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63화 (63/76)
  • #63화. 반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이었다.

    주인과 독경, 지승은 각자의 자리에서 서류와 씨름하고, 발이 닳도록 뛰었다. 이신이 그런 그들을 부지런히 보좌했다.

    독경은 자신의 전문 분야이기에 능숙하게 일을 처리해 나갔지만, 주인은 그러지를 못했다. 파악할 일도, 결정할 일도 너무 많았던 탓이었다.

    자리가 주는 무게감을, 그녀는 새삼 절감했다.

    게다가, 현 회장은 취임식에서 주인에게 전권을 넘겨주겠다고 선언했다. 만에 하나 잘못된다면, 다 덮어씌우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제게 마냥, 불리하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모든 결정권이 제 손에 있으니, 뜻대로 휘두를 수 있으리라 계산했던 것이다.

    상대가 눈치채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날도 주인은 퇴근 후에 서재에 틀어박혔다. 이신이 자료를 한 아름 들고 와 말했다.

    “전에 요청하신 사장 후보자 명단입니다. 말씀대로 사생활 관련 검증도 모두 마쳤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제 퇴근하셔야죠? 매번 이렇게 늦게 보내 드려 죄송하네요.”

    주인이 단정한 미간을 찡그리며 미안한 표정으로 이신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상무님께선 퇴근은 시켜 주시잖습니까.”

    그 말에 주인의 두 눈이 커졌다. 그때, 문 앞에 시커먼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그래서, 제 험담이라도 하시게요?”

    낮고 굵은 음성에 두 사람이 문 쪽을 바라보자, 독경이 약간 피곤한 기색으로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댄 것이 보였다.

    “뭐,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이신이 헛기침을 하며 얼버무렸다. 주인이 그녀 편에 섰다.

    “너 대체, 이 비서님을 얼마나 부려 먹은 거야?”

    그러자 그가 콧방귀를 뀌며 화살을 돌렸다.

    “흥, 선배야말로 날 얼마나 부려 먹고 있는 줄 알아요?”

    잔뜩 볼을 부풀린 채 토라진 행동과 말투에, 주인은 반박을 못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야말로 독경과 지승을 쥐어짜는 악덕 고용주 아닌가.

    그렇게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이신이 쑥 빠져나오며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휘적휘적 멀어지는 흐트러짐 없이 깔끔한 뒤태를 향해 주인도 인사했다.

    “오늘도 뭐가 많네요.”

    그사이 곁으로 다가온 독경의 눈이 책상 위에 빼곡히 쌓인 서류들로 향했다.

    “응, 그러게.”

    그녀가 침침한 눈가를 비비며 대꾸했다. 그가 책상 위에 살짝 걸터앉으며 은근히 물었다.

    “오늘도 서재에서 잘 거예요?”

    “응, 그래야 할 것 같아.”

    “너무 무리하지 마요. 피곤해 보여요.”

    독경이 그녀의 눈가를 엄지로 슥 문질렀다. 주인이 뭉근한 손길에 스륵 눈을 감았다 떴다.

    “응, 알겠어. 너도 피곤하겠다. 어서 씻고 쉬어.”

    “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으로 그가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잠시 뒤, 희미한 물줄기 소리를 배경 삼아 그녀가 다시 일에 몰두했다.

    “아, 펜을 다 썼네.”

    주인이 펜을 한 번 가볍게 흔들고는 혼잣말을 하며 책상 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여분의 것이 보이지 않자, 조심스레 왼쪽 서랍을 열었다.

    그녀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이곳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 집주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열어 본 서랍에는 필기구들이 일렬로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주인이 검은 펜 하나를 막 집으려는데, 구석에 놓인 작은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상자는 꽤 낡고 모서리가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는데, 그 모양새가 이상하게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상자를 꺼내 들었다.

    어느새 샤워 소리가 멈췄다.

    주인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백금색의 반지 한 쌍이 있었는데, 얼마 전 맞춘 가짜 약혼반지에 비하면 훨씬 투박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오래됐는지 빛도 많이 바래 있었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주인이 긴장한 손으로 작은 반지를 제 왼손 약지에 끼웠다. 반지는 소름 돋을 만큼 손가락에 딱 들어맞았다.

    “안 그래도 언제쯤 발견할까 궁금했는데, 그게 오늘이네요?”

    문 앞에 선 독경이 샤워 가운을 몸에 두른 채, 젖은 머리를 한 손으로 넘기며 말했다.

    주인이 다른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으며 입술을 뗐다.

    “이거, 뭐야?”

    “보면 몰라요? 반지잖아요.”

    그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심각했다.

    “누구 건데?”

    “내가 반지를 주고 싶은 사람이 누구겠어요?”

    “이독경!”

    빙빙 돌리는 말에 주인이 새된 소리를 냈다. 독경이 양손을 들며 항복하는 시늉을 했다.

    “선배 거예요.”

    “...어, 언제 샀어?”

    주인이 손에 낀 반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흩뿌릴 것처럼 잔뜩 흐렸다.

    독경이 속으로 혀를 찼다. 울리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눈물을 보면, 제 마음이 울렁거렸기에. 하지만 장담하건대, 그녀는 곧 울 것이다.

    “음, 전에.... 그러니까 사고 나기 전에 샀어요. 목적지에 도착하면 프러포즈 하려고요. 근데, 할 수 없었죠. 그래서 계속 갖고 있었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인이 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들었다.

    그 눈을 마주하자 독경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온몸에 전기가 찌르르하고 흘렀다.

    그가 천천히 다가갔다.

    “울지 마요. 울리려고 한 말 아니니까.”

    그 순간, 그녀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안 울어. 김칫국 마시지 마.”

    하지만 단호한 말과는 달리, 뺨 위로 눈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주인은 낡고 단순한 반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느새 코앞까지 온 독경이 나직이 속삭였다.

    “마음에 들어요?”

    주인이 입을 크게 벌리며 환히 웃었다. 또다시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응, 너무 예뻐!”

    “다이아 반지보다 더?”

    그가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그것보다 더.”

    “선배는 보석 보는 눈이 없네요. 다이아가 이것보다 훠얼씬 더, 비싼데.”

    “난 가격을 보는 게 아니야. 마음을 보는 거지.”

    주인이 꾸밈없이 담백하게 말했다. 그의 혼탁하게 까만 눈이 일순, 투명하게 반짝였다.

    정말이지 하나하나 곱씹을수록 사랑스럽지 않은 구석이 없는 여자였다.

    “선배는 정말이지, 어쩌면 그렇게 말도 예쁘게 하죠?”

    독경의 목소리가 감격에 떨렸다. 그 은밀한 진동을 느끼며, 주인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스무 살을 갓 넘긴 앳된 그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마도 그는 설레고 긴장된 마음으로 반지를 골랐으리라. 그리고 한참이나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어떤 말로 청혼해야 할지 고민했겠지.

    그 간절한 마음 때문에 그녀의 심장은 환희와 고통으로 조였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기뻤지만, 또 그만큼 아팠다.

    “하, 하아....”

    주인이 제 심장을 움켜쥐며 눈물을 삼키려 애쓰자, 독경이 떨리는 양어깨를 살포시 잡았다.

    “흠, 오늘은 여기까지 해요.”

    그가 앞에 놓인 서류를 치우고는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다부진 손에 이끌려 샤워실로 향했다.

    “옷 벗어요. 목욕물 받아 줄게요.”

    독경이 욕조 끝에 걸터앉아 물을 받는 동안, 주인은 뒤돌아서서 옷을 벗었다.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은 몸을 그가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그녀를 안아 욕조 안에 내려놓았다.

    “온도는?”

    “딱 좋아....”

    주인이 뜨거운 물에 녹아내리듯 몸을 낮추며 눈을 감았다. 그가 아직 짭짤한 물기가 남은 뺨을 손으로 쓸었다.

    “나도 들어가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

    그녀가 한쪽 눈을 슬쩍 뜨며 고개를 까닥였다. 독경이 빙그레 웃으며 가운을 벗어 던지고는 등 뒤에 앉아 작은 몸통을 껴안았다.

    그녀가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는 손을 들어 반지를 보았다.

    “나, 이거 가져도 돼?”

    독경이 어이없다는 양 피식 웃었다.

    “그건 원래 선배 거였으니, 내 허락은 필요 없죠.”

    “그럼, 가질래. 갖고 싶어....”

    제 손에 끼워진 반지가 너무 무거워 주인은 감당하기 벅찼으나, 그런데도 갖고 싶었다. 이것 하나쯤은 가질 자격이 있다고 믿었기에.

    ***

    며칠 뒤, 독경과 지승은 널따란 회의실에 마주 앉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애꿎은 허공만 보았다.

    독경은 지승이 이번 일에 참여하는 것을 몹시도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주인은 그만한 적임자가 없다며 설득했다.

    그리고 그의 팀이 빈 사무실에 상주하며 직원들을 상대로 열심히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는 말을 얼핏 듣기는 했다.

    그때, 지승이 입을 열었다.

    “주인, 아니 도경 상무님은 언제쯤 오십니까?”

    독경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저 기생오라비처럼 허여멀건 놈이 감히, 그녀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다니.

    주인은 왜 저따위 놈에게 자기 이름을 알려 준 것인지.... 이따 단단히 따져 물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그가 입매를 삐딱하게 구겼다.

    “그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시죠?”

    그 말에 지승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저렇게 유난스러운 반응에 순순히 사과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일종의 오기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주인 씨를 어떤 이름으로, 어떻게 부르든 그건 제 마음입니다. 본명을 알려 준 건 당신이 아니라 주인 씨 본인이니까요.”

    지승이 보란 듯 그녀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며 강조했다. 맞은편에서 뜨거운 콧김이 씩씩거리며 뿜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좀, 통쾌했다.

    그가 자신의 승리를 예감하며 슬쩍 미소를 짓는데, 문이 열리며 주인이 들어왔다.

    뒤늦게 들어온 그녀는 썰렁한 분위기를 간파하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

    “늦어서 미안해요. 공장 시찰이 좀 늦게 끝나서.... 오랜만에 봤는데, 얘기는 좀 나눴어요?”

    “딱히?”

    “글쎄요.”

    두 사람 모두 불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주인이 양옆을 슬쩍 번갈아 보았다.

    독경이야 원래 유치한 구석이 있었지만, 점잖던 지승까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며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여러분, 사이좋게 지내야죠. 당분간은 계속 이렇게 볼 텐데, 그때마다 이럴 거예요?”

    독경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어차피 이번 일 끝나면 볼 일 없을 텐데, 굳이 친해질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저도 동의합니다. 그 시간에 차라리 일에 집중하는 편이 효율적이겠죠.”

    지승이 딱딱한 어조로 거들었다.

    “아이고.”

    주인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순간, 지승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았던 것이다.

    주인은 진심으로 그 반지가 마음에 들었는지, 다음 날 곧장 보석 전문점에 맡겼다.

    돌아온 반지는 새것인 양 반짝반짝 광이 났다. 그녀는 그 소중한 반지를 제 손가락에서 한시도 빼지 않았다.

    상대의 동요를 눈치챈 독경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조금 전의 패배를 설욕하기라도 하려는 듯 야비한 미소를 만면에 띠며 얄밉게 도발했다.

    “상무님, 반지가 참 잘 어울리시네요. 선물 받으셨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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