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58화 (58/76)
  • #58화. 협상 (1)

    그사이 총회가 시작됐다. 지루하고 뻔한 시간이었다.

    참석한 주주들은 대부분 회장 일가의 친인척, 혹은 사내 임원처럼 특수 관계인이거나 사측과 친화적인 투자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안건이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주인과 독경은 느긋하게 앉아 흘러가는 회의를 심드렁하게 지켜보았다. 특별히 반대를 하거나 이의를 달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점이, 상현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귓가에 초침이 째깍째깍 울리는 것 같은 환청이 들렸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회의가 거의 끝날 무렵, 주인이 손을 들며 발언권을 얻었던 것이다.

    “주총은 이쯤에서 마무리될 것 같으니,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죠?”

    모든 이의 시선이 도발적인 미소를 그리고 있는 젊은 여성에게로 쏟아졌다. 그녀가 상석에 앉은 현 회장과 상현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최근 사내에 이상한 소문이 도는 걸 아십니까?”

    “무슨 소문?”

    내부 사정에 깜깜한 한 중년 투자자가 혼잣말을 했다.

    주인이 뱀의 혓바닥처럼 교활하고 동시에, 탐스럽게 붉은 사과같이 매혹적인 입술을 서서히 뗐다.

    “김강석 비서실장이라고 태성에서 일하던 사람이 몇 년 전 저수지에서 죽은 채 발견됐죠. 그런데 최근에 그 사건과 관련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 죽음에 현상현 부회장이 관련됐다고요.”

    쾅!!

    일순 장내를 감돌던 괴괴한 공기를 둔탁한 굉음이 뒤덮었다. 상현이 몸을 부들부들 떤 채 탁자를 내려치며 일어섰던 것이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증거 있어? 함부로 사람 모함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나 떠드는 거야?”

    그때, 독경이 슬며시 냉소를 띠며 일어섰다.

    “일단, 이것부터 들어 보시죠.”

    그가 휴대 전화 화면을 몇 번 툭툭 누르더니, 음성 파일을 크게 재생했다.

    소리는 차 안에서 녹음된 것처럼 미세한 진동음을 냈으나, 크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잠시 뒤, 성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년이 보자 보자 하니까, 분수도 모르고 설치지? 너도 김 실장처럼 저수지에 처박혀 볼래?]

    좌중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독경도 어느새 냉소를 거두고는 살기 어린 눈을 빛내며 전화기를 한 번 더 건드렸다.

    [생각해 보면 김 실장 아저씨만큼 일 잘하는 사람도 드물어, 그렇지? 지금 일하는 애들 보면 절로 후회가 된다니까. 근데 그땐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아저씨가 내 약점을 잡고 협박하더라고. 아버지한테 이른다고....]

    상현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악을 썼다.

    “하! 저게 난지 어떻게 알아? 너희들이 조작한 거 아냐?”

    상현은 그녀가 차에서 당시의 대화를 녹음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속으로는 몹시 당황했으나, 순순히 인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음성 전문가에게 맡겨 보면 알겠죠, 오빠.”

    주인이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가 현상현 부회장을 오빠라 부르자, 주주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기심 어린 이목을 느낀 그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다시 인사드리죠. 전, 현태성 회장님의 차녀 현도경입니다. 지금은 미래투자 이사직을 맡고 있죠.”

    그녀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아, 하며 낮은 탄성을 질렀다. 주인이 약간 소란한 장내가 가라앉기를 기다린 뒤, 본론을 꺼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이유는, 제 오빠이자 태성그룹 부회장인 현상현의 비위 사실을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현 부회장은 수많은 사건 사고로 태성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힌 사람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공금을 횡령한 사실이 언론에 의해 밝혀졌죠. 게다가 이번에는 불미스럽게도, 살인 사건에까지 연루됐다는 의혹을....”

    “그만!!”

    현 회장이 회의장이 떠나갈 듯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격분에 휩싸인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늘 총회는 여기까지 하지. 넌, 따라와라!!”

    현 회장이 벌떡 일어서며 주인에게 살벌한 눈짓을 보냈다. 그녀가 순순히 뒤를 따라나섰다. 독경이 그 뒤를 경호하듯 바짝 붙었다.

    마지막으로 상현이 두 사람의 뒤통수를 지그시 노려보며, 자리를 떴다. 등 뒤로 부랴부랴 폐회를 선언하는 소리가 들렸다.

    ***

    회장실로 돌아온 현 회장은 최측근을 빼고 보는 눈이 사라지자, 갑자기 뒤를 휙 돌더니 손을 번쩍 쳐들었다.

    “이, 배은망덕한 년이!!”

    그가 욕설을 지껄이며 주인의 뺨을 때리려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독경이 앞을 막으며 말라비틀어진 손목을 덥석 낚아챘다.

    “추태는 적당히 부리시죠?”

    “뭐? 추태? 너 그 손, 당장 안 놔?”

    상현이 눈을 부라리며 달려들었다. 꼴에 제 아비는 챙기는 시늉을 한다 싶어, 독경은 코웃음을 쳤다.

    그 순간, 현 회장이 크고 시커먼 손아귀를 신경질적으로 뿌리치고는 역정을 냈다.

    “저년 빼고 다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서슬 퍼런 기운에 상현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독경은 바위처럼 꿈쩍 않고 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현 회장도 지지 않고 쏘아보았다.

    그러자 주인이 눈짓으로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독경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혹시나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저 늙은이가 그녀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나 염려됐던 것이다.

    그런 그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주인이 나직이 설득했다.

    “괜찮으니까 나가도 돼.”

    독경이 잠시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무저갱처럼 아득한 눈을 현 회장에게 고정하며 경고하듯 읊조렸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소리 질러요. 문 앞에 있을게요.”

    “응, 알겠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그가 뚜벅뚜벅 방을 나갔다.

    부녀만 오롯이 남은 공간에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의외로 현 회장이었다.

    “개새끼 하난 잘 키웠구나.”

    그가 순전한 감상을 밝혔다.

    “다 아버지께 배운 거죠.”

    주인이 옅게 미소 지었다. 낯선 모습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부친 앞에서 저런 여유로운 웃음을 보인 적이 없었다.

    현 회장이 그런 딸을 지그시 응시했다.

    언제까지나 어린 애송이인 줄로만 생각했는데, 눈앞의 아이는 어느새 자신과 대등한 눈높이까지 훌쩍 자라 버렸다.

    갑자기 그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만큼이나 낯설었다. 표정과 눈빛에 자신감과 열정과, 욕망이 한데 뒤섞여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데도,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 여우를 쉽게 이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내가 정말 김 실장의 죽음이 미심쩍다는 걸 모를 거라 생각했니? 네가 그걸 약점으로 잡는다 해서, 내가 눈 하나 깜짝할 거라 믿었느냔 말이다.”

    현 회장이 새된 음성으로 상대를 몰아세웠다. 주인이 흠칫 몸을 떨었다.

    스무 해 넘게 자신을 보좌한 놈이었다. 아무리 무심한 주인이라도 제 개새끼가 어떤 종자인지 모를 리 없었다.

    현 회장이 보기에도 강석은 그리 허망하게 죽을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현 회장은 그 일을 그냥, 덮어 버렸다.

    그것은 꽤 본능적인 결정이었다. 이 일을 더 파서는 안 된다는 경고음이 머릿속에서 윙윙 울렸다.

    그래서 때로는 모르는 것이 약인 일도 있는 법이라 스스로를 속이며, 외면했다.

    그러나 자신만 모른 척하면 된다고 여겼던 일을, 딸이라는 년이 나타나 끄집어냈다. 그것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이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십 년을 수족처럼 부리던 사람이 개죽음을 당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사람은 누구나 때가 되면 죽는 법이다.”

    주인의 날 선 비난에 현 회장이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김 실장님이 아버지께 바친 충성이 아깝네요. 그분은 마지막까지 당신을 위해 일했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하얗게 바랜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비통한 어조로 말했다.

    “오빠가 왜 김 실장님을 죽여야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현 회장의 미간에 더욱 깊은 주름이 그어졌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질문을 던지는 순간, 열지 말아야 할 무언가를 열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던 탓이다.

    “김 실장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네 오빠가 관련됐다는 증거는 없다. 경찰 조사도 그리 결론 나지 않았니? 괜한 분란 만들지 말고 원하는 걸 말해라. 섭섭지 않게 챙겨 주마.”

    “하하, 제가 원하는 게 뭔지 알면 뒤로 넘어가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주인이 광고에 등장하는 연예인처럼 청량하게 미소 지었다. 현 회장은 절로 제 아내인 박은아를 떠올렸다.

    딸은 엄마를 닮아 미인이었다. 그러나 훨씬 더 성숙하고 농염한 분위기를 풍겼다. 잘만 키웠다면 좋은 곳으로 시집보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자꾸 본질을 흐리지 마세요!”

    주인이 따끔하게 호통을 쳤다. 현 회장이 공기를 가르듯 앙칼진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를 꺼내 던지듯 내려놓았다.

    “직접 보세요! 마지막까지 김강석 실장님이 아버질 위해 준비한 거니까.”

    주인이 그의 이름을 강하게 발음했다. 현 회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서류는 온통 영어로 작성돼 있었다.

    친절한 설명이 뒤따랐다.

    “현상현이 해외에 설립한 법인을 통해 공금을 가로챘다는 사실은 당연히, 아시죠? 그 증거 자료가 바로 김 실장님에게서 나온 거였어요. 실장님은 일찍부터 그 사실을 눈치채고 비밀리에 자료를 모았어요. 기사에는 한 곳만 나왔지만, 실은 그보다 더 많이 세웠거든요.”

    주인은 목이 말랐는지 상대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탁자 위에 놓인 물을 벌컥 마셨다. 그러고는 생기를 되찾은 입술을 열었다.

    “현상현은 김 실장님이 자신의 뒤를 캔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궁지에 몰았어요.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가 죽기 전, 제게 이 자료를 넘겼고요.”

    현 회장이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김 실장은 왜 나한테 직접 이걸 주지 않았지?”

    ‘그건 그가 이 서류를 불화의 씨앗으로 쓰길 원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주인은 속말을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답했다.

    “그건 저도 몰라요. 죽은 사람한테 물어볼 순 없으니까요. 아니면, 제가 오빠를 저지할 유일한 ‘대안’이라 계산했을 수도 있죠.”

    “무슨 뜻이지?”

    현 회장이 잿빛 눈을 가늘게 떴다. 주인이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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