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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74화 (74/76)
  • #74화. 구원 (2)

    남자가 거침없는 발길로 건물 안에 들어섰다. 한 여자가 들어오는 손님에게 먼저 알은체를 했다.

    “앗, 어서 오세요.”

    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이십 대 중반쯤의 여자가 빵을 집던 손을 툭툭 털며 물었다.

    “한국분 맞으시죠? 여기서 묵으실 거예요?”

    “네.”

    남자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짤막하게 답했다.

    “예약은 하셨나요?”

    여자가 투숙객 명단으로 보이는 종이를 찾아 뒤적거렸다.

    “아니요, 안 했습니다만.”

    상대의 뜻밖의 답변에 그녀가 고개를 슥 들더니,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한국분이 여기까지 오시는 경우가 드문데, 예약을 안 하셨다고요?”

    “네, 방 없습니까?”

    남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약간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잠깐만요, 저도 여기 묵는 사람이라 잘 모르거든요. 직원 언니 불러 드릴게요.”

    여자가 당황한 듯 손을 내젓고는, 뒷문 쪽으로 몸을 휙 돌렸다.

    반쯤 열린 문 너머의 공터에서 직원으로 짐작되는 다른 여자가 새하얀 침대보를 널고 있는 광경이 그의 시야에 설핏 잡혔다.

    “아, 그럼 제가 가 보죠. 식사 마저 하십시오.”

    남자가 빙그레 웃고는 뒷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었다. 여자가 그의 너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식탁으로 되돌아갔다.

    그가 뒷문을 열고 나오자, 상쾌한 바람이 새카만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오후의 노란 햇살이 언덕 아래 펼쳐진 들판을 따사롭게 물들이고 있었다. 남자가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었다.

    상대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침대보를 빨랫줄에 걸쳐 놓고는 야무진 손길로 주름을 펴고 있었다.

    탐스러운 그녀의 머리카락도 바람결에 흩날렸다.

    여자가 침대보 하나를 다 널고 다른 하나를 바구니에서 막 집으려는데, 넘실대는 천 너머로 운동화를 신은 발이 빼꼼 보였다.

    그녀가 굽혔던 허리를 펴며 침대보 너머로 일렁이는 인영을 보았다.

    새하얀 천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외관으로 보아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남자 같았다. 여자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나도 낯익은 체형이었던 탓이다.

    그녀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무, 무슨 일로 오셨나요...?”

    “여기서 며칠 묵고 싶습니다.”

    깊은 우물에서 퍼 올린 것 같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오후의 공기 속으로 나른하게 스며들었다. 여자의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세차게 동요했다.

    “아, 어떻게 여기에...?”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침대보를 붙들었다.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 모른 척 외면해 볼까, 아니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웃어 보이면 어떨까...?

    하지만 그 모든 행동이 다 부질없다는 사실을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그때, 남자가 머뭇거리는 작고 하얀 손을 제 손으로 덥석 잡더니 천을 확 걷어 버렸다. 무대 위 장막이 열리는 것처럼 시야가 탁 트이자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 이독경....”

    주인이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침음을 삼켰다. 독경이 앞으로 성큼 다가서며 미소를 씩 그렸다.

    “오랜만이에요, 선배.”

    그토록 그리웠으나 떨치려 애썼던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황망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술을 들썩일 뿐.

    “어떻게, 여길...?”

    “말했잖아요, 선배가 어디에 있든 난 다 찾을 수 있다고....”

    그가 가냘픈 몸에 제 커다란 몸을 바짝 들이밀며 답했다. 그러고는 당혹감과 반가움이 동시에 뒤섞여 혼란스러운 커다란 눈망울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주인의 까만 눈에 웃음기를 머금은 자신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

    이 광경 하나를 보려고 독경은 자신이 쥔 부와 명예, 그 모든 것을 내던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것들은 이미 처음부터 저 눈동자를 갖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으므로.

    독경은 만족스러운지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전부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고는 두툼한 손바닥으로 그녀의 마른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새 또 말랐네. 내가 보고 싶었나 보다.”

    뻔뻔하게 지껄이는 소리에도 주인은 기가 막히지 않았다. 대신, 순순히 시인했다. 어쨌건 그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맞아, 그랬나 봐.”

    “그러니까 왜 떠났어요? 이렇게 말라갈걸....”

    그가 투정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그녀가 자조로 가득 찬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을 꿈꾼 대가였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주인도 독경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너무 먼 길을 돌아왔지만, 그런데도 후회하지는 않았다. 고난이 두 사람의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엮어 주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독경이 주인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슬며시 빼 제 손에 쥐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젠 도망치지 마요. 결혼해요, 나랑....”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청초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러나 입가는 대조적으로 얄궂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너답지 않게 너무 고전적인 청혼 같은데? 설마, 몇 년 동안 고민한 결과가 이건 아니지?”

    그 말에 그가 입술을 샐쭉하게 내밀며 투덜거렸다.

    “원래, 클래식은 영원한 법이에요.”

    주인이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그린 표정으로 살포시 손을 내밀었다. 희고 고운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며 독경이 다시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엔 내 식대로 청혼할게요. 현주인은 손가락이 잘릴 때까지 이 반지를 절대로 뺄 수 없어요. 두 눈이 뽑히기 전까진 나만 바라봐야 해요. 그리고....”

    살벌하다 못해 꽤 잔인하기까지 한 청혼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주인이 제 입으로 그의 입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독경이 흡족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녀의 목덜미를 제 손으로 꽉 붙잡았다. 이제는 도망갈 수 없게, 영원히 자신 곁에만 머물게.

    그날 모두가 잠든 한밤중, 깜깜하고 고요한 숙소 복도를 주인이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그러고는 곧장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복도 맨 끝 방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서서히 문이 열리고 독경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방 안에서 새어 나온 조명 빛이 상기된 두 사람의 얼굴을 달빛처럼 그윽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깊은 밤 자신을 찾아온 은밀하고도 관능적인 손님을 가는눈으로 바라보며 음험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가 도발적으로 치켜뜬 눈을 빛내며, 혀끝으로 가볍게 입술을 축였다.

    “들어가도, 될까?”

    “기꺼이.”

    독경이 긴 팔을 죽 뻗어 그녀의 뺨을 뭉근하게 어루만지더니, 이내 가는 손목을 꽉 잡아당겼다.

    주인이 갈급한 욕망이 느껴지는 손에 빨려들 듯 안으로 사라지자, 문이 닫히고 복도에는 고독감이 짙은 암흑만이 남아 그들의 밀회를 감춰 주었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두 사람이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만이 흐릿하게 흘러나왔다.

    ***

    몇 달 뒤, 퇴근한 윤희는 신혼집 우편함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국제 우편이었다.

    “원우한테 온 건가?”

    그녀가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봉투를 요리조리 살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확인해도, 자신에게 온 것이 분명했다. 수신자 이름이 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며, 윤희가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원우야, 나 이상한 편지 받았어!”

    먼저 도착해 저녁을 준비하던 원우가 현관 쪽으로 고개를 쑥 내밀며 물었다.

    “뭔데? 행운의 편지?”

    “몰라! 모르겠는데, 일단 뜯어볼래.”

    성질 급한 그녀가 거침없는 손길로 봉투를 쭉 찢었다. 그가 어느새 등 뒤로 다가와 호기심 어린 눈길로 구경했다.

    봉투 안에는 한 장의 카드와 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새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하얗게 페인트칠이 된 소박한 카페가 있었는데, 그 앞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한 명은 앞치마를 두른 채 옆 사람에게 머리를 기댄 여자였고, 다른 한 명은 그녀의 어깨를 굵직한 한 팔로 느긋하게 감싼 남자였다.

    두 사람 모두 정면을 향해 활짝 웃고 있었는데, 퍽 편안하고 즐거운 표정이어서 보는 사람이 다 흐뭇해졌다.

    “아!!”

    한참 말없이 사진을 들여다보던 윤희가, 울렁거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카드를 읽었다. 무척이나 익숙한 글씨체로 쓰인 편지였다.

    「사랑하는 내 친구, 윤희야.

    이렇게 너에게 편지로나마 연락을 할 수 있어 무척 기쁘구나. 난 아주 잘 지내고 있어. 내 인생에 지금처럼 행복한 순간이 또 있었나 싶을 만큼.

    그때, 너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서 미안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도. 하지만 마음만은 늘 너와 함께였다는 것을 믿어 주면 참 고맙겠단다.

    내 소중한 친구 윤희야, 염치없고 갑작스럽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나와 이독경의 결혼식에 너희를 초대하고 싶어.

    윤희 너와, 원우가 이 결혼식의 유일한 하객이자 증인이란다.

    아무것도 바랄 게 없는 이 순간 단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우리와 역사를 함께한 너희에게 축복을 받고 싶다는 것뿐이야.

    부끄럽고 미안하지만 꼭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주면 고맙겠어. 연락 기다릴게.

    추신. 꼭 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에 덧붙인 추신은 위와 달리, 무척이나 굵직한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누가 쓴 것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이, 이... 나쁜 년....”

    윤희가 북받치는 서러움에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뚝뚝 떨궜다. 떨리는 어깨를 원우가 가볍게 끌어안았다.

    “울지 마, 좋은 소식이잖아. 가서 신나게 축하해 주자, 우리.”

    원우의 상냥하고 따뜻한 위로에 윤희가 아이처럼 눈물을 팡 터뜨렸다.

    “엉엉, 당연하지...! 꼭, 꼭 갈 거야...!”

    원우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등을 토닥이고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슥 닦아 주었다. 윤희가 그를 향해 배시시 웃더니, 이내 손에 든 사진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 안에서 주인과 독경이 두 사람과 눈을 맞추며, 푸른 바다 위 부서지는 햇살만큼이나 눈부시고 영롱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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