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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61화 (61/76)
  • #61화. 장악 (2)

    월요일 오전, 태성그룹 본사 대회의장은 취임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담당 직원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행사장을 정리하는 동안, 제법 널찍한 공간은 어느새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다들 새로 온 임원의 얼굴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총수인 현씨 일가 안에서도 가장 덜 알려진 인물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나더니, 승계가 확실시됐던 현상현 부회장을 밀어내고는 자리를 차지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호사가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데, 그녀가 미모의 재원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궁금증은 더욱 폭발했던 것이다.

    잠시 뒤, 취임식이 시작됐다.

    모든 이의 선망과 질시와 호기심이 뒤섞인 시선을 받으며, 낯선 여인은 꼿꼿이 단상에 올랐다. 현주인이었다.

    이번 취임식은 사내 시스템으로도 생중계됐다. 직접 참석하지 못한 구성원들은 화면을 통해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주인은 잠시간 고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카메라와도 잊지 않고 눈을 맞췄다.

    그녀는 짙은 보라색 계열의 단정한 정장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등 뒤에 걸린 회사 로고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이윽고, 오늘의 주인공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태성 가족 여러분! 전, 이번에 새로 취임한 사업총괄 상무 현도경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가녀린 외모와 달리, 흘러나오는 음성은 굳건한 심지가 엿보일 만큼 기운이 넘쳤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위엄을 느끼며 모든 이가 숨을 죽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단상 바로 아래 앉아 대기하던 독경의 입매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주인을 처음 보았을 때는 깨닫지 못했으나, 알면 알수록 새롭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군림하는 자라는 사실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만인의 위에 서 있는 사람, 무엇도 그 위에 설 수 없는 최상위 존재가 바로 그녀라는 사람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본질을 꿰뚫은 순간, 그는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낮춰 그녀에게 다가갔다. 당연한 이치였다.

    취임사가 이어졌다.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을 직접 뵙게 되니, 떨리지만 동시에 무척 기쁩니다. 임직원 여러분들께서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됩니다.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제 얘기를 들으셨겠지만, 많이 생소하실 겁니다. 저에 대한 기대와 우려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주인이 사람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저도 여러분처럼, 몸 안에 자주색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여 드리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아쉽네요.”

    자주색 피는 태성의 직원들이 애사심을 표현할 때 쓰는 관용구였다. 그녀의 너스레에 몇몇 사람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경직됐던 분위기가 약간이나마 풀렸다.

    그때, 주인이 돌연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지금의 태성은 어떻습니까? 제 몸에 흐르는 피가 부끄러울 만큼, 자랑스러운 회사가 아니라고 답하실 겁니다. 오너의 도덕적 해이, 협력 업체를 향한 강압, 지지부진한 신사업 등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죠.”

    참석자들의 입에서 탄식인지 탄성인지 모를 신음이 흘렀다.

    어떤 이는 노골적인 비난이 불편했고, 다른 이는 현 상황을 콕 짚은 발언이 속 시원했다.

    주인은 그 모든 호오의 무게를 홀로 짊어진 채, 선전 포고를 했다. 돌아올 영광도, 오욕도 이제 모두 그녀의 것이었다.

    마침내,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이제, 그 무엇도 되돌릴 수 없었다.

    “전, 이 모든 것을 바꿀 생각입니다! 여러분께 이 자리에서 약속드리겠습니다. 태성을 예전의 자랑스러운 회사로 돌려놓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구성원에게는 자긍심을 심고, 업계에는 모범을 보이며, 사회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패기 넘치는 선언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졌다.

    주인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소란한 장내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자, 그녀가 다시 폭탄을 던졌다.

    “이를 위해 태성의 모든 계열사와 각 부서에 강도 높은 감사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성역은 없습니다. 모든 비리와 부정을 철저하게 조사해 책임을 묻겠습니다. 협력 업체와 맺은 불공정 계약 또한 상생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꾸겠습니다.”

    비리, 부정, 책임 등의 단어에 주인은 강한 힘을 실었다. 누군가가 침음을 삼키는 소리가 침묵에 휩싸인 실내 안에 퍼졌다.

    그녀가 거침없이 이어 말했다.

    “또한 과감한 조직 개편도 시행하겠습니다. 불필요한 사업 부문은 확실히 정리하고, 실적이 높고 성장 가능성이 큰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겠습니다. 이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직원들의 고용은 최대한 보장할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 말에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다들 불안이 엄습했는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이십 대의 젊은 임원으로 인해 삼사십 대 팀장급 인사들이 줄줄이 정리될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관리자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반대로 성과를 내지 못한 부서원들은 좌불안석이었다. 실패의 책임이 자신들에게 전가될까 봐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주인이 직원들의 동요를 영민하게 읽어 냈다.

    “걱정 마십시오. 될 수 있는 한 희망하는 곳에 배치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여러분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모든 일은 저 혼자서 할 수 없기 때문이죠. 변화와 개혁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럼 전, 이 회사를 여러분께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얼굴 위로 의미심장한 표정이 설핏, 지나갔다. 그러나 너무 짧은 순간이었기에,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독경조차도.

    주인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마지막을 향해 달려갔다.

    “이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전문가를 어렵게 모셨습니다. 바로 일만그룹의 김주환 구조조정 실장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김주환 실장은 몇 년 전 방만한 경영과 무리한 계열사 확장으로 회생 절차 직전에까지 몰린 일만을 성공적으로 구제한 바 있습니다. 그 경험과 실력을 이곳에서도 잘 발휘해 주시길 바라는 의미에서, 큰 박수로 맞아 주십시오.”

    경력이 일천한 주인이 내심 불안했던 직원들은 새로운 인물이 소개되자, 박수로 환영했다. 약간의 의구심과 불안감이 해소되는 것 같았다.

    독경이 단상 중앙으로 여유롭게 오르며, 자신을 소개한 주인에게 가볍게 묵례를 했다.

    그러고는 좌중을 둘러보며 싱긋 웃었다. 목에 맨 보랏빛 넥타이가 주인의 원피스와 한 쌍처럼 잘 어울렸다.

    “현 상무님께서 이렇게 절 띄워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안녕하십니까, 태성 가족 여러분. 김주환입니다.”

    중저음의 느긋한 목소리가 회의장 안에 낮게 깔렸다. 눈길을 사로잡는 강렬한 인상에 모든 이가 압도됐다.

    “전, 현 상무님의 열정과 비전에 공감해 이번 일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국내에서 태성만큼 깊은 역사와 뛰어난 업적을 가진 기업도 드물죠. 훌륭한 분들과 함께하게 돼 무척 영광스럽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렇게 멀쩡한 말을 근사한 자세로 서서 지껄이다니, 주인은 그의 연기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단둘이 있을 때면, 엉뚱한 말과 행동으로 자신을 당황시키던 평소의 그와는 완전히 다른 인격인 것 같았다.

    그 순간, 독경이 멍하니 자신을 보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며 한껏 눈을 휘었다.

    주인이 그런 그를 따라 활짝 웃으며, 직원들을 향해 함께 인사를 건넸다. 성공적인 취임식이었다.

    퍽!!

    같은 시각, 상현은 험악하게 구겨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노트북을 책장 쪽으로 집어 던졌다. 노트북은 바닥에 떨어지며 모서리가 깨지고 금이 가더니 결국, 팍 꺼지고 말았다. 그 위로 책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는 생중계되는 취임식을 보다 기어이, 폭발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분노의 불길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상현이 질투와 경멸과, 원통함을 가득 담은 눈으로 산산이 부서진 노트북을 응시했다.

    금이 간 채 시커멓게 죽은 화면 속에서 그린 듯 눈부신 미소를 띤 남녀가 사람들의 환대를 받는 모습이 환영처럼 일렁였다.

    그들이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원흉이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내가 받았어야 할 환호, 나에게만 주어졌던 부와 명예가 송두리째 그들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은 자신은 초라하게 빛바랜 채 하루하루 말라 갔다.

    ‘X발, 이렇게 끝날 거 같아? 내가, 이 현상현이 이렇게 포기할 거 같냐고.’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가시처럼 삐죽한 울분을 따갑게 삼키며,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제게서 모든 것을 앗아 간 그들을 결단코, 가만두지 않으리라는 복수심이었다.

    닳아 없어질 만큼 바득바득 이를 갈며, 상현은 임원들에게 차례로 연락을 돌렸다. 지금이야말로, 단 한 명이라도 더 제 편으로 포섭하는 것이 절실한 순간이었다.

    ***

    아무리 현 회장이 내부 정리를 한 뒤 주인의 인사를 단행했다고는 하나, 급격한 변화에 불만이 생기지 않을 리는 만무했다.

    특히, 임원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비리와 부정을 뽑겠다는 그녀의 취임 일성이었다. 그 발언이 겨냥한 의도가 너무나도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남몰래 잘 해 먹으며 회사에 손해를 끼친 이들에게 호시절은 끝났다는 선언이자, 경고였다.

    거기에 더해, 상현의 물밑 접촉이 그들을 더욱 기고만장하게 만들었다.

    그가 부친의 마음을 어떻게든 돌려 회사에 복귀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던 것이다.

    어떻게든 조금만 버티면 이 불합리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으며, 임원들은 고개를 뻣뻣이 든 채 첫 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심드렁하다 못해 느른하기까지 한 표정을 지으며, 독경이 맨 마지막으로 회의실 안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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