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75화 (75/76)

#75화. 종장

그러니까 이 나라 남쪽 끝 작은 바닷가 마을에, 동양인 남녀가 나타난 것은 두세 달쯤 전이었다.

이곳은 언뜻 평범한 어촌처럼 보였지만, 기후가 온화한 편이고 파도의 고도나 강도가 일정해서 나름 서핑 명소로 유명한 장소였다.

그렇기에 꽤 많은 외지인이 드나들었지만, 동양인은 무척이나 귀했다.

그래서 동네 주민들과 유럽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은 새카만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그들을 힐끔힐끔 훔쳐보고는 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동양인 특유의 무뚝뚝한 얼굴로 마을을 돌아다닐 뿐이었다.

두 사람의 일과는 꽤 단순했다.

동이 틀 무렵 일어나 아침을 먹고는, 간단히 단장을 마치고 산책에 나섰다.

그렇게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서, 그들은 늘 같은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제 넉넉한 품에 여자를 끌어안은 채 가끔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아무리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해도, 그것이 사랑의 언어라는 것쯤은 모를 수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하염없이 바다를 응시하다, 출출해지면 샌드위치 따위를 나눠 먹었다.

그러고는 석양이 질 무렵 일어나 손을 꼭 잡은 채, 해변가를 가로질러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똑같은 하루를 반복했다.

사람들은 어딘가 신비롭게까지 느껴지는 이방인들을, 어느새 익숙한 풍경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때 두 사람은 마치 긴 휴가를 끝내기라도 한 것처럼, 부지런히 움직였다.

바닷가 인근에 다 쓰러져 가는 작은 집을 사들인 뒤, 정성껏 꾸미기 시작했던 것이다.

산책을 오가다 낡은 그 집을 발견했을 때, 주인은 탄성을 질렀고 독경은 한숨을 쉬었다.

“이것 봐! 완전 근사하지 않아? 위치도 바다랑 가깝고, 크기도 적당해서 딱 좋은데!”

“나 참, 저기 위에 구멍 뚫린 거 안 보여요? 그리고 문 한쪽도 덜렁거리잖아요.”

그가 거칠게 마른세수를 슥 하더니, 지붕 위 뻥 뚫린 구멍과 바람에 흔들리는 문을 가리켰다.

“그래서, 싫어?”

그녀가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쳐다보았다. 그 눈길을 미처 피하지 못한 독경이 몸을 움찔거렸다.

“고치면, 고치면 되죠.... 저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어딘가 떨떠름한 대답이었으나, 주인은 흡족하게 웃었다.

“다 갖춰진 걸 사는 건 재미없잖아? 내 손으로 만들어야 의미가 있지.”

“고생하는 게 싫어서 그렇죠. 편하게 지낼 수도 있는데....”

그녀의 말에 그가 다시 낮은 한숨을 냈다.

“왜 고생이야? 너랑 같이 하는데. 추억이지.”

여상한 어조로 하는 말이었지만, 그에게는 남다르게 다가왔다. 정말이지 곱씹을수록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가끔 엉뚱한 고집을 부릴 때만 빼고는 말이다.

독경은 그 길로 군말 없이 주인을 찾아가, 헐값에 집을 사들였다.

어차피 쓸모없어 방치된 곳이었기에, 집주인은 이렇게라도 처분할 수 있어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선뜻, 집을 수리할 수 있는 공구까지 빌려주었다. 독경은 양손 가득 공구들을 들고 돌아왔다.

그사이 주인은 온 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기다란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쓰는 중이었다.

“왔어?”

주인이 다가오는 독경에게 알은체를 했다.

“생각해 보니까....”

그러고는 생각에 잠긴 채 허공에 날리는 먼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 내가 바닷가에 작은 카페를 열고 싶다고 했던 거 같은데.... 혹시, 기억하고 있었어?”

그 말에 독경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죠. 내가 이뤄 줄 거라고 했잖아요.”

“음, 그렇구나. 내 소원은 네가 이뤄 줬으니, 이번엔 내가 들어줄 차례네?”

주인이 어딘가 멋쩍게 제 치맛자락을 매만졌다. 분명 간질거리는 심장이 어색해 쭈뼛하는 중이리라.

“괜찮아요. 그냥 이렇게 옆에만 있으면 돼요. 또 도망가지 말고.”

그가 긴 다리를 접어 앉은 채 공구 상자를 뒤적이며 무심한 듯, 하지만 뼈가 있는 말을 던졌다. 그녀가 헛기침을 했다.

“그, 그래도 말해 봐.”

“음, 그럼....”

독경이 잠시 바다 쪽을 응시하며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름 부르게 해 줘요. 어차피 우리 동갑인 데다, 따지고 보면 이젠 선후배도 아니잖아요.”

“안 돼!”

그때, 단호한 음성이 귀를 후려쳤다. 그가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따졌다.

“아니, 소원 들어준다면서요? 안 해 줄 거면, 왜 물어요?”

그러자 주인이 손끝으로 자신과 상대를 번갈아 지목했다.

“난 8월생, 넌 11월생. 내가 더 빠르니까, 여러모로 선배가 맞지.”

“아니, 꼰대세요??”

독경이 황당한 마음을 가득 담아 외쳤다. 주인이 빙글빙글 웃었다.

“선배가 싫으면 누나라고 해도 돼. 그건 허락할게.”

“나 참.”

이 상황이 우스웠는지, 두 사람이 동시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기다 입을 열었다.

“11월생이면 전갈자리인가?”

“뭐가요?”

그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자리 말이야.”

“그런 거 믿어요?”

그 말에 주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왠지 너랑 잘 어울려서.”

독경이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벽에 못을 박기 시작했다.

“별게 다 잘 어울리죠?”

“그러게.”

그날 이후, 지루할 정도로 평온했던 마을에 새로운 볼거리가 생겼다. 주인과 독경이 집을 수리하고 단장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구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우르르 몰려와 그들이 하는 일을 지켜보다, 심심해지면 근처 공터에서 축구를 했다.

지긋한 중년의 남자들은 앞을 지나치다, 독경에게 일손이 필요해 보이면 다가와 거들고는 했다. 판자도 잡아 주고, 못도 박아 주고.

근처에 사는 할머니도 가끔 찾아와 직접 만든 음료를 건네고는 했는데, 주인이 번역기를 이용해 감사 인사를 하자 깔깔대며 웃었다. 아무래도 발음이 좀 이상한 모양이었다.

그 뒤, 그녀는 딸들과 함께 놀러 와 페인트칠까지 도와주었다.

***

마침내 완성한 집 앞에서, 두 사람은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들여다보며 주인은 마음에 앙금처럼 남은 사람을 떠올렸다.

“나, 윤희랑 원우 초대하고 싶어.”

그 말에 독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굵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안 그래도 그 말 하고 싶었어요. 여기서 결혼식 해요, 우리.”

그 제안에 그녀는 손수 청첩장을 썼다. 일단은 윤희와 원우에게.

“너도 한마디 적을래?”

주인이 옆에 붙어 앉아 제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구경하던 그에게 펜을 내밀었다.

“딱히 쓸 말 없는데요?”

“그럼, 그냥 와 주면 고맙겠다고 써. 사람이 성의가 있지.”

독경이 순순히 한 줄 써 넣고는,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고 나니, 연이어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이 비서님이랑 선하 씨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 두 사람에게도 알리는 게 예의 아닐까?”

“그러죠, 뭐.”

주인의 말에 독경이 수긍했다.

“그럼, 감사 인사도 할 겸 소식 전해야겠다. 참, 차 회장님은?”

“아, 그 영감님은 됐어요.”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잠시 망설이다 슬쩍 운을 뗐다.

“그럼, 최 대표님께는?”

“최지승??”

독경의 짙은 눈썹이 대번에 꿈틀거렸다. 불편한 심기가 역력한 얼굴을 보며, 주인이 빠르게 단념했다.

“역시, 좀 그렇지?”

“아니요, 알려요. 어차피 초대할 건 아니니까.”

얼굴을 기울이며 자신을 빤히 훑는 그녀를 향해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유부녀가 됐다는 걸 알아야, 더 이상 집적거리지 않을 거 아니에요.”

“이유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고마워. 이건 이따 오후에 부치러 가자.”

주인이 픽 웃으며 독경의 뾰로통한 뺨에 입을 맞췄다.

청첩장을 받은 윤희와 원우는 곧바로 연락을 주었다.

두 사람은 극구 사양했으나, 그녀는 그들에게 여행 경비를 제공했다. 먼 길을 올 사람에 대한 성의였다.

***

결혼식 당일, 손님 맞을 준비로 정신없는 카페 안으로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알로하셔츠를 입은 남녀가 들어섰다.

“현주인!!”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시원하게 울리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흰 손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묶은 주인이 문 앞을 바라보았다.

“윤희야! 원우야!”

주인이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아이고, 이것아!!”

윤희가 달려오는 친구를 부둥켜안으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주인도 그녀를 꼭 안으며, 원우와 눈인사를 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뒤이어 하얀 셔츠에 까만 슬랙스를 받쳐 입은 독경이 나타나 원우에게 악수를 청했다.

“하하, 멀긴 하더라.”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억센 손을 맞잡았다.

주인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많이 피곤하지? 배는 안 고프고? 간단히 먹을 거 준비했는데....”

그때, 윤희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일단, 그 전에 만날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눈을 또르르 굴리는 그녀를 보며, 주인과 독경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며 외쳤다.

“독경 형님, 주인 누님!!”

“유선하??”

독경이 뜨악하는 표정으로 역시나 알로하셔츠를 입은 채 해맑게 손을 흔드는 선하를 보았다. 그러나 주인은 그 너머를 보며 더욱 당황하고야 말았다.

“차, 차 회장님?”

그 말에 독경이 더더욱 경악에 물든 얼굴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얄궂은 표정을 한 노신사가 천천히 걸어왔다.

“이놈아, 말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뭐 그 덕분에 죽기 전에 지중해도 보고 좋긴 하다만....”

“여, 영감님이 여긴 어떻게...?”

망연하게 중얼거리는 그를 향해 선하가 악의 없이 웃었다.

“제가 알려드렸어요. 오시고 싶어 하시기에 안내 겸 수발 겸 따라왔고요. 여기 두 분은 비행기에서부터 친해졌고요.”

그가 윤희와 원우에게 손을 흔들자, 그들도 따라 웃으며 손짓을 했다.

“자 자, 일단 자리에 앉을까요? 마실 거 가져올게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독경을 대신해, 주인이 상황을 정리했다.

손님들이 탁자에 빙 둘러앉아 음료를 마시는 동안, 선하가 제 짐을 들고 왔다.

“제가 두 분께 전달할 것이 있습니다. 받은 미션이 또 있거든요.”

그가 가방에서 상자 두 개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탁자에 올렸다. 주인이 그것들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주시했다.

“일단, 이건 이 비서님이 주신 거예요. 결혼 축하드린다고, 행복하게 사시라고 전하셨어요.”

그 말에 독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인이 상자를 열자, 안에는 정갈한 잠옷 한 쌍이 있었다. 선하가 다시 다른 상자를 쑥 내밀었다.

“이건 최 대표님께서 주신 거!”

그 말에 독경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졌으나, 다른 행동은 없었다. 주인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자를 열자, 가볍고 튼튼한 식기 세트와 함께 작은 카드가 들어 있었다.

주인이 카드를 펴 읽는 동안, 독경이 등 뒤로 다가왔다. 내용은 단순한 축하 인사였으나, 그녀는 어쩐지 짠한 마음이 일었다.

상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것을 눈치챈 그가, 종이를 슥 가져가더니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때마침, 윤희가 입을 열었다.

“자, 선물 증정식도 끝났으니 본 식을 시작하죠.”

그러자 차 회장이 두 사람 앞에 은근슬쩍 섰다.

“이럴 줄 알고 내가 주례사를 써 왔지.”

“애초에 부탁한 적이 없는데....”

독경이 어이없다는 양 중얼거리자, 주인이 옆구리를 콕 찌르며 상냥히 웃었다.

“그럼, 저희야 영광이죠.”

차 회장의 주례사는 끔찍하게도 길고 지루했다.

독경은 대놓고 툴툴거렸으나, 주인은 열심히 경청했다. 그리고 하객들은.... 여독을 이기지 못해 잠들었다. 간신히 눈을 뜬 윤희가 다급히 소리쳤다.

“이제 반지 교환식을 합시다!!”

“네네, 그럽시다!!”

원우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럼, 이제 신랑 신부의 반지 교환식이 있겠습니다!”

선하가 어느새 앞으로 나오더니 진행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잠시 빼놓았던 반지를 서로의 손에 끼워 주었다.

사회자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두 분은 서로에게 준비한 선물 없어요?”

그 말에 주인이 수줍게 미소 지었다.

“음, 난 이 카페를 결혼 선물로 받았어요.”

“그럼, 형님은요?”

선하의 물음에 그도 빙긋 웃으며 맞은편에 시선을 던졌다.

“나도 이미 받았는데?”

“뭔데? 뭔데?”

윤희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재촉했다. 독경이 주인의 뺨에 살포시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렇지, 주인아?”

미풍처럼 보드랍고 따사로운 부름에 하객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오직, 차 회장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해도 뭐 어떤가.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이 행복해 보이면 그만인 것을.

그가 껄껄 웃으며 손뼉을 치자, 다른 이들도 덩달아 환호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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