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73화 (73/76)
  • #73화. 구원 (1)

    “그래, 알겠다. 내가 지금 바로 그쪽으로 가지. 위치 보내.”

    [네네, 바로 보내드릴게요!!]

    경쾌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수화기를 뚫고 나오자, 곧장 전화를 끊은 독경이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을 뚫어지게 보았다.

    잠시 뒤, 도착한 문자를 확인한 그가 몸을 휙 돌려 멀뚱히 앉아 있는 지승에게 입을 열었다.

    “방금 하신 제안은, 감사하지만 받지 않겠습니다. 일이 정리되는 대로 저도 사임할 생각이거든요. 현 상무님께 전해 주십시오. 제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라고요. 그리고 절 오해하신 대가도 톡톡히 치르셔야 할 거라고요.”

    “네? 그게 무슨....”

    지승이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입만 벌리고 있자, 독경이 외투를 손에 들며 그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꽤 성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오늘 미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다부진 등에서, 어쩐지 지승은 눈을 뗄 수 없었다.

    독경은 전자 상가 내부의 비좁고 기다란 복도 끝에 쪼그려 앉아 있는 선하를 발견했다.

    그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금이 간 휴대 전화 액정을 빤히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간절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야, 제발 열려라....”

    “유선하!”

    독경이 그를 불렀다. 그러고는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호흡을 거칠게 내뱉었다. 미약하기는 하지만 뺨도 조금 상기돼 있었다.

    “아, 형!”

    선하가 형님이 아닌 형으로 불렀건만, 그는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다는 양 작은 기계로 재빨리 손을 뻗었다.

    “간신히 살리긴 했는데, 비번이 걸려 있어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독경은 자신이 알고 있던 비밀번호를 망설임 없이 눌렀다. 하지만 그날 이후, 번호를 바꿨는지 잠금은 풀리지 않았다.

    “아!”

    독경이 헝클어진 앞머리를 마디가 굵은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허공을 가만히 노려보며 혼잣말을 했다.

    “비번이라, 비번....”

    그는 마치 복잡한 미로 속을 헤매는 것처럼 주인의 머릿속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만약, 자신이 주인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했을까? 독경은 실타래를 풀 듯 그녀의 생각과 행동을 천천히 따라갔다.

    그는 늘, 그녀와 자신이 닮았다고 믿었다. 물론, 주인이 들었다면 전혀 동의하지 않을 견해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다 불현듯, 어떤 가설 하나가 심연에서 불쑥 튀어 올랐다. 독경이 빠른 손놀림으로 번호를 꾹꾹 눌렀다.

    “대박!!”

    뒤에서 지켜보던 선하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제야 잠금 화면이 풀렸던 것이다.

    “비밀번호가 대체 뭐였어요?”

    “계약 만료일....”

    “아....”

    어떠한 감정도 실리지 않은 답변에, 오히려 선하가 낮게 탄식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번호를 누를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을 테니까....”

    독경은 자신들의 계약 마지막 날을 비밀번호로 하나씩 누를 때마다,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으며 계획을 검토하고 실행해 나갔을 섬세한 옆얼굴을 떠올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보다 훨씬 지독하게 끈질기고 고집스러운 성정이었다.

    그가 밀려드는 상념을 재빨리 몰아내며, 휴대 전화에 집중했다.

    “이메일! 메일 계정으로 들어가 봐요. 보통 열차나 비행기 표 예약은 메일로 확인하니까!”

    맞는 말이었다. 독경은 곧바로 주인이 자주 사용하던 메일 계정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계정은 아직 자동 로그인 돼 있었다.

    그러나 휴지통까지 말끔히 뒤져 봐도 광고 메일 외에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벌써 다 삭제했나?”

    선하가 자신의 밝은 갈색 머리를 벅벅 긁다, 쥐어뜯기를 여러 번 반복하며 어떻게든 활로를 모색했다.

    “아, 그래요! 카페나 블로그 같은 거 있잖아요. 거길 볼까요? 아니면 주인 누님 SNS는 어때요?”

    “딱히, 그런 걸 하진 않아 보였는데....”

    독경이 저답지 않게 몹시도 위축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아이고, 형님! 이러다 주인 누님 못 찾겠어요!!”

    선하가 과장되게 앓는 소리를 했다. 그러자 독경이 도끼눈을 부라렸다.

    “시끄럿!!”

    독경이 다시 전화나 문자 항목 등을 눌러 보며, 작은 기계 안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여전히 특별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그는 우연히 사진 목록을 열었다. 그 안에는 온통 업무와 관련된 자료들뿐이었다.

    “주인 누님, 완전 일 중독자.... 형님이랑 똑같네요....”

    선하가 질린 얼굴로 혀를 내두르며 독경과 휴대 전화를 번갈아 보았다. 그 순간, 어떤 사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어? 이건....”

    그가 손으로 가리킨 사진을 독경이 꾹 눌러 크기를 키웠다. 그것은 윤희, 원우와 함께 놀이공원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이걸....”

    독경이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을 그는 잊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은 윤희에게 부탁해 간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십 대 초반의 두 사람은 지금보다 훨씬 앳된 얼굴로 풋풋한 미소를 지으며, 나란히 서 있었다.

    “와, 두 분께도 이런 시절이....”

    선하가 신기한 눈초리로 사진을 유심히 관찰했다. 무안해진 독경이 재빨리 다음 사진으로 넘겼다.

    그러자, 푸른 언덕 위에 이국적인 외관의 아담한 건물 한 채가 서 있는 풍경 사진이 액정을 가득 채웠다.

    “오, 여기 예쁘네요. 어디지?”

    선하가 별 뜻 없이 순전한 감상을 드러냈다.

    그때, 가로로 곧게 뻗은 눈이 급격하게 커지며 기이한 빛을 내뿜었다. 독경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더니, 서늘하게 읊조렸다.

    “찾았다!”

    그는 그 사진을 곧장, 제 비서에게 전송해 위치를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소 하나를 보내왔다. 포르투갈의 소도시에서 한인이 운영하는 작은 민박이라는 설명과 함께였다.

    독경은 본능적으로 확신했다. 이 넓디넓은 세상 반대편 끝 낯선 나라 어딘가에, 제가 찾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경계심 많은 사냥감이 혹여나 눈치를 채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하므로. 독경은 곧장 민첩하게 행동했다. 그의 마지막 사냥이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

    그 무렵, 주인도 독경의 소식을 접했다. 지승의 연락을 받기 위해 임시로 만든 계정으로 이메일이 왔기 때문이었다.

    지승은 독경이 결국,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러고는 다들 많이 걱정하고 있으니, 연락을 바란다는 간곡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답장을 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 결국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쑥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잡념을 털어 버리려는 듯, 불어오는 미풍에 제 머리를 맡겼다.

    그러자 이제는 제법 길어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포시 나부꼈다.

    어차피 인터넷도 잘 터지지 않는 곳이라 메일도 간신히 확인했으니, 굳이 답장을 하지 않아도 되리라.

    “이독경....”

    주인이 아련하게 그 이름 석 자를 입안에서 굴렸다.

    기어이 그는 자신을 찾아 나설 모양이었다. 나름 흔적을 지운다고 노력했는데, 집요한 사냥개가 어디서 어떻게 단서를 발견할지 모를 일이었다.

    “여길 떠야 하나?”

    그녀가 이제 막, 익숙해지기 시작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따스하지만 적막함이 감도는 분위기가 그의 품을 떠올리게 해서, 퍽 정이 든 곳이었다.

    주인은 떠나기 싫어 하염없이 뒤를 돌아보았던,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을 떠올렸다.

    이렇게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자리에, 그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그러나 독경의 왼쪽 어깨를 만질 때마다 손끝에 남는 상처의 까슬한 촉감이 미욱한 감상에서 스스로를 일깨웠다.

    그의 몸에 난 모든 상처는, 그녀로 인해 생긴 것들이었다.

    그 상처들은 주인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자신과 함께 있으면 독경은 늘 다치고 깨질 것이라고. 그리고 마침내, 불행해질 것이라고.

    주인을 너무나 사랑해서 제 몸을 아끼지 않는 사냥개는 언젠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지도 몰랐다. 마치 강석처럼 말이다.

    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쓸데없이 비관적인 기분에 젖을 때는, 그저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것이 최고의 해결책이었다.

    주인이 바지를 툭툭 털며 일어서서는 빨랫감을 찾으러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주말까지는 예약한 손님이 없어 여유로운 데다, 마침 날씨도 좋으니 침대보를 말리기에 제격이었다.

    그사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생각을 정리하고, 이곳을 떠날지 말지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

    이틀 뒤 새벽녘, 리스본 공항에 다부진 체격의 동양인 남자가 도착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새카만 머리카락을 이마까지 살짝 늘어뜨린 남자는 연한 카키색 티셔츠에 어두운색 하의를 입고 있었다.

    남자는 한쪽 어깨에 아무런 무늬도 로고도 없는 까만색 가방을 무심히 걸치고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느긋하게 걸었다.

    그 모습이 얼핏 보아서는 스물을 갓 넘긴 청년 같았다.

    하지만 예리한 눈매와 날렵한 턱 선에서 온갖 세월의 풍파를 겪은 자의 결기 같은 것이 엿보였다.

    남자는 곧장, 다른 도시로 향하는 낡은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너른 어깨도 같이 흔들렸다.

    그는 온화한 남유럽의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이국적인 창밖 풍경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구경했다.

    어느새 나직이 콧노래까지 부르던 남자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장단에 맞춰 왼 손가락으로 창틀을 두들겼다.

    톡, 톡.

    마디가 굵직한 왼손 약지에는 모양이 단순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는 고된 여행길임에도 지치지도 않고 우직하게 이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기지개를 한 번 쭉 켜고는 가방을 고쳐 멘 뒤 발걸음을 서둘렀다.

    남자의 눈앞에는 손바닥보다도 작은 휴대 전화 화면에서 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낮은 언덕 위에 고즈넉이 자리한 이국적인 집 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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