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65화 (65/76)
  • #65화. 몰락 (2)

    “뭐? 이 개새끼가 지금 뭐라...?”

    빙글빙글 웃는 낯짝으로 던진 독경의 말에 상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순간, 전화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독경이 불쾌할 정도로 느긋한 눈짓으로 소리가 울리는 재킷 주머니를 가리켰다.

    상현이 그런 음험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손을 넣어 휴대 전화를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쩐지 뒷덜미가 뻐근하게 당겼지만, 그는 보란 듯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바쁜데 왜 전화질....”

    그 순간,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음성이 쏟아졌다. 상현이 잠시 멍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잃더니, 이내 흙빛이 됐다.

    “박중우 이 새끼야, 똑바로 말해!! 검찰에서 왜 날 조사해??”

    짧은 침묵이 끝나기 무섭게, 상현이 목에 핏대를 바짝 세우며 소리쳤다. 독경이 당황한 상대를 여유롭게 감상하며 혀끝으로 송곳니를 슬쩍 쓸었다.

    그때, 현 회장 곁으로 비서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다급하게 귓속말을 전했다. 주인이 그 광경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리며 고함을 질렀다.

    “뉴, 뉴스 틀어 봐!!”

    비서가 민첩하게 회의실 한쪽에 놓인 TV 전원을 켰다. 때마침, 아나운서가 경제 관련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재계 관련 소식입니다. 최근 성공적인 조직 개편으로 실적 부진에서 벗어난 태성그룹에 다시 악재가 터졌습니다. 현태성 회장의 장남이자 전 부회장이었던 현상현 씨가 횡령 및 배임으로 고발당한 것입니다. 검찰은 이 밖에도 현태성 회장에 관한 비위도 입수됐다며, 태성그룹을 상대로 전방위적인 수사에 들어갈 것이라 밝혔습니다. 사측은 총수 일가의 전횡에 책임을 통감하면서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는 입장을 냈습니다. 다음 소식....]

    화면이 뚝 꺼졌다. 현 회장이 실핏줄이 잔뜩 올라 시뻘겋게 물든 눈으로 주인을 노려보았다.

    “기어이, 네가....”

    “저한테 뭘 원하냐고 물으셨죠? 제가 바라는 게 이거였어요. 완전하고, 완벽한 태성의 몰락.”

    주인이 세상 더없이 다정하고 상냥하게, 순수한 기쁨과 만족으로 충만한 미소를 그렸다.

    ***

    “나 때문에, 또 다쳤네....”

    주인이 미간을 설핏 찡그리며 힘없이 중얼거리고는, 상처 난 이마에 연고를 조심스레 발랐다. 독경이 그런 그녀의 허리를 불쑥, 굵은 팔로 감쌌다.

    “괜찮아요.”

    “정말 병원 안 가도 돼?”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저으며 배시시 웃었다.

    “이 정도 가지고 뭘요. 며칠 지나고 나면 아물 텐데.”

    “흉터 남으면 어떡해? 이 잘생긴 얼굴에....”

    그녀의 혼잣말에 독경이 풍만한 품을 파고들며 마구잡이로 헤치던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나, 잘생겼어요?”

    “본인이 제일 잘 알잖아. 특히, 왼쪽이 더 괜찮다는 거.”

    주인이 헛웃음을 지으며, 어쩐지 천진하기까지 한 질문에 답했다.

    “뭐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칭찬은 들을수록 좋거든요.”

    그가 다시 제 뺨을 그녀의 보드라운 가슴에 비볐다. 그녀가 작은 탈지면을 상처 부위에 붙이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 더 자주 해야겠네. 너 잘생겼어, 세상에서 제일.”

    “엎드려 절 받는 것 같지만, 그래도 싫진 않네요.”

    독경이 눈을 가늘게 접으며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인이 그 얼굴을 보며 다시 픽 웃더니, 상처 난 곳을 손끝으로 살살 문질렀다.

    “그런 얼굴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

    독경이 오래 묵은 먼지 같은 검은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주인이 그의 눈을 윤기가 감도는 제 눈으로 마주 보았다.

    “내 얼굴이 어떤데?”

    “울 것 같잖아요.”

    “속상해서 그러지.... 매번 나 때문에 깨지고 다치고, 죽을 뻔도 하는데 난 아무것도 못 해 주잖아....”

    “이렇게 치료해 주잖아요.”

    그가 제 이마에 붙은 솜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녀가 자조 섞인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게 무슨 소용이야. 처음부터 안 다치는 게 제일 좋지.”

    “자, 생각해 봐요.”

    독경이 잔뜩 구부렸던 허리를 죽 펴더니, 제 품 안으로 주인을 끌어들였다. 그녀가 순순히 안기자,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만약에 내가 아니라 선배가 다쳤으면, 난 그 늙은이 머리통을 깨부쉈을 거예요. 그러면 일이 커지겠죠? 난 살인죄로 감옥에 가고, 선배는 밖에서 날 기다리고. 아니다, 최지승 같은 놈 만나서 도망가려나?”

    그 말에 주인이 그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세게 쳤다. 그러나 도리어 자기 손만 아파, 울상을 지었다.

    독경이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몸통이 다 울릴 만큼 크게 웃고는 다시 말했다.

    “어쨌든 복수는 물 건너가고, 아까운 시간만 흐르고. 선배가 원하는 게 이런 건 아니잖아요?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좀 다치고 마는 게 낫죠.”

    “무슨 위로가 그래?”

    주인이 어이없다는 양 널따란 가슴팍에 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숨결과 미동이 간지러웠는지, 독경이 목울대를 꿀렁이며 침을 삼켰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예요, 말하자면.... 정, 미안하면... 내 소원이나 하나 들어주든가....”

    그가 기회를 놓칠세라 약삭빠르게 제 욕심을 채우려 덤볐다.

    “뭔데?”

    그녀가 호기심이 동하는지 약간 관심을 보였다.

    “음, 내가 가터벨트를 하나 주문했는데 말이죠.”

    퍽, 퍽.

    주인이 다시 독경의 허벅지를 연속으로 때렸다. 그러나 그는 털끝 하나 충격 받지 않은 채 얄궂은 얼굴로 실실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아픈 사람을 왜 때리고 그래요? 은근 못됐다니까. 싫으면 뽀뽀라도 해 줘요.”

    그가 볼을 한껏 부풀리며 그녀에게 내밀었다. 잠시 한숨을 쉬며 분을 삼킨 그녀가 쪽 하는 소리를 내며 뺨에 입술을 붙였다.

    독경이 그 모습을 끈적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이내 주인의 뒷덜미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꽉 누르며 키스를 했다.

    순식간에 밀려든 혀가 촉촉한 입안을 거침없이 훑었다.

    “음....”

    주인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독경의 어깨에 제 팔을 둘렀다. 그러자 그가 남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더듬었다.

    “후....”

    그의 잇새로 거친 숨이 흘렀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독경이 주인의 몸을 막 소파에 눕히려는데,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잠깐만요.”

    독경이 아쉬운 마음에 인상을 구기며 일어섰다.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조금 떨어진 위치로 걸어가며, 전화를 받았다. 언제 흥분으로 몸이 달았냐는 듯, 몹시도 격식 있는 말투가 흘러나왔다.

    “네, 접니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통화를 마친 그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녀에게 돌아와 입을 열었다.

    “현상현, 조사 마치는 대로 풀려날 거라네요. 내부에서 구속 영장까지는 청구할 필요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검찰 쪽에 연줄이 있는 것 같은데....”

    독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이 불안한 눈길로 그를 훑었다. 그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초조함을 달랬다.

    “염려 마요. 선배가 지시한 대로 자료는 차고 넘치게 많이 모았으니까.”

    주인은 전사적인 감사를 진행하며, 비밀리에 별도의 지시를 한 가지 더 내렸다.

    그것은 현태성 일가의 비리 자료를 최대한 많이 수집하라는 것이었다. 적의 약점은 많이 알수록 좋은 법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독경은 지시대로 임원들의 뒷조사를 하면서, 현씨 부자의 자료도 차근차근 모았다. 화려한 전적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김강석과 연관된 것도 있었다.

    상현의 최측근 중우가 제 부친의 명의로 청담의 한 클럽 대표에게 거액을 송금한 정황이 발견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시점이 묘하게도 강석의 사망 시기와 맞물렸다.

    그 바닥에 빠삭한 유선하의 말에 따르면, 클럽의 양 대표라는 사람은 청담파와 나름 친분이 두터운 인물이라 했다.

    아마도 그자가 상현과 청담파, 그리고 강석을 잇는 연결 고리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횡령, 배임 건으로는 좀 부족할 것 같아요. 그 카드를 검찰 쪽에 흘려야겠어요. 이번엔 절대로 못 빠져나갈 거예요.”

    그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결론을 냈다. 그녀가 약간 탄복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도 검찰 쪽에 인맥이 있는 거야?”

    주인의 솔직한 반응에 독경이 싱긋 웃었다.

    “말했잖아요. 내가 얼마나 쓸모 많은 놈인지 알게 될 거라고.”

    ***

    밤샘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상현은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하지만 정신만큼은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난생처음 느낀 분노가 그를 각성시킨 것 같았다.

    “X발, 버러지만도 못한 새끼들이 날 건드려?”

    그가 담배를 잘근 씹으며, 욕설을 던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두 연놈을 쳐 죽이고 싶었다.

    “X발....”

    담배 연기를 폐 속 깊숙이 빨아들이며, 그는 소파에 누웠다. 잠깐 눈만 붙이고 일어나 대충 씻고 본가에 갈 생각이었다.

    검사로 있는 지인 중 한 명이 힘을 쓴 덕분에 간신히 구속은 면했으나, 그래도 앞일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 아버지와 의논할 요량이었다. 현 회장도 검찰의 조사 대상에 포함되므로, 밤사이 무슨 계책을 마련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상현의 이런 계산은 완벽히 어긋났다.

    “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두 번 말하기 싫으니 그리 알아라.”

    현 회장이 못마땅하다는 양 눈을 가늘게 뜨며, 맹한 표정을 짓는 아들놈을 보았다. 상현이 입가에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며 물었다.

    “지금, 저보고 다 뒤집어쓰라는 말씀이십니까?”

    “뒤집어쓰다니? 어감이 좋지 않구나. 네가 회삿돈을 빼돌린 건 명백한 사실 아니냐? 그냥 그걸 네 선에서 정리하자는 것뿐이다.”

    상현이 어이없다는 양 코웃음을 치며 언성을 높였다.

    “하!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왜 제가 아버지가 벌인 일까지 떠맡아야 합니까?”

    “이 모자란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큰소리야? 그럼, 너랑 나랑 나란히 감방 갈까? 그사이 현주인, 그년이 회사라도 차지하면 어쩌려고? 우리 둘 다 길바닥에 나앉을래?”

    현 회장이 불같은 성미를 못 이기고는 격하게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쳤다. 그러고는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 뒤, 최대한 나긋하게 말했다.

    “어쨌든 너나 나나 둘 중 하나라도 무사해야, 후일을 도모할 거 아니냐? 뒷바라지는 확실히 해 줄 테니, 다녀와라....”

    상현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분을 삭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화가 치밀었다.

    벼랑에서 등 떠밀린 상황도 억울한데, 이제는 제 편에게까지 팽을 당하다니. 이보다 더 서럽고 비참한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때, 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검사인 지인이었다.

    한시가 급한지라 받지 않을 수 없었기에, 상현은 부친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는 귓가로 전화기를 가져갔다.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서 날카로운 육성이 터졌다.

    [현상현, 이 미친 새끼야!! 너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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