데 소유한 사업가였는데, 조직을 등에 업고 최근 몇 년간 급격히 세를 불린 독경을 견제하는 중이었다.
“현상현이 원래 양 사장 클럽 단골이었잖아요. 다시 영업하려고 찾아온 거 아닐까요?”
“그렇다고 남의 업장까지 와? 그건 아니지.”
독경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카메라를 날렵한 턱으로 가리켰다.
“녹화본 좀 보자.”
사무실에 돌아온 독경과 선하는 노트북에 칩을 꽂고 며칠 전 녹화된 영상을 재생했다.
그러자 상현이 룸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우가 양 사장을 데리고 들어오는 장면이 포착됐다.
양 사장은 상대를 향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고는 넉살 좋게 웃었다. 상현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옆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상현과 중우, 그리고 양 사장은 자리를 잡고 앉아 머리를 맞댄 채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쿵쿵 울리는 시끄러운 음악 사이로 말 몇 마디가 간간이 새어 나왔다.
상현이 먼저 운을 뗐다.
[방심하면 안.... 김강석 실장....만만....않아. 아버지 모르게....사람 .... 줄....있나?]
양 사장이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청담파 애들....할....니다.]
[....용히 몇....데려와. 장소....섭외....하지.]
상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때, 양 사장이 옆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귀에 대고 몇 마디를 더 건넸다.
워낙 가까이서 주고받은 대화였기에 그 말은 녹음되지 않았다.
“뭐지? 뭔가 꾸미는 것 같긴 한데....”
선하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혼잣말을 했다. 독경이 제 턱을 큼직한 손으로 매만지며 상황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청담파 놈들이랑 무슨 짓을 벌일 거 같긴 한데.... 일단 양 사장이랑 청담파 쪽에 사람 붙여서 감시해. 그리고 현상현이 이 근처에 나타나면 보고하고.”
“네.”
명령을 받은 선하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독경이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냈다.
***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주인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자,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회사?]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중저음의 느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모를 수 없는 목소리였다.
“내 번호 어떻게 알았어?”
그녀가 의자 등받이에 털썩 몸을 기대며 물었다.
[너 자는 동안 핸드폰 잠금 풀었지....]
독경이 나직이 웃으며 대꾸했다. 기가 막힌 주인이 콧방귀를 세게 뀌었다.
“아무튼 넌, 방심하면 안 되겠다. 바로 바꿔야지. 근데 무슨 일이야?”
[몸 안 아파? 난 오랜만에 좆을 썼더니 엄청 쑤시던데.... 누가 아주 쥐어짜가지고....]
“끊을게....”
훤한 대낮부터 음탕하게 지껄이는 헛소리를 그녀가 칼같이 잘랐다. 그러나 지난 며칠 동안 욱신거리던 사타구니는 저도 모르게 앙다물렸다.
[하여간 매몰차기는.... 김강석 실장인가 하는 그 선글라스 낀 남자, 네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사람 맞지?]
그가 여전히 뇌리에 콱 박힌 각진 얼굴을 떠올리며 질문을 던졌다.
“응, 맞아. 근데 왜?”
[그 사람, 아직도 네 아버지 밑에서 일해?]
“응, 왜?”
[흠....]
“그러니까, 왜?”
자신의 물음에는 답도 하지 않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긴 독경을 향해, 주인은 조바심을 드러냈다.
[현상현이랑 김강석 사이는 어때?]
“글쎄....”
예상 밖의 이름들이 엮이자, 이번에는 그녀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가 상대의 궁금증을 빠르게 풀어 주었다.
[아무래도 현상현이 김강석을 상대로 무슨 일을 꾸미는 것 같아. 자세한 건 나도 알아보는 중이니까 묻지 말고. 너도 혹시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곧장 나한테 말해. 알겠지?]
“응? 음, 알겠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에 크고 까만 눈동자가 허공을 향해 도르르 굴렀다. 대체 이복 오빠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쉬이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 아, 그리고....]
그사이 독경은 용건이 끝났음에도 약간 뜸을 들이며 전화를 끊지 않았다. 주인이 전화기에 얼굴을 더욱 가까이 대며 입을 열었다.
“왜? 더 할 말 있어?”
[이따 같이, 저녁이나 먹자.]
그답지 않게 어딘가 쑥스러운 어조로 툭 던지는 말에, 그녀가 쓸쓸한 미소를 옅게 띠었다.
“미안, 오후에 공장 내려가 봐야 해.”
주인은 아직 혼란스러웠다.
두 사람을 둘러싼 환경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기에. 이런 상황에서 독경을 다시 만나는 것이 과연 온당할까 싶었다.
다시금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은 것이,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때, 불쑥 끼어든 음성이 비관적인 잡념을 싹둑 잘라 버렸다.
[네가 뭘 고민하는지 알겠는데, 난 물러설 생각 없어. 올라오면 연락해. 밥이 별로면, 커피라도 먹게. 그것도 싫으면 떡이라도 치지, 뭐.]
제 할 말을 마친 독경이 인사도 없이 전화를 뚝 끊었다.
순간 황당해진 주인이 아직 밝은 휴대 전화 화면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다시 만난 그는 예전보다 더 거칠고 제멋대로였다. ‘선배’라고 자신을 부르며 의뭉스럽게 잔망을 떨던 앳된 모습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
저녁 무렵, 독경은 근처에서 가장 유명한 일식집에서 초밥 도시락을 주문하고 있었다. 이따 주인을 만나면 뭐라도 먹일 심산이었다.
“나도 양심이 있지, 아무것도 안 먹이고 그 짓을 할 순 없지.”
음흉한 속내를 굳이 감출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몸 어딘가가 불끈하고 터질 것처럼 솟았다.
독경이 피식 웃으며 신체의 변화를 느긋하게 즐기고 있을 때,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휴대 전화에서 진동이 부르르 울렸다.
[형님, 어디세요?]
귓가에 댄 수화기 너머로 명랑한 음성이 들렸다.
“왜?”
독경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청담 쪽 애들 몇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선하의 보고에 담배를 입에 물던 손동작이 우뚝 멈췄다.
“사람 붙였어?”
[네, 지금 쫓는 중이에요.]
“알겠다. 나도 그쪽으로 곧 갈 테니, 주기적으로 보고해.”
통화를 마친 그가 손에 들린 도시락 봉투를 내려다보며 쩝, 하고 쓴입을 다셨다.
당일 출장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주인은 차에서 내렸다. 저녁도 거른 채여서 몹시 허기졌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었다.
그렇게 터덜터덜 주차장을 가로지르는데, 고급 세단에서 커다란 인영이 내리더니 힘차게 그녀를 불렀다.
“현주인!!”
그녀가 뒤를 돌자, 껄렁하게 차에 기대선 독경이 자신을 향해 씩 웃는 것이 보였다.
“뭐야, 연락도 없이 왜 왔어?”
주인이 그를 향해 방향을 바꿔 걸으며 물었다.
“저녁에 보자고 했잖아.”
독경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들썩거렸다.
“난 대답 안 했는데? 내 의사를 존중할 마음은 없어?”
“너도 내 의사를 존중해 주지 않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해?”
그녀가 쏘아붙이는 공격을 그가 여유롭게 받아치며 보조석 차 문을 열었다.
“들어와. 와서 밥 먹고 가.”
주인이 잠시 망설이다 얼결에 차에 올라타자, 어느새 운전석에 앉은 독경이 도시락을 내밀었다.
“먹어. 너 먹는 거 보고 가게.”
“어디 가는데?”
그녀가 초밥 하나를 입에 넣으며 물었다. 그러자 그가 새까만 벨벳 같은 단발머리를 손가락으로 쓸며 답했다.
“일이 좀 있어서. 원래는 이거 핑계로 집에 쳐들어가서 밥도 먹고, 커피도 좀 얻어 마시고, 분위기도 잡아 볼까 했는데.... 흠....”
말을 잇는 독경의 가로로 긴 눈이 점점 더 불순하게 가늘어졌다. 주인이 그 노골적인 시선에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꿈이....너무 야무졌네....”
그때, 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말해.”
독경이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다급한 목소리가 주인의 귓가에도 설핏 닿았다.
“미친 새끼들. 무식한 건지 대범한 건지, 원. 아무리 오밤중이라 오가는 사람이 없다지만, 시내 한복판인데.... 그런 짓을 했다고?”
독경이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기계 너머에서 또다시 웅얼거리며 짤막하게 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알았다. 나도 곧 가지. 놓치지 말고 잘 쫓고 있어.”
전화를 끊은 그가 귀를 쫑긋 세운 채 통화 내용을 엿듣고 있던 주인에게 고개를 슥 돌렸다.
“나, 이제 가야 해.”
“무슨 일인데? 혹시 낮에 말한 그거야?”
그녀가 예리한 눈빛을 반짝이며 묻자, 그가 잠깐의 침묵 후 슬쩍 입을 뗐다.
“아니, 클럽 일이야. 들어가, 이따 전화할게.”
더 이상의 대화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양, 독경은 뻣뻣하게 응대했다. 그 고압적인 태도에 주인은 어쩔 수 없이 더 캐묻지 못한 채 쫓겨나듯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주차장을 벗어난 그는 날이 선 매서운 얼굴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기 무섭게, 선하가 즉각 전화를 받았다.
[형님, 출발하셨어요?]
“그래, 어디냐?”
[지금 경기도 쪽으로 빠지고 있어요.]
“김강석은 무사하고?”
[네, 차에 탄 뒤로 아직은 별문제 없어 보여요.]
“알겠다. 도착하면 어딘지 문자 남기고,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 아, 그리고 나 실장한테 대기하라고 전해. 혹시 모르니까.”
[네.]
씩씩하게 대꾸한 선하가 전화를 끊자, 독경이 살짝 헝클어진 앞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손등에 핏줄이 툭 불거질 만큼 운전대를 꽉 잡았다. 악동처럼 천진하고 짓궂은 목소리가 차 안에 나른하게 퍼졌다.
“현상현 이 새끼, 무슨 약점을 잡혔기에 김강석을 납치까지 해? 재밌어 죽겠네, 아주.”
새까만 고급 세단이 스산한 어둠으로 자욱한 도로를 용맹하게 내달렸다.
그사이 집에 돌아온 주인은 블라우스 단추를 풀던 손길을 우뚝 멈추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조금 전 독경의 반응이 영 찜찜했다. 틀림없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녀는 휴대 전화를 들어 그와 통화를 시도하려다 잠시 멈칫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무슨 일인지 알려 줄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주차장에서도 한껏 방어적인 태도로 대화를 단칼에 차단하지 않았던가.
주인은 팔짱을 낀 채 거실을 오가며 이리저리 궁리하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창밖을 빼꼼 내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가 그려졌다.
그녀가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현관문 쪽으로 다가갔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는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산 삼각 김밥을 뜯으며, 제법 고급스러운 오피스텔 건물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 형님이자 현 사장님의 명을 받고, 얼마 전부터 한 여자를 미행하는 중이었다.
딱 보아도 부유한 환경에서 곱게 자란 것 같은 청초하고 고상한 여자는 집과 회사를 오가며 건실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사장은 그에게 엄포를 놓았다.
그녀가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어디서 뭘 하고 누굴 만나는지 빠짐없이 보고하라고.
거기에 한술 더 떠, 야밤에 기어들어 가는 새끼가 있을지 모른다며 밤새 보초까지 서라고도 했다.
남자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원래도 미친개로 악명 높았던 그가 진짜로 돈 것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장은 평온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한 가지 사실이라도 누락할 경우,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뜨리겠다고 협박했다.
옆에 있던 유선하 실장이 말리지 않았다면, 시범이라도 보일 기세였다.
남자는 너저분한 뒷골목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상사와 언뜻 모범적이고 평탄한 삶을 사는 것 같은 여자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몹시도 궁금했다.
그러나 들은 바가 없기에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삼각 김밥을 우적 씹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운전석 창을 두드렸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감시 대상이 상큼하게 웃으며 창을 내리라는 손짓을 했다.
이마에서 땀이 삐질삐질 났다. 남자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키며, 우물쭈물 창을 내렸다. 그러자 여자가 낭랑한 목소리로 알은체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 아시죠?”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보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상반된 인상임에도 두 사람에게서는 상대를 압도하는 분위기가 흘렀다.
“아....”
남자가 황망한 표정으로 입만 뻐끔거렸다.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애매한 상황에 난감했다.
“이독경, 지금 어디 있어요?”
여자가 방긋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가 두 눈을 연신 감았다 떴다.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가 그린 듯 단정한 미간을 살포시 찌푸리다 아, 하며 작은 탄성을 질렀다. 그러고는 곧장 질문을 정정했다.
“그쪽 사장님, 어디 있는지 아세요?”
“네? 저희 사장님이요? 그, 그야 지금 업장에....”
남자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음, 아닐걸요? 혹시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여자가 청아한 음성으로 상냥하게 요청했다.
상대를 사르르 녹이는 눈웃음에 그는 기꺼이 돕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손모가지가 날아갈 판이었다. 바짝, 정신 차려야 했다.
“아, 아니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전 할 수 없습니다!!”
“흠....”
그러자 그녀가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며, 퍽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스토커로 신고하는 수밖에....”
“네에??”
남자가 울상을 지으며 외쳤다.
***
독경은 선하가 알려 준 대로 경기도 외곽의 한 저수지에 도착했다.
인가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곳은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괴괴한 적막이 고립감을 더욱 부추겼다.
그는 버려진 비닐하우스 뒤쪽에 차를 대고는, 저수지 방향을 주시했다.
선하에게서 곧장 전화가 왔다.
[도착하셨어요?]
“그래.”
[현상현도 좀 전에 와서 창고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 말에 독경의 날카로운 눈이 저수지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새것처럼 반질거리는 육중한 철문에 닿았다.
“저쪽은 몇 명 정도지?”
[음. 아까 김강석 데리고 간 애들 셋에, 현상현이랑 같이 온 둘까지 합치면 기본 다섯은 될 것 같아요. 근데 창고 안에서 대기 중인 놈들도 있을 수 있으니, 넉넉잡아 열 명 정도지 않을까요?]
“우리 인원에 두 배쯤이군. 해 볼 만하겠어. 나 실장은 오는 길이지?”
[네, 중간쯤 왔다고 연락 줬어요.]
“그래, 일단 우리 먼저 들어간다. 지원 기다리다간 그사이 현상현이 김강석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더 늦기 전에 김강석 신변부터 먼저 확보하자고.”
독경이 차 문을 열고 나오며 말했다. 그러자 멀찍이 주차돼 있던 다른 차에서 선하와 조직원 두 명이 따라 내렸다.
합류한 네 사람이 으슥한 허공을 더듬으며 창고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팍!!
그 순간 자동차의 전조등이 번쩍 켜지더니, 숨죽인 채 이동 중이던 그들을 비췄다.
갑작스러운 조명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자 당황한 독경과 일행이 발길을 우뚝 멈추며, 낯선 차로 시선을 돌렸다.
쏟아지는 빛살 너머의 차 안에서는 양 사장이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허?”
독경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그때, 상현과 우락부락한 사내 몇이 창고에서 나오더니 독경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왔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듯 멈춰 선 상현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서늘한 밤공기 사이로 서서히 퍼지는 연기를 지그시 지켜보는 두 눈이 뱀처럼 교활하고 거만했다. 그가 산뜻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이독경.”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독경이 상대를 삐딱하게 마주 보았다.
“용케도 날 기억하네?”
“그럼. 제 아버지 목 조른 새끼를 어떻게 잊겠어?”
상현이 픽 웃으며 대꾸하더니, 타다 만 담배를 흙바닥에 툭 던지고는 구둣발로 짓이겼다. 그러고는 심드렁하게 뒷말을 이었다.
“이제 와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그땐 좀 속 시원했어. 나도 그 꼰대 새끼 목 졸라 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 덕분에 대리 만족 잘했지.”
“그래서 본론이 뭐야?”
독경이 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상현이 은은하게 짓던 미소를 거두고는 어금니를 짓씹으며 입을 열었다.
“갈 때마다 비싼 술을 족족 처먹이는데, 정작 사장 새끼는 눈도장 한번 안 찍는 게 이상하긴 했지. 그런 경우는 보통 둘 중 하나인데 말이야. 뭔가 꿍꿍이가 있거나, 정체를 감춰야 하거나. 아, 넌 둘 다인가?”
그 말에 이번에는 독경이 진한 이목구비를 슬며시 구기며 냉혹하게 웃었다.
“대가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생각이란 걸 하긴 하네? 장식용으로도 영 쓸모가 없어 보여서 궁금했는데.”
혓바닥을 거침없이 휘두르며 지껄이는 독설에 상현의 낯짝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치미는 분노를 꾹 누르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나 보자. 오늘 내가 날을 좀 잡았거든. 김강석도 잡고 너도 유인하고. 지금 넌, 함정에 빠진 거야. 여기서 두 다리 멀쩡하게 나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말을 마친 상현이 오른손을 들더니,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또 다른 차에서 전조등이 탁, 켜졌다. 그리고 대기하던 다른 차들도 연달아 전조등을 빛냈다.
눈 부신 빛이 독경 일행을 에워쌌다. 가로등 하나 없어 캄캄하기만 했던 주변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동시에 전조등을 켠 차들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혀, 형님!!”
선하가 침을 꿀꺽 삼키며 독경 옆에 바짝 붙어 섰다. 그 광경을 빙글빙글 웃으며 구경하던 상현이 어딘가 상쾌하기까지 한 음성을 냈다.
“난 아직 남은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지. 네 문제는 알아서 잘 해결해 보라고. 솔직히 너처럼 악독한 새끼한테 명문대생은 안 어울렸어. 지금처럼 깡패 짓이나 하는 게 천직이지, 하하!”
그가 시원스럽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창고 방향으로 휙 돌아섰다.
독경이 그 뻔뻔한 뒷모습을 노려보며, 턱 근육이 경직될 만큼 이를 악다물고는 짙은 눈썹을 불온하게 일그러뜨렸다.
제아무리 거침없이 날뛰는 독경이라 해도 자신들보다 서너 배 많은 인원을 상대하기란 역부족이었다.
“씨발....”
그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각목을 피하더니, 상대의 얼굴에 큼지막한 주먹을 꽂아 넣었다.
“윽!!”
남자가 각목을 떨어뜨리며 제 코를 움켜쥐고는 비틀거렸다. 그사이 독경이 각목을 주워 들어 주변에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형님, 이대로는 오래 못 버텨요!!”
선하가 깡마른 상대를 업어치기 하며 소리쳤다.
“나도 안다!! 근데 나 실장이 올 때까진 어떻게든 버텨야지!!”
그사이 그가 각목을 들지 않은 손으로 덤벼드는 다른 사내의 목을 비틀었다.
곳곳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뒤엉켜 싸우며 괴성과 신음을 질러 댔다. 누렇게 일어나는 흙먼지 사이로 선혈이 튀었다.
지옥의 풍경도 이보다 살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독경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인 양 사장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개새끼....”
아무래도 그자가 상현과 청담파를 연결해 주며, 자신에 대한 정보도 흘린 모양이었다. 물론, 독경이 상현과 정확히 어떤 인연으로 엮였는지는 몰랐을 테지만 말이다.
독경이 손에 쥔 각목으로 한 놈의 대가리를 퍽 치더니, 연이어 긴 다리로 다른 놈의 복부를 걷어찼다.
그러고는 헝클어진 머리를 불만스럽게 쓸어 올리며, 두꺼운 문으로 굳게 막힌 창고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다 김강석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전부 허사였다. 짙은 선글라스를 낀 음험한 그 남자는, 현상현에게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상현이 이런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그를 제거하려는 것이겠지.
빵! 빵빵!!
그때였다. 새된 자동차 경적이 새까만 하늘을 찢어발길 것처럼 울려 댔다.
마치 자신에게 경고하는 것처럼 다급하게 울리는 소리에, 독경이 가로로 긴 두 눈을 크게 뜨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허공을 가르며 자신을 공격하는 쇠 파이프를 발견하고는 간발의 차로 몸을 피했다.
‘나 실장인가?’
독경이 아비규환 속을 불나방처럼 돌진하는 차를 발견하고는, 반색했다.
중형 세단은 험상궂은 사내들을 위협적으로 가로지르더니 끼익하는,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멈춰 섰다.
그가 웃는 낯으로 사람들을 밀치며 차로 다가가다, 제자리에 우뚝 정지했다. 그러고는 운전석에 앉은 사람을 확인하고는 경악에 찬 얼굴로 사자후를 내질렀다.
“현주인, 너 미쳤어??”
어딘가 미묘하게 낯익은 그 차는 주인의 것이었다.
주인은 독경이 자신에게 붙인 남자를 미소 띤 얼굴로 협박했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동료들에게 전화를 몇 번 돌리더니, 나 실장과 대기 중이던 자를 통해 목적지를 알아냈다.
그녀는 앞뒤 재지 않고 곧장 차부터 몰았다. 이대로 손 놓고 기다리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별일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만에 하나 위험에 처할지 모를 독경과 강석을 상상하면 절로 아찔해졌다.
그래서 주인은 운전대를 잡은 손에 식은땀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황급히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주인은 똑똑히 보았다.
독경의 등 뒤로 다가가는 남자를. 어떻게든 알려야 했다. 본능적으로 클랙슨에 손이 갔다.
“뭐야, 씨발!! 이 차는!!”
그녀가 운전대에 얼굴을 파묻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이, 쇠 파이프를 든 남자가 욕설을 퍼부으며 다가오더니 앞 유리를 세게 쳤다.
퍽퍽.
차가 덜컹 흔들리며, 유리에 쩍쩍 금이 갔다.
“헉!!”
주인이 비명을 삼키며 어깨를 움츠린 채 앞을 보았다.
그때, 커다랗고 시커먼 손이 사내의 머리채를 휘어잡더니 보닛에 힘껏 처박았다.
쾅!!
묵직한 충격음과 동시에, 갈라진 유리 사이로 남자의 눈동자가 허옇게 뒤집히는 꼴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다른 누군가가 그 틈으로 얼굴을 쑥 내밀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독경이었다.
그는 화난 듯도 하고 기쁜 듯도 한 아리송한 얼굴로 그녀를 주시했다. 그러고는 휴대 전화를 들어 받으라는 시늉을 했다. 주인이 순순히 그를 따랐다.
[너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와!!]
수화기 너머로 성난 음성이 고막을 가차 없이 두들겼다.
“이럴 땐 고맙다고 해야지!! 내가 도와줬잖아!!”
주인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독경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사내의 뺨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치며, 기가 막혀 죽겠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너, 거기서 한 발짝도 나오지 마. 알겠어?? 그리고 잠깐 차 좀 빌리자.]
그가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차를 빌려 달라는 말에 주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밖을 내다보는데, 독경이 보닛 위로 훌쩍 뛰어오르더니 성큼성큼 지붕으로 올라섰다. 쿵쿵거리는 육중한 발소리를 따라 차가 요동쳤다.
그때, 한 남자가 주인을 끌어 내리려 운전석 문을 벌컥 잡아당겼다. 그녀가 헉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독경이 구둣발로 그의 머리를 힘차게 가격했다.
상대가 나가떨어지자, 그는 다시 다른 남자의 머리를 발로 꾹 짓이기며 차에서 떼어 놓았다.
형형한 눈을 부라리며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낸 채 활짝 웃는 독경의 얼굴은 흡사 야차와도 같았다. 그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손쉽게 높은 위치를 선점한 그가 자신을 향해 악귀처럼 덤비는 자들을 실컷 주무르는 사이, 주인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펄떡이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코앞에서 폭력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니, 온몸에 힘이 쑥 빠지며 머리가 핑 돌았다. 그러나 자신은 벌벌 떨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주인은 양손을 쥐었다 펴며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몸과 마음을 풀었다. 그리고 동시에 차창 너머의 상황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리저리 날뛰는 먼지투성이 사내들 사이로, 저 멀리 어렴풋하게 낡은 창고 하나와 저수지 중앙으로 길게 뻗은 목조 다리가 보였다.
그녀가 주변과 부조화한 창고의 용도를 헤아리던 그때, 철문이 벌컥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앞에 선 인영은 얼굴에 천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뒤따르는 인영은 그런 상대를 다리 쪽으로 떠밀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이 강석과 상현이라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상현은 앞이 보이지 않는 강석을 결박한 채, 점점 더 저수지 방향으로 내모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불길했다.
“아, 안 돼....”
주인이 깊이 탄식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 순간에도 두 사람은 다리 쪽으로 서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주인은 재빨리 보조석으로 자리를 옮겨 가, 몸을 최대한 낮추고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저수지 쪽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녀의 뒷모습을 발견한 독경이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씨발, 나오지 말라니까!!”
그 순간, 그의 긴 눈에 일렬로 늘어서서 좁은 길을 달려오는 차 몇 대가 보였다. 독경이 끈질기게 달라붙는 놈들을 짜증스럽게 떨어뜨리며 말했다.
“유선하! 나 실장 곧 오니까 여기 좀 정리해라!!”
“넵!!”
머리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선하가 한 사내의 팔뚝을 뚝 꺾으며 명령을 받들었다.
그사이, 주인은 물가에 다다랐다. 그녀가 터질 것 같은 가슴을 한 손으로 움켜쥐며, 다리 끝자락에 위태롭게 선 남자에게 외쳤다.
“오빠, 그만해!!”
뜻밖의 목소리에 놀란 상현이 강석의 목덜미를 틀어쥔 채 뒤를 돌았다. 몸 선이 가녀린 여자가 자신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여길....”
그가 두 눈을 크게 뜨며 이복동생을 멍하니 보다, 이내 야릇하게 웃었다.
“왜, 이독경이 걱정돼서 왔어? 그 새끼는 지금 엄청 바쁠 텐데.”
주인이 뻔한 도발에 응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김 실장님, 놔줘요.”
그 말에 검은 천을 뒤집어쓴 강석의 얼굴이 그녀 쪽을 향했다. 그러나 아무런 대꾸가 없는 것으로 보아 입에 재갈을 물린 모양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넌 좀 빠져 줄래?”
상현이 어딘가 나른한 어조로 지껄였다.
“어차피 늦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놔줘요.”
주인의 아름답지만 차가워 보일 만큼 단호한 얼굴을, 상현이 피로에 찌든 표정으로 물끄러미 보았다.
이윽고, 그가 그녀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막 도착한 독경의 수하들이 차에서 우르르 내리는 모습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네. 너랑 이독경 그 새끼가 방해만 안 했어도 성공했을 텐데....”
상현이 여상하게 중얼거리며 잡고 있던 손을 탁 놓았다. 강석이 잠시 비틀거리더니 이내 중심을 잡았다.
상현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주인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너, 언제까지 나 방해할래?”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저....”
“그저?”
그가 말꼬리를 잡으며 고개를 삐뚜름하게 꺾었다. 그녀가 주춤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옳지 않다고 믿는 일을 막는 것뿐이에요.”
“하....”
상현이 한숨처럼 길고 짙게 조소했다. 그러고는 타박하듯 나직이 쏘아붙였다.
“주인아, 너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네가 그러니까 나한테도 치이고, 아버지한테도 떠밀리는 거 아냐? 응?”
그 말에 주인이 긴장과 공포로 마른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치밀었다.
“그냥 집에서 시키는 대로 얌전히 살다 죽어, 응? 애먼 짓 하지 말고.”
상현이 고압적인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주인이 온몸에서 반항기를 풍기며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그렇게 살면, 어떻게 되는데요? 딱, 오빠처럼 되잖아요. 아버지한테 짓눌려서 기도 못 펴는 장남. 나쁜 짓 한 거 걸릴까 봐 무서워서 김 실장님 입막음하려는 거 모를 줄 알아요?”
“이, 썅년이!!”
상현이 그녀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채며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주인의 마른 몸이 맥없이 그에게 딸려 갔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다 맞아. 그러니까, 이제 좀 꺼져 줘라.”
그가 멱살을 잡은 손을 마구잡이로 흔들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주인의 귓가에 다정하지만 어딘가 섬뜩한 한마디를 속삭였다.
“너, 수영 못 하지??”
“지금 뭐, 뭐라고....”
그 말에 주인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아연하게 올려다보았다.
상현이 광기에 찬 두 눈을 코앞에서 부드럽게 휘며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스륵 풀었다.
그러고는 손끝으로 주인을 툭 밀었다. 그녀의 몸이 속절없이 뒤로 떠밀렸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뒤따라오던 독경이 참담한 광경을 목도하고는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것처럼 고함을 질렀다.
“현주인!!”
그 간절한 외침이 메아리처럼 사방으로 퍼졌으나, 주변에 막혀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차디찬 수면 아래로 침잠해 가며 주인은 생각했다.
‘여기가 어딜까? 그토록 독경과 함께 죽고 싶었던 지중해일까? 아니면, 홀로 쓸쓸하게 잠겨 가는 이름 모를 저수지일까?’
하지만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낼 수만 있다면 말이다.
오직 하나 홀로 남을 독경이 가슴을 뻐근하게 만들었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지겹고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는 일이 더 중요했다.
‘이제 지쳤거든....’
그를 사무치게 그리워한 많은 밤도, 손발이 묶인 것 같은 무력함에 좌절하던 날도, 온갖 오욕을 가까스로 삼키며 버텼던 순간들도....
이제 조금 있으면 모두 끝날 터였다.
‘미안해, 이독경. 하지만 너만은 날 이해해 줄 거라 믿어....’
주인이 점차 차오르는 숨에 질끈, 눈을 감았다.
뼛속까지 시린 한기에 온몸이 가늘게 떨렸다. 어느새 정신이 서서히 아득해져 갔다.
몸이 점점 아래로 속절없이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심연 속에 제 몸을 숨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가 만족감에 입꼬리를 희미하게 들어 올렸다. 아니, 그랬으리라 믿었다.
하나 그 순간, 굵은 밧줄처럼 억센 팔뚝이 가는 허리를 감아 챘다. 그러고는 위로, 점점 더 위로, 자신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주인이 자포자기한 채 꽉 감았던 눈을 스르륵 떴다. 그러자 굳게 다문 날렵한 턱이, 굵직한 목선이, 너른 가슴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가 위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자, 죽을힘을 다해 자신을 구하려는 남자가 보였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물살을 따라 넘실거리고, 짙은 눈썹은 가쁜 호흡으로 설핏 찡그려졌다.
그러나 가로로 긴 날카로운 눈만은 고요하고 어둑한 심연 속에서 기이한 빛을 발하며 수면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제게 남은 모든 힘을 쥐어짜 내 가라앉던 그녀를 들어 올리려 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유일한 의무인 것처럼.
남자는 결코 지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힘차게 팔다리를 움직였다. 물살을 거스르며 나가는 근육들이 잘게 불끈거릴 때마다 삶과 그녀에 대한 애틋한 집착이 엿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여자를 물 위로 끄집어냈다.
밖으로 빠져나온 그녀의 입에서 막힌 숨이 팍, 터졌다.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독경이 주인의 젖은 얼굴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뭍으로 끌고 왔다. 그러고는 자신도 땅 위에 풀썩 고꾸라졌다.
하늘을 향해 드러누운 주인이 가슴을 헐떡이며 옆에 엎드린 그를 바라보았다. 독경이 연신 눈물로 얼룩지는 그녀의 뺨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거짓말했어.”
“뭐?”
그녀가 가쁜 숨 사이로 물었다.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우리 같이 그 바다에 빠졌어도, 안 죽었을 거야.”
다시금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수영을 잘하거든.”
그 말에 주인이 기어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악문 잇새로 서러운 감정이 줄줄 흘러나왔다.
“흑, 흐윽....”
흠뻑 젖은 채 부들부들 떨며 오열하는 그녀의 여린 몸을 독경이 애달프게 끌어안았다.
“살자, 주인아.... 살아 보자, 우리. 난 이제 너 없이는 안 돼....”
귓가를 잔잔히 울리는 따사로운 그 말이, 주인에게는 어떤 성서 속 구절보다도 경건하게 다가왔다.
텀벙하며 무거운 물체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리자, 강석은 간신히 붙잡았던 이성의 끈을 툭 놓았다. 그때, 그의 고막에 소름 끼치도록 기괴한 음성이 꽂혔다.
“꼴좋다, 씨발. 빨리 뒈져 버려!!”
그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자신을 납치하고 제 동생을 죽이려는 파렴치한, 말도 안 되는 악랄한 소동의 장본인, 상현이었다.
강석은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상현을 쓰러뜨리며 그 위에 올라탔다.
“뭐, 뭐야!! 저리 안 꺼져!!”
상현이 손을 휘저으며 딴딴한 육체를 밀어내려 했으나,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 강석이 몸을 꾸물거리며 그의 얼굴을 찾더니, 제 머리를 세차게 내리꽂았다.
퍽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상현의 이마에서 피가 주룩 흘렀다.
“으으....”
그가 이마를 감싸며 신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석은 양다리로 상대의 몸통을 고정한 채 다시 박치기를 했다. 자신의 이마에서도 뜨끈한 액체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누군가가 강석의 머리에 씌워진 천을 재빨리 벗기더니, 재갈을 풀었다.
“김 실장님, 진정하세요!”
막혔던 시야가 탁 트이자, 눈앞에 구겨진 셔츠에 핏자국을 잔뜩 묻힌 청년이 보였다.
“현 팀장은....”
강석이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며 물었다.
“아, 괜찮아요. 저희 형님이 구하셨어요.”
그제야 안도감을 느낀 그가 살짝 비틀거렸다. 그때, 발밑에서 나뒹굴던 상현이 외쳤다.
“김 실장! 너, 이 새끼 가만 안 둬!!”
심히 거슬리는 협박에 강석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더니, 상대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상현이 배를 움켜쥐며 데굴데굴 굴렀다.
“너야말로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이 빌어먹을 애새끼야.”
그가 침을 퉤 뱉고는 쫄딱 젖은 몰골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주인과 독경에게 다가갔다.
“현 팀장, 괜찮나?”
“네, 실장님은요?”
강석이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며, 양복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보아하니, 내가 신세를 진 것 같은데....”
그가 구릿빛의 선이 굵직한 얼굴을 빤히 보았다. 상대가 거만한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잘 아시네.”
“이, 독경.... 맞지?”
강석이 기억을 더듬으며 낯익은 이름을 꺼냈다. 독경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내가 꽤 인상적이었나 봐?”
여전히 오만불손한 태도가 못마땅했는지, 강석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주인이 그런 그를 보며 본론을 꺼냈다.
“실장님, 저랑 손잡으시죠? 현상현 이대로 두실 거예요?”
위엄이 실린 고아한 목소리에 강석이 그녀를 잠자코 응시했다. 잠시 뒤, 그가 성큼 앞장서며 말했다.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하시죠.”
주인과 독경이 시선을 교환한 뒤, 그를 따랐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 강석은 그사이 벌어진 일을 간략하게 전했다.
자신이 상현의 뒤를 캐게 된 계기부터 그가 현 회장 몰래 비자금을 만드는 과정. 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챈 상현이 어떻게 협박했는지 등을 남 일처럼 무심하게 말이다.
“최근 미행당하는 일이 부쩍 늘면서, 대충 낌새를 채고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류를 안전한 곳으로 옮겼죠.”
“그게 어딘데요?”
뒷좌석에 앉은 주인이 물었다. 그 질문에 강석이 손을 들어 정면을 가리켰다.
“저깁니다.”
주인과 독경은 어딘가 무척 낯익은 목적지를 바라보며 두 눈을 깜박였다. 그곳은 두 사람이 헤어지기 전, 함께 일했던 카페였다.
미리 연락을 받은 수연이 가게 밖으로 뛰어나오며 외쳤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수연은 꼴이 엉망이 된 세 사람을 한동안 망연자실하게 보다, 이내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인과 독경에게 두툼한 담요와 따뜻한 차를 건넨 뒤, 구급상자를 들고 와 강석의 이마에 연고를 발라 주었던 것이다.
“고맙습니다, 수연 씨. 제가 맡겼던 서류, 돌려주시겠습니까?”
강석이 정중하게 부탁하자, 수연은 불안한 눈초리로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창고 깊숙이 숨겨 두었던 두툼한 봉투를 들고 돌아왔다.
서류를 받아 든 강석이 주인을 보며 말했다.
“날이 밝는 대로 회장님께 바로 보고 올릴 겁니다. 현 팀장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아마, 아버진 오빠를 대신할 사람을 찾을 거예요. 그리고 그 자리엔 제가 들어가겠죠.”
그녀가 두 눈을 지그시 뜬 채, 머릿속으로 경우의 수를 계산했다.
“하지만 제가 그 자릴 꿰찬다 해도 안심할 순 없어요. 당장 있을 주총이나 이사회에서 현상현이 훼방을 놓을 수도 있으니까요.”
강석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최근 현 부회장이 이사회에 공을 꽤 들인 상태라, 절반 정도가 그쪽 편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네, 그렇죠. 거기다 제 지분율도 현상현에 비해서는 부족해요. 얼마든지 흔들릴 수 있어요.”
그때, 주인과 강석의 대화를 가만히 경청하던 독경이 불쑥 끼어들었다.
“김주환이 가지고 있는 주식 3%를 너한테 넘기면?”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빙글빙글 웃는 그를, 두 사람이 동시에 주목했다.
“그렇게 되면 부회장과 현 팀장의 지분이 거의 비등하거나, 약간 하회하는 수준으로는 올라설 수 있는데.... 그건 왜?”
강석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독경을 주욱 훑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주환은 개인 투자자 중 태성의 지분을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이었으나, 주총장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미지의 인물이었다.
독경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그 김주환 쩐주가 나거든.”
주인과 강석이 입을 쩍 벌리며 기겁했다. 강석이 침음을 삼키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현 팀장, 이 미친놈 계속 데리고 다닐 겁니까?”
그러자 주인이 웃음기를 감추며 물었다.
“왜요?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요, 반댑니다. 제 밑에 두고 일 가르치고 싶을 만큼.”
그 말에 그녀가 더 참지 못하고는, 소리 없이 웃으며 호응했다.
“그럼, 비서실에 자리 하나 마련해 주실래요?”
“그거야 어렵지 않죠.”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오가는 대화에, 독경이 미간을 심술궂게 찡그렸다.
“미안하지만, 난 남 밑에서 일 안 해.”
“일단, 이대로 진행하죠.”
강석이 그의 말을 가뿐히 무시하며 주인에게 눈짓했다. 그러고는 멀찍이 서 있던 수연에게 곧장 다가갔다.
그는 애정이 담뿍 담긴 태도로 초조해하던 그녀를 상냥히 달랬다. 어딘가 간질거리는 두 사람의 행동을 물끄러미 보던 주인이 독경에게 입을 열었다.
“우린, 잠깐 나가 있자.”
밖은 어느새 조금씩 밝아 오고 있었다. 빛살이 서서히 번지는 동쪽 하늘을 응시하며, 주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난 네가 김 실장님 밑에서 일했으면 좋겠어. 지금 하는 일도 그만둘 수 있고, 일석이조니까.”
“글쎄, 남 밑에선 안 한다니까.”
독경이 다시 한번 불퉁하게 대꾸했다.
“이독경, 정말 이대로 끝냈으면 좋겠어? 현상현으로 만족할 수 있어?”
그녀의 크고 맑은 눈동자가 여명 아래서 영민하게 반짝였다. 그가 그 빛에 천천히 빨려 들어갔다.
“김 실장님은 아버지의 측근 중에서도 최측근이야. 그만큼 많은 걸 알고 있지. 치부까지도. 난 네가 그걸 찾아냈으면 좋겠어.”
은밀히 드러내는 속내에 독경의 눈이 음험하게 가늘어졌다. 뾰족한 송곳니를 혀끝으로 쓸며 그가 느긋하게 물었다.
“그래서 내가 얻는 건?”
주인이 고개를 돌려 그를 똑바로 보았다.
“내 전부를 줄게. 부족해?”
“아니, 충분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교만하게 웃던 독경이 큼직한 손으로 가녀린 목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제 얼굴을 바짝 대며 진득하게 입을 맞췄다.
주인이 슬며시 눈을 감으며, 집요한 입술을 순순하게 받아들였다. 맞닿은 살결에서부터 독이 퍼지듯 서서히 감각이 마비됐다.
그러나 그녀는 상관없었다. 그 독에 취해 맛본 황홀경이 자신을 다시 살게 했으므로.
포개진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아침 햇살이 찬란하게 쏟아져 내렸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