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64화 (64/76)

#64화. 몰락 (1)

뜬금없는 말을 던지는 독경을 의아한 눈길로 훑던 주인은, 이내 지승의 표정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의 눈길이 제 왼손 약지에 닿아 있다는 것도. 그녀가 재빨리 탁자 밑으로 손을 내리며 화제를 바꿨다.

“자 자, 불필요한 얘긴 그만하고 회의 시작하죠.”

회의실 불이 꺼지고 지승이 긴 한숨을 내쉬며, 어딘가 공허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슬며시 일어나 벽에 띄운 화면을 보며 발표를 시작했다.

그동안 직원들과 밤을 새우며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나름의 사업 및 조직 개편안을 구성해 본 것이다.

그가 침착하게 발표하는 동안, 독경은 상대를 업신여기듯 빙글빙글 짓던 미소를 서서히 거둬들였다.

사내를 동분서주하며 머릿속으로 그리던 자신의 구상과 그의 제안이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놀라웠다. 그러나 순순히 동의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약한 심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신경이 바짝 곤두서고, 묘하게 초조해졌다. 주인의 신뢰는 오로지 자신만이 독차지할 수 있었기에.

하지만 그런데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승은 나쁘지 않은 인재였다. 그녀가 그를 적임자라며 자신에게 내세운 이유를, 아주 조금은 납득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김주환 본부장님? 김 본부장?”

주인이 인상을 팍 구긴 채 상념에 잠긴 그를 거듭 불렀다. 독경이 약간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어느새 발표는 끝나 있었다.

“김 본부장님은 어때요? 전 괜찮은 방향 같은데....”

주인의 말에 독경은 자료를 내려다보며 잠시 망설이더니, 탐탁지 않아 하며 입을 열었다.

“뭐, 쓸 만하네요.”

몹시도 인색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었으나, 지승은 왠지 만족스러웠다.

***

그로부터 몇 주 뒤, 현도경 태성그룹 사업총괄 상무는 현태성 회장의 승인을 얻은 척하며 기습적으로 사업 조직 개편안을 언론에 발표했다.

업계와 언론에서 호평이 쏟아졌다.

문어발식 계열사들을 완전히 정리하고, 본업인 제약 및 헬스케어 분야에 집중하려는 의도가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된 전문 인력 부족을 해소하고자, 전문가 위주로 구성된 사장단을 선임한 것이 주효했다.

각종 경제지와 증권사들은 앞다퉈 이번 개편안을 분석하는 기사와 자료를 냈다. 시장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실적에 대한 기대감으로 주가가 반등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반된 반응도 있었다. 현 회장이었다.

발표 직후, 그는 격분했다.

주인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었던 탓이다. 그것은 총수 일가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것, 그리고 완벽하고 완전한 그룹의 해체였다.

“빌어먹을 계집애가 기어이 사고를 치는구나! 당장, 현상현 불러와!!”

현 회장이 들고 있던 물 잔을 성마르게 내동댕이치며 소리쳤다.

현 회장이 노발대발하며 상현을 호출한 일은, 주인의 귀에도 곧장 들어갔다.

그녀가 펜트하우스의 통창에 팔짱을 끼고 기대선 채 생각에 잠겼다.

그때, 집으로 돌아온 독경이 넥타이를 풀며 곁으로 다가왔다. 주인이 심각했던 분위기를 애써 갈무리하며 미소를 띠었다.

“왔어?”

그가 그녀의 등 뒤에 바짝 섰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창을 짚으며, 손끝으로 유리를 톡톡 두들겼다. 그 손동작이 자못 불온하고 음험하기 짝이 없었다.

“얘기 들었어요. 현태성이 현상현을 불러들였다고....”

“예상 못 한 일은 아니었잖아? 이미 언론에 공표한 이상, 개편안에 손댈 순 없을 거야. 다른 쪽으로 무력화를 시도할 순 있겠지만....”

주인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린 뒤, 짙은 어둠이 깔린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리에 비치는 제 주인의 얼굴에서 깊은 고뇌를 읽은 사냥개가 귓가에 속삭였다.

“선배, 이참에 뿌리 뽑죠? 저한테 맡겨 줘요. 제가 처리할게요.”

그녀도 유리를 통해 독경의 얼굴을 보았다. 스산한 야경 속에서 가로로 긴 눈이 오늘따라 더욱 난폭하고 잔인하게 번들거렸다.

자신들의 앞을 방해하는 그들에게 단단히 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 기회예요.”

독경이 다시 그녀의 귀에 불경한 숨결을 토했다. 주인은 그의 낮은 속삭임이 악마의 유혹처럼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내면의 또 다른 자아인지도 몰랐다. 악랄하고 냉혹한....

그녀가 다시 심연으로 침잠했다. 지금 망설이는 이유는 자신이 치려는 대상이 가족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혈육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에. 아니, 오히려 그것은 속박에 가까웠다.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천형처럼 말이다.

주인이 주저하는 이유는 딱 하나, 자신이 일으킨 파문이 어디까지 흘러갈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모든 일에는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었고, 두 사람에게는 그 사고가 그랬다. 그리고 그 예측 불가한 지점이 그녀를 불안케 했다.

복수심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이 일로 인해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는다면, 다 무슨 소용이라는 말인가.

주인의 침묵이 길어지자 독경은 흔들리는 결심을 붙잡으려는 듯, 뒤에서 가녀린 몸을 꽉 조였다.

“걱정하지 마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우리 중 누구도 다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번엔 날 믿어 줘요.”

그는 제 주인의 두려움이 무엇인지 기민하게 읽어 냈다. 참으로 충직한 종이었다.

주인이 뿌듯한 눈빛으로 독경을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날렵한 뺨을 다정하게 매만졌다.

“그래, 난 널 믿어.”

그 말에 그가 진득한 욕망이 들끓는 얼굴로 길게 입을 맞췄다. 그녀가 선선히 눈을 감았다.

***

이튿날, 외부 일정을 마치고 복귀한 주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떨어졌다. 그녀의 부재를 틈타, 현 회장이 긴급 이사회를 소집했다는 것이었다.

“뭐, 뭐라고요?”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던 주인이 몸을 휘청거렸다. 그때, 독경이 다급히 방으로 뛰어들어 그녀를 부축했다.

“선배!”

“얘기, 들었어. 빨리 가 보자!”

그녀가 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살벌한 표정으로 뒤따랐다. 두 사람이 회의실 앞에 도착하니, 마침 임원들이 삼삼오오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뒤늦게 도착한 남녀를 슬쩍 곁눈질하더니,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며 조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보란 듯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주인의 꽉 쥔 두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동안 힘겹게 쌓아 올린 모든 것이 한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분하고 허탈했다.

그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회의실 안으로 뚜벅뚜벅 들어갔다.

안에서는 현 회장과 상현이 상석에 앉아 은밀하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현 회장이 막 들어오는 주인을 발견하고는 성난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이 버러지만도 못한 게 날 망치려 들어?”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앞에 놓인 유리잔을 힘껏 집어 던졌다. 그녀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 순간, 나란히 서 있던 독경이 앞을 막아섰다.

유리잔이 퍽 소리를 내며, 그의 반듯한 이마를 둔탁하게 강타했다. 그러고는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이독경!!”

주인이 비명을 지르며 우뚝 서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이마가 찢어졌는지 독경의 이마에서 어느새 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괜찮아?”

그녀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물으며,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제 옷소매로 닦았다. 그가 덜덜 떨리는 손을 지그시 맞잡았다.

“선배는 괜찮아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주인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두 사람 곁으로 상현이 느긋하게 걸어오더니 코웃음을 쳤다.

“아주 절절하구나, 절절해! 미친 네놈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알아? 현주인, 이독경. 너흰 이제 끝났어!!”

상현이 비열한 냉소를 만면에 띠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낯빛이 파리해진 주인이 어금니를 으득 씹으며 자신을 노려보았다. 얼굴에 핏자국이 선연한 독경 또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마주쳐 왔다.

꽤 유쾌한 광경이었다.

그들이 분노에 차고, 화를 내고, 악다구니를 쓴다는 것은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뜻이었으므로.

그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오시하는 사이, 주인이 현 회장을 보며 외쳤다.

“제게 전권을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왜, 이제 와서 말을 바꾸시는 거죠? 주가도 실적도 호조세인데, 왜....”

현 회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집으로 똘똘 뭉친 카랑카랑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이 미련한 것아, 내가 진짜 원하는 게 그런 거라고 생각하니? 내가 원하는 건 영원한 ‘내 왕국’이야. 아무도 건드릴 수 없고 넘볼 수 없는, 견고하고 영속한 ‘나만의 것’ 말이다. 하하!!”

주인이 치미는 분을 삭이지 못한 채 눈가를 바르르 떨며 물었다.

“설령, 폐허라 할지라도요?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죠?”

“왜, 의미가 없니? 내가 그 세계의 ‘왕’인걸. 모든 걸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신’이 되는걸. 이 전지전능한 힘은 한번 맛보면 잊을 수 없단다.”

현 회장이 탐욕으로 가득 차오른 잿빛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얼굴이 기이한 광기와 집착으로 서서히 물들었다.

“그런데, 너 따위가 내 왕국을 빼앗으려 했지. 그건 원래 내 것이었어. 피땀 흘려 일군 내 전부. 그걸 망치려 들다니, 넌 반역의 대가를 똑똑히 치를 거다!”

그가 자신의 딸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건, 당신 게 아니야. 당신이 희생시킨 자들의 것이지. 발밑을 잘 봐요. 익숙한 얼굴들이 당신을 집어삼키려고 아우성치고 있을 테니까.”

주인이 피처럼 검붉은 입술을 매혹적으로 들썩였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지독하게 끔찍한 저주와 예언이었다.

현 회장이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발아래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충직한 개였던 강석이 피를 흘리며 그를 지옥으로 끌어내리려 손을 뻗었다.

그가 흠칫, 몸을 움츠렸다.

꿈이 틀림없었다. 저 불길하고 사악하기 짝이 없는 존재의 혓바닥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긴말 않으마. 넌 해임될 거다. 마음 같아선 콩밥이라도 먹이고 싶지만, 네 어미를 생각해서 이쯤에서 마무리 짓겠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 썩 꺼져라!”

상현이 옆에서 부친의 말을 거들었다.

“이쯤에서 끝내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 한 번 더 기웃대면 그땐 나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

그때,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무언가를 확인한 독경이 상현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야말로 끝난 것 같은데? 전화 받아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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