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68화 (68/76)
  • #68화. 자멸 (1)

    독경의 커다란 등이 짧은 순간, 움찔거렸다. 그러나 비명은커녕 미미한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그저 짙은 눈썹을 슬쩍 찌푸리며 입술을 꾹 다물 뿐이었다.

    “내, 내 잘못이 아냐.... 이, 이건 너희가 자초한 거야.... 내 탓이 아니야, 아, 아니라고....”

    상현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들을 더듬거리며 내뱉더니, 주춤주춤 물러섰다.

    독경이 무심한 얼굴로 오른손을 뻗어 왼쪽 어깨에 박혀 있는 나무 조각을 빼내고는, 상처 부위를 지그시 눌렀다.

    어느새 흰 셔츠가 빨갛게 물들며 손가락 틈으로 피가 새어 나왔다.

    “이, 이독경.... 피, 피가....”

    주인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그의 손을 떨리는 자신의 손으로 꾹 누르며 지혈했다.

    “어떡해, 피가 너무 많이....”

    그녀가 울먹거리며 작게 혼잣말을 했다. 그가 조금 창백해진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괜찮아요, 선배. 이 정도론 안 죽어요.”

    독경의 나긋한 목소리에 주인이 젖은 눈을 들었다. 그가 입꼬리를 싱긋 들어 보이며 웃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물었다.

    “그보다 빨리, 명령을 내려 줘요. 사냥을 시작할까요?”

    충직한 개가 짙은 검은 눈동자를 들어 주인을 빤히 보았다. 빨리 사냥에 뛰어들고 싶은지 신호를 기다리며, 온몸을 흥분으로 푸르르 떨었다.

    팔다리의 근육이 어느새 언제든 달음박질을 칠 수 있도록 팽팽하게 당겨졌다.

    주인이 당혹과 염려로 흔들리는 마음을 침착하게 가다듬으며,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사냥감은 사람들을 헤치고 차 쪽으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그녀가 한겨울 안개만큼이나 그윽하지만, 어딘가 무자비한 음성으로 말했다.

    “물어뜯어 버려. 너, 나 그리고 김 실장님 몫까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독경이 송곳니를 전부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부릅뜬 새카만 두 눈에 기대와 희열이 어른거렸다.

    “알겠어요. 선배는 여기서 기다려요.”

    그가 무릎을 펴며 일어서더니, 검은 정장을 단정히 차려입은 사람들을 한데 불러 모아 지시를 내렸다.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남은 몇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가 둘로 나뉘어 차에 올랐다. 달아난 상현을 양쪽에서 몰아붙일 심산인 듯했다.

    주인이 그런 그를 눈으로 좇았다. 멀리서도 붉은 셔츠 자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때, 이곳에 남아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은 선하가 그녀 곁으로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주인 누님, 죄송해요. 제가 부주의해서....”

    “괜찮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주인이 미안함에 땅만 파는 그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진 선명한 핏자국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독경이 차에 올라 뒤를 쫓았을 때, 상현은 예상보다 멀리 달아나지 못한 상태였다.

    “저기, 앞에 보입니다!”

    나 팀장이 운전대를 꽉 붙든 채, 눈앞에서 불안하게 오락가락 선을 넘나드는 차를 턱으로 가리켰다. 독경이 머리 위 손잡이를 느긋하게 잡으며 말했다.

    “좀 더 밟아!”

    지시가 떨어지자, 차는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뒤따르던 다른 차도 그에 맞춰 속력을 높였다.

    자신을 바짝 추격하는 차를 발견한 상현이, 미간을 좁히며 초조하게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거머리 같은 새끼....”

    그가 나직하게 욕설을 지껄이며, 가속 페달을 신경질적으로 밟았다. 그러나 어느새 바로 옆까지 따라붙은 독경과 일행이 구석으로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X발!!”

    상현이 어떤 기시감을 느끼며, 답답함과 조급함을 실은 주먹으로 운전대를 쾅 내려쳤다.

    머릿속에 떠오른 광경은 주인과 독경이 떠나던, 육 년 전 그 순간이었다. 그날, 그는 토끼몰이라도 하듯 재미 삼아 두 사람을 궁지로 내몰았다.

    아주 오랜만에,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그들의 꼬락서니가 우습고 한심해서 상현은 손가락질하며 낄낄거렸다.

    어쩌면 그는 제 동생의 말대로,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괴롭히며 쾌락이나 우월감 따위를 느끼는지도 몰랐다.

    상현은 약자가 싫었다.

    유혹에 쉽게 흔들리고, 답답할 만큼 무능력한 모습이 꼭 저를 보는 것 같았기에. 그래서 거슬렸고, 눈앞에서 치우고 싶었다.

    주인과 독경도 마찬가지였다. 스물을 갓 넘긴 세상 물정 모르는 애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현실을 벗어나 보겠다며 발버둥 치는 꼴이 역겹고 가소로웠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내던지는 그 용기가 조금은 부러웠다. 그래서 두 사람을 주저앉히려 기를 썼다.

    너희도 나처럼 여기에 순응해야 해. 억압당한 채, 그저 시키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살아야 해.

    하지만 그들은 소중한 것을 희생해 가며 기어이 자유를 쟁취했고, 스스로의 의지로 돌아와 당한 만큼 대갚음했다.

    어쩌면 지금 벌어지는 이 모든 일은 사고가 일어난 그 순간, 예견된 결과인지도 몰랐다.

    별생각 없이 던진 돌멩이 하나에 퍼진 파문이 거대한 파도로 자신을 덮쳐 뿌리째 흔들어 버린 것이다.

    “하, 하하, 하하하....”

    상현이 탁하고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좁은 터널 안처럼 어둠으로 둘러싸인 도로를 향해 부릅뜬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았다. 아니, 뼈저리게 후회했다.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하찮은 저들을 그때 없애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한스러웠다.

    그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독경이 창문을 내리고 얼굴을 내민 채 무어라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흩날리는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자신을 노려보는 눈길이 맹수처럼 사나웠다. 선이 굵직한 이목구비에 성난 기색이 또렷했다.

    “지긋지긋한 새끼....”

    상현이 짓씹듯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잠시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운전대를 잡은 손에 서서히 힘을 주었다.

    “네놈이 아무리 날뛰어도 소용없어. 버러지만도 못한 손에 잡히느니 그냥 죽고 말지, 하하!”

    그가 미친 사람처럼 목젖이 드러날 정도로 껄껄 웃으며, 차체를 온몸으로 쾅쾅 두들겼다. 발을 구르고, 머리를 처박고, 운전대를 때리며, 마치 발광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내 상현이 가속 페달에 힘을 실어, 차의 속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운전대를 확, 꺾었다.

    쾅 하는 충격음과 함께 차는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차체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으로 구겨졌다. 일순, 그의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한발 늦게 도착한 독경이 찌그러진 보닛 틈으로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차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거의 뜯어내다시피 하며 운전석 문을 힘껏 잡아당겼다.

    간신히 열린 문틈으로 상현이 이마에 피를 흘린 채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파리한 낯빛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독경이 문틈으로 손을 뻗어 그의 코끝에 손가락을 댔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옹졸한 새끼, 마지막까지 비겁하게 도망친 거냐?”

    독경이 허무와 분을 쓰게 삼키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현상현은 끝끝내 속죄의 길을 거부하고는,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었다. 결코, 애도할 수 없는 최후였다.

    뒤이어 사고 현장에 도착한 나 팀장이 어깨 너머로 사태를 파악하고는, 전화를 들어 경찰에 신고했다.

    독경도 휴대 전화를 꺼냈다.

    그의 전화를 받은 선하는 곧바로 주인에게 전화기를 넘겨주었다. 그녀의 휴대 전화는 이미 박살 나 쓸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적막이 감돌았다. 주인은 독경이 내뱉는 한숨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달싹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현상현, 죽었어요....”

    그가 황망하고 참담한 심정을 감출 길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세한 상황을 전해 들은 그녀 또한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독경이 인내심을 발휘해 가슴을 짓누르는 침묵을 견뎠다. 지금 이 순간 주인의 마음이 어떨지 쉬이 헤아릴 길이 없었던 탓이었다.

    잠시 뒤, 그녀의 담담한 어조가 그의 귓가에 아스라이 닿았다.

    [알겠어. 이독경, 넌 바로 병원부터 가. 나도 그리로 금방 갈게.]

    “네, 알았어요.”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인이 인근 병원에 도착했을 때, 독경은 응급실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고 있었다.

    검붉게 물든 셔츠를 반쯤 풀어 헤친 채 왼쪽 어깨에 붕대를 감은 모습이, 어딘가 몹시 지치고 쓸쓸해 보였다.

    처음이었다. 주인이 독경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언제나 강인한 생명력이 들끓어 오르던 그가 모든 기력을 소진한 것처럼 힘없이 앉아 있는 모습은, 낯설면서도 처연해 보였다. 심장이 조이듯 아팠다.

    주인이 천천히 다가가, 독경의 몸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괜찮아?”

    “네, 선배는요?”

    “나도 괜찮아.”

    주인이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피를 꽤 흘렸는지, 뺨이며 입술이 약간 해쓱하고 파리해 보였다.

    “아프진 않고?”

    “네....”

    독경이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며 대답했다.

    그녀가 그의 뒷머리를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헝클어진 부분을 풀어 주었다.

    “김 실장님도 이젠 편히 잠드실 거야.”

    주인이 차분하지만 다정하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 말에 독경이 가로로 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한 번도 속내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는 비단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의 복수만을 위해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김강석, 그 이름 세 글자가 늘 마음 한구석에 앙금처럼 남아 있었던 탓이었다. 왜인지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었다.

    독경은 그와 허름한 술집에 마주 앉아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던 그 순간을, 언제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주인이 부재한 긴 시간 동안, 웃을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찰나였기에.

    “알고... 있었어요...?”

    그가 무저갱처럼 까마득한 눈동자를 한곳에 고정한 채, 천천히 눈꺼풀을 깜박였다. 그녀가 한없이 온화하고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럼, 너에 대한 건 모두 다 알고 있어. 하나도 빠짐없이....”

    독경이 두 팔을 쭉 뻗어 주인의 몸을 감쌌다. 보드랍고 포근한 온기가 텅 빈 마음에 밀려들어 와 그를 가득 채웠다.

    애틋하리만치 따사로운 그 존재를 사랑하지 않는 법을, 그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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