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장악 (3)
임원들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건방진 자세로 들어오는 독경을 떨떠름한 눈길로 주목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길게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가 냉담한 느낌을 더하니, 더욱 안하무인으로 보이는 것도 같았다.
게다가, 벌써 정보지에는 사생활에 관한 온갖 추잡한 소문이 나도는 중이었다.
새로 취임한 현도경 상무와 그가 강남 모처에서 동거 중이라는 얘기도 들렸고, 이미 비밀 약혼식까지 올렸다는 설도 있었다.
물론 당사자인 독경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미혼의 젊은 남녀가 붙어먹는 것이 무슨 문제냐며 대수롭지 않게 반문할 것이 뻔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임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일만에서의 성과를 부정할 마음은 없지만, 이번 인사가 사적인 인맥에 의한 낙하산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는 탓이었다.
한술 더 떠, 현 상무는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지 않았는가. 그들의 태도가 심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안녕하십니까, 김주환입니다. 그럼, 첫 회의를 시작하죠.”
독경이 의자 등받이에 거만하게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우선, 몇 가지 굵직한 결정 사항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추후 논의하겠지만, 이 결정은 번복되지 않을 것임을 미리 고지합니다. 첫 번째, 이번 신약 개발 사업은 이른 시일 내에 완전 철수합니다.”
이 일에 사활을 걸고 있던 임원 하나가 즉각, 반발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태성이 이번 신약 개발에 몇 년을 쏟아부었는지 아십니까? 조금 더 시간을 주시면....”
그 순간, 독경이 두툼한 손바닥으로 책상을 탁 치며 상대를 쏘아보았다.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이 정도 시간과 자본을 투자했는데도, 아무런 성과가 없다는 건 실패라는 뜻 아닙니까?”
“본부장님이 제약 분야는 처음이라 잘 모르시나 본데....”
다른 임원이 제 동료를 거들기 위해 말문을 열었다. 말투는 무척이나 공손했으나, 속뜻은 너 따위 애송이가 이 바닥에 대해 알기나 하냐는 비아냥거림이 담겨 있었다.
독경이 그렇지 않아도 매서운 눈을 더욱 음험하게 치켜뜨며 한쪽 입꼬리를 씩 들어 올렸다. 뾰족한 송곳니가 위협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재미있군요. 이렇게까지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곤 예상 못 했는데....”
그가 싸늘하게 중얼거리더니, 곧장 공격적인 어조로 포문을 열었다.
“좋아요, 제가 제약 분야에 전문가가 아닌 건 인정합니다. 사실이니까요. 그럼 전문가이신 전도섭 상무님께 묻겠습니다. 제3상 임상 시험 결과가 조작됐다는 보고가 있던데,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그, 그건... 본부장님께서 뭔가 잘못....”
느닷없이 호명된 임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임상 통과를 위해 무리하게 결과를 도출한 건 아니고요? 이미 복수의 증언을 확보했으니,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회의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냉랭하게 얼어붙었다.
독경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입을 꾹 다문 채, 마디가 굵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톡.
톡.
적막이 흐르는 공간 안에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그 소리가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윽고, 그가 손가락을 우뚝 멈췄다.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슬며시 떠올랐다.
기지개를 켜는 맹수처럼 독경이 천천히 일어서며 몸을 한껏 부풀렸다. 단상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다부지고 건장한 체격이었다.
절로 심장을 조이는 압박감에 임원들이 숨을 헉 하고 들이쉬었다. 그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저에 대한 적의, 잘 알았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사사건건 훼방을 놓을 게 빤히 보이는군요.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도 같은데....”
한 사람씩 일일이 눈을 맞추며 독경이 냉소를 지었다.
속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은 의미심장한 표정에, 임원들은 제 발이 저렸는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전도섭 상무님.”
독경이 상대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중년의 남성이 내리깔았던 눈을 슬며시 들었다.
“재계약을 빌미로 하청 업체에서 골프장 회원권은 물론, 상납금까지 야무지게 받으셨더군요. 차명으로 하면 안 들킬 줄 알았습니까?”
그의 얼굴이 순간, 허옇게 떴다. 이번에는 독경이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지그시 보았다.
“이조향 상무님은 딸이 홍콩에 거주 중이죠? 취업 비자를 발급받으려고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딸을 위장 취직시키셨던데. 아, 제가 금장 쪽과 인연이 있어서 본의 아니게 알게 됐네요.”
“그, 그게....”
그가 머리가 희끗한 여인을 향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러자 상대가 당황한 기색으로 변명을 시도하려 했으나, 뜻대로 될 리 만무했다.
독경이 한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삐딱하게 서서는, 무자비한 눈길로 딱딱하게 굳은 임원들을 하나씩 주시했다.
“지금부터 오해 말고 잘 들으세요. 본인의 귀를 의심하고 싶겠지만, 제가 지금 하는 건 ‘협박’ 맞습니다. 손에 쥔 비위 사실만 하나씩 터뜨려도, 여러분들의 자리는 하루아침에 날아갈 거니까요. 설마, 그걸 원하는 분은 없겠죠?”
그가 나직한 웃음소리를 냈다. 소름 끼칠 만큼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였다. 임원들이 입을 꾹 다문 채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협박조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제가 여러분께 바라는 건 딱, 한 가지입니다. 지금부터 하는 일에 토 달지 말고 협조하시는 겁니다. 그럼, 과거는 굳이 따지지 않겠다고 약속드리죠. 현 상무님과 약속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전 빨리 성과를 내야 하거든요. 그럼, 모두 동의하신 걸로 알고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독경이 좌중을 향해 성의 없이 고개를 까닥거리고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나가 버렸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누군가가 절망적인 탄식을 내뱉었다.
“저, 저... 미친놈이....”
그것이 이독경이라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찬사라는 사실을, 그중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
독경이 임원들과 회의 중이던 그 시각, 주인은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최지승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밝은 갈색 눈을 부드럽게 접으며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어요? 주인, 아니 현도경 상무님.”
깍듯한 호칭에 그녀가 멋쩍게 미소 지었다.
“그냥 평소처럼 불러 주세요.”
“안 됩니다. 태성 정도면 제약 쪽에서는 손꼽히는 회사인데, 이 정도 예는 갖춰야죠.”
지승이 짐짓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주인이 여전히 몸 둘 바를 몰라 하자, 금세 얼굴 근육을 풀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농담이에요. 하지만 좀 놀랐어요. 이렇게 갑자기 초고속으로 승진할 줄이야!”
“실력 때문인가요, 타고난 핏줄 때문이죠.”
현태성이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현실을 그녀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랬다. 우습게도 지금 이 순간, 주인은 자신이 그의 딸이라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체감하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능력이 있으니, 기회도 온 겁니다.”
섬세한 얼굴에 드리워진 씁쓸함을 읽은 그가 재빨리 답했다.
“고마워요. 자,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다정한 배려에 주인이 불필요한 감상을 걷어 내며 말문을 열었다. 지승이 긴장감에 목울대를 들썩거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태성에선 지금 전 부문에 대한 감사와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어요. JS컨설팅에서 계열사 및 사업부서 통폐합에 대한 자문을 맡아 주셨으면 해요.”
“그런 거라면 대형 펌에 맡기는 게 더 좋을 텐데요? 저흰 규모도 작고, 제약 분야 경험도 많지 않아서요.”
그가 저답지 않게 자신감 없는 투로 중얼거리며 제 턱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그녀가 미소를 살포시 머금은 채 정중한 어조로 설득에 나섰다.
“대표님은 제가 아는 분 중 가장 출중하세요. 그리고 가장 믿을 만한 분이고요.”
주인이 ‘가장’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지승이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픽 웃음을 터뜨렸다.
“가장은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제 능력과 신의를 높이 산다는 건 이해했습니다.”
주인은 그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뜻을 깨닫고는 어색하게 뒷덜미를 쓸었다. 그녀가 ‘가장’ 믿고 능력을 인정하는 이는 언제나 독경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승은 주인이 독경조차도 완벽히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고, 알 필요도 없었다.
“언제부터 시작하면 됩니까?”
지승이 전투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아무래도 이번 일이 그의 승부욕과 성취욕을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주인이 흡족하게 답했다.
“당장요! 저한테 남은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지승과 미팅을 마친 후, 주인은 윤희에게 전화를 받았다.
[취임식, 잘 봤다. 이독경이랑 너, 완전 부부 사기단이 따로 없던데?]
윤희가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었다. 주인도 덩달아 피식 웃음이 샜다.
“그렇게 이상했어?”
[아니, 너무 잘 어울려서 문제였어. 원우는 너희가 완전 딴 사람 같다더라.]
“흠, 그래? 이독경이 생각보다 멀쩡하게 행동하더라고. 평소엔 전혀 아닌데.”
[하하, 걔 눈깔이야 항상 돌아 있지. 근데 너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다, 알지?]
“내가? 전혀 아니거든!”
주인이 발끈하자, 윤희가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그래. 뭐, 바쁘게 살다 보면 자기 객관화가 잘 안될 수도 있지. 참, 내가 보낸 웨딩 사진 봤어?]
“응, 잘 나왔더라. 예쁘던데? 너도 내가 보낸 거 봤니?”
그 말에 윤희가 잠시 뜸을 들였다.
[응. 보긴 했는데, 너무 비싸더라. 그냥 다른 거 해 줘.]
“윤희야,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부담 갖지 마. 이번 일도 네 도움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어. 거기다 너 하마터면, 회사도.... 그러니까 받아 줘, 응?”
주인의 조곤조곤한 설득에, 결국 윤희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항복했다.
[알겠어, 잘 쓸게.]
“그럼, 이번 주 내로 보낼게!”
[그렇게 일찍?]
“응, 얼른 해 주고 싶어서....”
주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윤희가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마친 그녀가 의자 등받이에 여린 몸을 풀썩 기댔다. 모든 일이 순서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자신만, 자신만 바짝 정신 차리면 된다고, 주인은 스스로를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