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자멸 (2)
사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현태성 태성그룹 회장은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검찰에 소환됐다.
그는 휠체어에 오른 채 기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쇠약한 몰골로 포토라인에 섰다.
그 광경을 접한 사람들은 철 지난 수법이라며 손가락질했지만, 실제로 그의 건강은 매우 악화된 상태였다.
여러 악재가 겹치며 스트레스가 쌓인 데다, 아들인 현상현 부회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결정적으로 큰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그러나 현 회장은 확실한 증거가 여럿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그가 가진 인맥이 마지막으로 힘을 발휘한 것이었다.
주인은 결과를 지켜보며 뒷맛이 씁쓸했으나, 그가 더 이상 그룹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
계절은 어느덧 여름을 지나 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주인은 부친이 요양 중인 강원도 인근 별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홀로 조용히 방문하고 싶었으나, 독경이 바득바득 따라오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동행하는 길이었다.
“앞으로는 절대, 혼자 다니지 마요!”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독경이 다짐이라도 받아 내려는 듯 단호하게 외쳤다.
“이젠 그렇게 조심하지 않아도 돼.”
그녀가 무신경한 어조로 받아쳤다. 그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글쎄, 안 된다니까! 앞으로 혼자 다니면 내가 가만 안 있을 거예요.”
“가만 안 있으면? 어쩔 건데? 다리라도 부러뜨릴 거야?”
주인이 픽 웃으며 장난스럽게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나 정작 독경은 진지하다 못해 심각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내가 선배한테 어떻게 그래요.... 대신, 저 녀석 손가락을 부러뜨릴 거예요. 한 번에 하나씩!”
그가 두 눈을 서슬 퍼렇게 빛내며, 운전석에 앉은 선하의 뒤통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도, 독경 형님??”
선하가 제 등 뒤에 꽂히는 따끔한 시선에 흠칫 몸을 떨었다. 주인이 독경의 무르팍을 손으로 탁 치며 나무랐다.
“농담하지 마! 선하 씨 놀랐잖아.”
“농담 아닌데요?”
그가 빙글빙글 웃으며 제 무릎에 올린 그녀의 손에 은근슬쩍 깍지를 끼었다.
주인과 독경은 한적한 시골과는 어울리지 않게 으리으리한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막 거실에 발을 내딛는데, 어디에선가 앙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년이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대체 누가 저년한테 문 열어 줬어??”
갑작스럽게 달려 나온 박은아가 교양미 넘치는 외모와는 대조적인 험한 말을 입에 올리며, 제 딸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았다.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참 뻔뻔하기도 하지! 당장 나가! 안 나가면 사람 부를 거다.”
주인이 힘든 일이라고는 일절 해 본 적 없을 곱디고운 얼굴로 악다구니를 쓰는 제 모친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불쌍한 여자였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왕관을 머리에 이고 있느라 늘 조바심 내던 가엽고 어리석은 사람....
그러나 오늘 이곳까지 온 목적은 그녀가 아니었다. 주인이 제 모친을 본체만체하며, 거실을 가로지르더니 한 문 앞에 우뚝 섰다.
그녀의 정면에는 크고 단단한 문이 고집스럽게 닫혀 있었는데, 그 너머에 누가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제 말 듣고 계신 거 알아요. 그룹 측에선 아버지를 명예 회장으로 충분히 예우해 드릴 겁니다. 여생을 보내시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거예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회사 일에 간섭하시려 들면, 그땐 지금처럼 쉽게 끝나지 않을 겁니다. 아직, 제가 가진 자료에 반도 꺼내지 않았거든요. 잘 처신하시리라 믿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벽 너머에서 유리가 깨지는 것같이 쨍그랑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제 부친이 치밀어 오르는 분을 이기지 못해 성질을 부린 것이리라.
곧이어 박은아도 온몸을 부르르 떨며 딸을 향해 거칠게 삿대질을 했다.
“너, 지금 회장님께 협박하는 거니? 이게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그때, 멀찍이 서서 상황을 주시하던 독경이 천천히 걸어오며 중저음의 굵직한 음성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다, 현태성 회장님께서 자초하신 겁니다. 일이 이 지경까지 오도록 여사님께선 뭘 하셨죠? 딸 하나 제대로 보호해 주지도 못하고, 남편이 나쁜 일을 하는 걸 막지도 못하고.... 그저 손만 놓고 계셨잖아요. 인정하기 싫겠지만, 당신도 공범입니다. 이제 함께 책임지셔야죠.”
초면의 젊은 남성에게 매서운 질타를 받자, 박은아는 위협감이 들었는지 하얗게 질린 입만 뻐끔거렸다.
주인이 현관문 쪽으로 뒤돌아서며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계세요. 이제 찾아올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시고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박은아를 오시하던 독경도 그녀를 따라 차갑게 돌아섰다.
***
“오늘 뭐 할 거예요?”
며칠 뒤, 독경이 각진 턱을 오만하게 치켜든 채 두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말투는 무심했으나, 관심은 온통 코앞의 여자에게 쏠려 있었다.
“글쎄....”
주인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넥타이를 고르고는 셔츠 깃 안으로 넣으며 말끝을 늘였다.
“음, 너무 밝은가?”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목덜미를 유심히 관찰했다. 독경이 한쪽 눈썹을 불만스럽게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유선하 족치면 일정 나올 테니, 그쪽을 공략해 봐야겠네요.”
“맙소사! 어쩜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야? 주변 사람들한테 잘하라니까!”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넥타이 매듭에 힘을 주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난, 선배한테만 잘하면 된다니까요.”
난데없이 훅 들어오는 수작질에 주인의 뺨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그래도 선하 씨한테 잘해 줘. 널 따르는 게 너무 기특하단 말이야....”
“네네, 노력해 볼게요.”
독경이 짓궂게 웃으며 성의 없이 반응하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일정은?”
“음.... 오전에는 임원 회의 있고, 오후에는 최 대표님 만날 거야.”
주인이 마지막으로 넥타이와 옷깃을 정돈하며 대꾸했다. 독경의 눈살이 대번에 꿈틀거렸다.
“최 대표면 최지승? 그 인간은 왜 자꾸 만나는 거예요?”
“그렇게 화내지 마. 회사 일 때문이니까.”
이미 반응을 충분히 예상한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응수하며, 그를 거울 앞에 세웠다. 그러고는 거울 속에서 불퉁하게 볼을 부풀리는 남자를 보며 상큼하게 웃었다.
“너무 밝은 거 아닌가 싶었는데, 잘 어울리네. 멋있다. 근사해.”
상대의 칭찬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거기에 넘어가는 스스로가 미련했는지, 독경은 하늘로 치솟으려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투덜거렸다.
“나 참, 선배가 골라 주는 건 다 맘에 드는데....”
“드는데?”
“그 자식은 싫어요.”
“그 자식이 아니라, 최지승 대표라고 몇 번 말할까?”
주인이 그를 짐짓 흘겨보았다. 독경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마지못해 허락했다.
“회사에서만 보는 거 맞죠? 장소 옮기지 말고 만나요, 그럼. 하지만 오래는 안 돼요. 그리고 저녁도 비워 두고요.”
“저녁은 왜?”
그녀가 자신의 목에 가는 목걸이를 걸며 물었다. 그가 등 뒤로 다가와 목걸이 고리를 잠그고는, 새하얀 목덜미를 손등으로 슬쩍 쓸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요? 계약 마지막 날이잖아요.”
“알아....”
주인이 얼굴을 슥 돌려 감췄다. 그사이, 독경이 약간 들뜬 어조로 떠들기 시작했다.
“목표도 달성했으니, 축하해야죠. 그리고 재계약에 대해서도 논의를....”
그러자 그녀가 헛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쓸데없는 소릴.... 알겠어, 이따 저녁에 봐.”
“네, 저녁에 만나요.”
독경이 따라 웃으며 주인의 손바닥에 장난스럽게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연달아 터진 대형 사고에도, 태성그룹은 다행히 빠르게 안정화됐다.
현태성 회장은 이미 사업에서 손을 뗀 지 오래였고, 현상현 부회장 또한 해임 후 공백을 느끼지 못할 만큼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주인이 주도한 전사적인 조직 개편과 전문가들로 구성된 사장단 선임이 큰 효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각자의 사업 부문에서 신속하게 자리를 잡아 갔다. 동요하던 직원들도 점차 일상을 되찾았다.
업계와 언론은 위기 상황을 민첩하게 타개한 태성과 현주인에게 주목했다.
실상, 회생 불가 판정을 받은 기업이 이렇듯 금세 정상화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지승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보기에 태성은 폭풍의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온갖 악재에 휘말려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갑자기 신임 상무가 해임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더니, 현태성과 현상현 부자가 나란히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올랐다.
이것만으로도 아찔한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현의 사고 소식이 날아들었다.
마치 몇 년에 걸쳐 일어날 일들을 단 몇 주 사이에 압축해 겪은 것처럼, 충격과 당혹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정면으로 꿋꿋이 감내하고 있을 주인이, 지승은 몹시도 걱정됐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휴대 전화를 붙든 채 망설였다. 뭐라도 좋으니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연락이 부담스럽고, 힘이 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낙담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그녀에게서 연락을 받았을 때 그는 뛸 듯이 기뻤다.
이렇게라도 얼굴을 볼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구김 없는 미소를 띠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주인을 보며, 지승은 안도감과 반가움으로 코끝이 시큰거렸다.
“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 회의가 좀 늦게 끝나는 바람에....”
“아니요, 괜찮습니다. 별로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요.”
그가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뒷말을 이었다.
“...걱정, 많이 했습니다.”
어딘가 꽉 막힌 것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이젠 괜찮아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제가 몇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 연락드렸는데, 들어주시면 고맙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