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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72화 (72/76)
  • #72화. 오몽 (3)

    주인은 공식 메일을 통해서 현태성 회장 일가의 방만한 경영과 도덕적 해이에 자신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며, 사임의 변을 밝혔다.

    실제로 회사 내외부에서도 주인이 직을 유지하는 이상, 총수 일가의 영향력이 아직 건재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었다.

    어쨌든 그녀 또한 현씨 가문의 일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표면적으로 이를 의식해 사퇴하는 것처럼 포장했다. 사실은, 처음부터 모두 계획된 수순이었지만 말이다.

    “다만,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회사를 떠나게 돼 남은 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모쪼록 임직원 여러분들께서 힘을 합쳐 이 위기를 현명하게 극복해 나가시기를 멀리서나마 기원하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선하가 낭랑한 목소리로 메일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비통함에 잠겼다. 이신도 그와 비슷한 심정으로 묵묵히 서 있었다.

    오직, 독경만이 속을 알 수 없는 무심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먼 하늘을 응시할 뿐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떠나실 수 있죠? 주인 누님, 너무 매정하신 거 아닌가요?”

    선하가 원망을 가득 담아 분통을 터뜨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친절하고 다정한 그녀에게 친근함을 느꼈던 터라 서운함은 더욱 컸다.

    이신이 그런 상대를 눈짓으로 제지했다. 지금 이 순간 배신감에 가장 치를 떨 사람은 자신들이 아니라, 독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예상보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 비서님, 아직입니까?”

    “현 상무님의 업무용 노트북과 펜트하우스에 있는 PC 기록을 다 뒤져 봤는데, 특별히 발견된 건 없었습니다.”

    이신이 송구함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하가 동그란 눈을 천진하게 깜박이며 물었다.

    “독경 형님, 주인 누님 찾으실 거예요?”

    독경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에게 숨 쉬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결론이었으므로.

    “음, 혹시... 주인 누님 폰에는 기록이 남아 있으려나...?”

    선하가 제 턱을 가볍게 매만지며 곰곰이 궁리했다. 독경이 긴 눈을 가늘게 떴다. 설명을 요구하는 날카로운 시선에, 그가 더듬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음, 그게.... 주인 누님 납치됐을 때, 주차장에서 부서진 폰을 발견했다고 했잖아요.... 혹시 몰라서 그걸 제가 계속 보관하고 있었거든요....”

    어리바리한 것처럼 보여도 자신 밑에서 몇 년을 스파이로 구른 놈다웠다. 독경이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낸 채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잘했다! 복구할 수 있겠지?”

    처음으로 칭찬다운 칭찬을 받은 선하가 기쁨에 들떠 어쩔 줄 몰라 하며 외쳤다.

    “한번 해 볼게요! 전문가분을 알아요!”

    독경은 약간의 기대감을 품었다. 부서진 휴대 전화를 복원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아주 작은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몰랐다.

    부서진 전화기까지 챙길 만한 정신은 없었던 것이 분명한 모양이니, 어떻게든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이신과 선하가 떠나고 홀로 남은 그가 마른 뺨을 커다란 손으로 쓸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이 사라진 후, 독경은 매 순간 자신이 조금씩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당연하게도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마지막에 볼 풍경 안에 그녀가 없다는 사실이 서글플 뿐이었다.

    맑은 윤기가 반질반질 감도는 검은 눈에 딱 한 번만 제 얼굴을 오롯이 비출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리라.

    “야, 이독경!!”

    그 순간, 뜻하지 않은 손님이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며 그의 상념을 방해했다. 작은 키에 사나운 인상을 한 여자는 씩씩거리며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 뒤로 안경을 쓴 얼굴이 허여멀건 남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은 채, 연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거, 뭐야? 현주인 어디 있어? 왜 연락 안 돼?”

    여자는 독경의 코앞에 단정한 글씨체로 정성스레 쓰인 카드를 불쑥 내밀었다. 그가 카드를 순순히 받아 들어 읽었다.

    그 안에는 결혼식에 불참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앞날에 대한 축복이 담겨 있었다. 낯익은 글씨체에 독경은 심히 속이 아렸다. 그것은 주인이 손수 쓴 카드였다.

    “이 계집애 왜 못 온대? 연락은 또, 왜 안 받고?”

    윤희가 그렇지 않아도 올라간 눈꼬리를 더욱 치켜떴다. 독경이 어울리지 않게 맥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몰라요.”

    “뭐?”

    그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가 상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라졌거든요....”

    “잠깐,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 주인이가 사라지다니? 너한테도 아무 말 안 하고? 그럼, 너도 주인이가 어디 갔는지 모른단 말이야?”

    한 발 떨어져서 사태를 지켜보던 원우가 느닷없이 앞으로 나서며 질문을 와르르 쏟아 냈다. 새하얀 얼굴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미친.... 현주인, 내 이걸 그냥....”

    그사이 빠르게 사태를 파악한 윤희가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이를 꽉 물었다.

    “어휴, 못된 년! 언젠가 한번 사고 칠 줄 알았어! 어쩐지 얌전히 있는 게 불안하더라니....”

    그녀가 사무실 안을 제집처럼 거침없이 서성이며 욕설을 한 바가지 퍼붓더니, 갑자기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도전적인 눈빛으로 독경을 쏘아보았다. 상대의 마음을 읽으려는 듯도 하고, 스스로 결심한 듯도 한 오묘한 눈길이었다.

    이윽고 윤희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찾을 거지?”

    “네.”

    독경이 짤막하지만, 단호하게 대꾸했다.

    “반드시 데려와! 머리를 빡빡 밀든 다리를 부러뜨리든, 그건 나한테 맡기고.”

    여자 친구, 아니 예비 신부의 과격한 발언에 원우는 입을 벌리며 당황했다. 그러나 독경은 동의한다는 양 고개를 가볍게 까닥였다. 마음 같아서는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그였다.

    윤희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격려하고는 훌쩍 나가 버렸다. 원우가 쭈뼛거리며 그녀를 따라가다 슬쩍 뒤돌아 인사를 건넸다.

    “얼굴 많이 상했네. 건강 잘 챙기고.”

    “네, 결혼식 때 뵙겠습니다.”

    독경이 깍듯이 배웅하며 말했다.

    ***

    지승은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에 앉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이독경이라는 남자를 안타깝게 여길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극히 타당했다. 마주 앉은 남자는 언제나 오만해 보일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고, 방만하다 느낄 만큼 여유가 흘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의뭉스러운 눈빛과 냉소적인 입가와 야만적인 턱 선이 빛바랠 만큼, 초췌한 얼굴로 자신을 맞을 줄이야!

    그는 몰라보게 야윈 채 생기를 잃은 독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따가운 시선을 감지한 상대가 서류에서 눈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메마른 독경의 얼굴은 전보다 더 날카롭고 예민해 보였다.

    “무슨 일로 만나자고 하셨습니까?”

    그가 까칠한 어조로 묻자, 지승은 자신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상대를 관찰하고 있었음을 깨닫고는 멋쩍게 웃었다.

    “아, 현 상무님 얘기 들었습니다.”

    “쯧, 직원들 입단속 좀 시켜야겠네요.”

    그 말에 독경이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지승이 슬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잊으신 모양인데, 어쨌든 저도 아직은 태성과 협업 중입니다. 내부 사정은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단 뜻이죠. 그리고 현 상무님이 부탁하신 일도 있고....”

    마지막 발언에 독경이 미간을 팍 찡그렸다.

    “선배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까?”

    싸늘하게 노려보는 눈길에 지승은 속으로 움찔했다.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는 어떤 사달이 날지 몰랐다.

    어떻게든 털을 바짝 곤두세운 상대를 진정시키고자, 그가 신중하게 입술을 뗐다.

    “그런 건 아닙니다. 저한테도 당분간 쉬고 싶다고 했을 뿐, 다른 말을 하진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독경이 난폭했던 기세를 약간 누그러뜨렸다. 그 틈을 타 지승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현도경 상무께서 김 본부장에게 총괄 직을 제안하셨습니다. 조직 개편이 완전히 마무리된 뒤에도 태성에 남으셨으면 좋겠다고요. 원하시면 바로 이사회에 추천을....”

    그 말에, 독경은 주인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했다.

    그녀는 그를 강석처럼 살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현 회장의 그늘 아래서 떳떳하지 못한 일만 하다, 개죽음을 당한 남자.

    주인은 그와 같은 전철을 제 사냥개가 밟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근사한 정장을 차려입고, 새빨간 스포츠카를 몰며, 고급 레스토랑에서 아리따운 여성들과 데이트를 즐기는....

    많은 이가 부러워하는 그 삶을, 그녀는 지속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미래 안에 주인은 없었다. 독경은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진짜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선심이라도 쓰듯 높은 자리를 덥석 안기는 그 심보가 고약하고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마지막까지 못됐네.”

    독경이 치밀어 오르는 분을 삭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직이 읊조리는 그 말을 미처 듣지 못한 지승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네? 지금 뭐라고....”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때, 독경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잠시, 통화 좀 하겠습니다.”

    그가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윙윙 울리는 휴대 전화를 한 손에 든 채,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독경이 통화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곧장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엘리자베스 복구됐어요!!]

    “엘..., 뭐?”

    그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는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자 상대가 조그맣게 탄식한 뒤, 말을 정정했다.

    [아차! 핸드폰이요, 핸드폰. 주인 누님 거!!]

    해맑은 선하의 목소리가 호기롭게 독경의 귓가에 닿았다. 그 순간, 그를 멀거니 보고 있던 지승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초점 없이 멍하던 눈동자가 활력으로 번뜩이는 것을. 축 처져 있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가는 것을. 내내 잠겨 있던 목소리가 기쁨으로 들뜨는 것을, 똑똑히 지켜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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