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57화 (57/76)

#57화. 등장 (2)

“아, 아니요! 없습니다.”

부친의 날 선 추궁에 상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한테 감추는 게 있으면, 넌 죽는다! 명심해라!”

현 회장이 주름진 두 눈을 형형하게 부릅뜨며 엄포를 놓았다. 상현이 마른침을 삼켰다.

“저, 아버지.... 아무래도 이번 주총에 걔들이 끼어들 것 같은데....”

“일단은 여는 수밖에. 대신 관계자 외엔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 못 하게 해라.”

“네, 알겠습니다!”

상현이 제 부친에게 고개를 깍듯이 숙이고는, 황급히 사라졌다. 현 회장이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쓴입을 다셨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상현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번뇌했다. 결국, 아버지마저 주인과 독경의 존재를 알고야 말았다.

아래에서 처리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게다가, 강석의 죽음을 의심하며 자신을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그 냉혹한 잿빛 눈을 떠올리며 상현은 몸서리쳤다. 자꾸만 궁지에 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중우가 들어왔다.

“야, 청담파 애들한테 연락해서 사람 좀 막으라고 해.”

이 패를 꺼내기는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도 그들을 막지 못하면 자신이 벼랑 아래로 추락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누구...?”

중우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누구겠냐? 그 미친 연놈이지. 분명히, 이번 주총에 그 새끼들이 끼어들 거야. 그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해.”

상현이 어금니를 박박 갈았다. 중우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꾸 그쪽이랑 엮이는 건, 아무래도 불안합니다만....”

“뭐라는 거야, 미친 새끼가.... 양 사장 통해서 소개해 준 건 너잖아....”

“그때는 김 실장님 건 때문에 그런 건데....”

중우의 얼버무림에 상현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나도 알아, X발. 깡패 새끼들한테 코 꿰면 안 되는 거. 근데, 이번만큼은 그 새끼들 꼭 막아야 해.”

***

임시 주주총회 당일 아침, 선하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딸기 스무디를 쪽쪽 빨며 펜트하우스 주변을 서성였다.

평소와는 달리, 거리는 이상하게도 약간의 위화감이 감돌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험상궂은 사내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 말이 맞았네.’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난밤, 독경은 선하에게 아침 일찍 주변을 살피라는 지시를 내렸다. 틀림없이 태성 쪽에서 방해 공작을 벌일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선하가 독경에게 전화를 걸어, 은밀히 상황을 전했다.

“형님 말씀이 맞았어요. 여기 청담파 애들 쫙 깔렸거든요.”

통화를 마친 독경은 통창에 기대서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파에 앉아 기다리던 주인이 물었다.

“선하 씨가 뭐래? 그 사람들 있대?”

“네, 쫙 깔렸대요.”

그가 가소롭다는 양 픽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어떻게 남매가 이렇게 다를 수 있죠? 멍청한 유전자가 현상현 쪽으로 다 쏠렸나?”

독경이 한껏 조소를 머금은 채 비아냥거리며 소파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주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강렬하게 등장하죠, 뭐. 선배는 별로겠지만, 난 주목받는 거 싫지 않거든요. 기선 제압도 할 수 있고.”

그녀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정찰을 완수한 선하가 올라왔다.

독경은 다시 그에게 몇 가지 지시 사항을 더 내리고는,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독경이 주로 이용하는 고급 세단이 거리로 나오자, 주변에서 대기 중이던 검은 차들이 일제히 바짝 추격하기 시작했다.

뒤따르는 차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고급 세단은 유유히 도로 위를 질주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태성 본사로 향해야 할 차가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이를 눈치챈 미행자들이 방향을 바꾸려 했으나, 이미 늦은 지 오래였다.

그들이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던 그때, 고급 세단이 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뒤쫓던 차들도 얼떨결에 따라 섰다.

그곳은 경찰 지구대였다. 차에서 내린 선하가 재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경찰 몇 명을 데리고 나왔다.

“아, 글쎄 저 차들이 절 막 쫓아왔다니까요. 이유도 없이. 블랙박스 확인해 보심 되잖아요.”

선하가 기합을 넣듯 요란스럽게 떠들었다. 경찰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짙게 선팅 된 차 안을 기웃거렸다.

정장을 입은 남자들은 울상을 지으며 도망가지도, 그렇다고 떳떳이 나서지도 못한 채 고개만 푹 수그렸다.

***

태성그룹 본사 주변 또한, 촘촘한 경비로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본사에서 직접 고용한 경비 용역들이 회사 입구를 막아선 채, 오가는 사람들을 매서운 눈초리로 감시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방만한 경영에 대한 책임을 물으러 온 소액 주주들은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설득하고, 따지고, 고함을 질러도 검은 양복을 입은 건장한 무리는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입장 인원이 제한돼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대관절, 이게 요즘 같은 시대에 일어날 일입니까?”

누군가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때, 아비규환 속으로 새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느긋하게 들어섰다. 그리고 멈춘 차에서 한 쌍의 남녀가 내렸다.

정갈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그런데도 우아하고 화려한 분위기를 숨길 수 없는 이들이었다. 두 사람이 여유 있는 걸음으로 정문 앞에 섰다.

보안 담당자 중 제법 직급이 높아 보이는 이가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오늘 주주총회에 오셨습니까? 인원에 제한이 있어 입장이 힘드십니다.”

독경이 우락부락한 남자의 얼굴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나직하지만 힐난하는 것처럼 서늘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태성도 참 대단하군요. 합쳐서 지분율이 10%가 넘는 주주를 이렇게 홀대하다니....”

주변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수화기 너머로 쩔쩔매는 말소리가 희미하게 샜다.

독경이 말없이 보안 담당자에게 휴대 전화를 건넸다. 전화기를 받은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죄송합니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들어가시죠. 아, 그런데 여자분께서는 주주 명부에 등록되지 않아 참석하실 수 없답니다.”

독경의 눈썹이 눈에 띄게 들썩였다. 불쾌해하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주인은 그저 기품 있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주인과 독경은 주주총회가 열리는 회의장 앞에 나란히 섰다. 거대하고 육중한 문이 두 사람 앞을 강력히 막아서고 있었다.

그녀가 그 문을 무심한 눈길로 훑었다. 결단코, 오고 싶지 않은 자리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결국, 오고야 말았다.

“우리가 제일 마지막인 모양이네요.”

그가 흥분을 감출 수 없다는 양 들뜬 얼굴로 말했다.

“이독경.”

주인이 한없이 침잠해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 안에 들어가면 아무도 우릴 반기지 않을 거야. 그래도 괜찮아?”

독경이 어딘가 깊은 애상에 잠긴 섬세한 옆선을 슬쩍 보더니, 악동처럼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뾰족한 송곳니가 오늘따라 유독, 도드라졌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라고요? 아니요, 제대로 칼춤 한번 추죠. 망나니짓은 전문이잖아요.”

오만불손한 독경의 너스레에 주인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여기까지 왔는데 물러설 순 없지. 그럼, 가 보자!”

그녀가 한 발을 앞으로 힘껏 내디뎠다. 그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띤 채 뒤에서 속삭였다.

“그거 알아요? 난, 선배가 나처럼 이상한 인간이란 게 진짜 미치도록 좋아요!”

귓가를 울리는 그 말에 주인이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오른쪽 문손잡이를 힘껏 밀었다. 독경도 왼쪽 문손잡이를 동시에 잡아 열었다.

문이 열리고 회의장 안으로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들어서자, 사람들은 위풍당당한 자태의 그들을 주목했다.

그동안 열린 주총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얼굴들이었다.

참석자들의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다들 머릿속으로 두 사람의 정체를 추측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주인이 그런 그들을 느긋하지만 거만한 눈길로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때, 사색이 된 한 남자가 그들 앞을 막으며 어금니를 짓씹었다.

“현주인, 너 여기가 어디라고....”

상현이었다. 분명 어떻게든 막으라는 지시를 내렸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는 아주 당당하게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때, 그녀의 뒤에 선 독경이 칼날처럼 긴 눈으로 자신을 겨누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게 맞은 부위가 갑자기 욱신거리며, 온몸이 오싹해졌다.

한밤중 깊은 산속에서 맹수를 만난다면 이런 기분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상현이 본능적으로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무시하며, 불청객들을 향해 각을 세웠다.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적의로 가득 찬 질문에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청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알아요, 난 아직 주주 명부에 오르지 않아서 참석할 수 없죠. 그래서 오늘은 대리인 자격으로 왔어요. 일만의.”

그녀가 종이를 팔랑거리며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상현이 두 눈을 끔뻑이며 재빨리 글씨를 읽었다. 그것은 위임장이었다. 일만 차덕균 회장의....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차 회장도 태성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현은 독경이 일만에서 잘나간다는 것은 알았지만, 차 회장과도 막역한 줄은 몰랐기에 적잖이 경악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저 요사스러운 계집애가 선뜻 위임장을 받아 낼 만큼 두 남자를 잘 구워삶았다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어찌 됐든, 이제 그녀가 참석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상현이 입술을 꽉 깨물며 옆으로 물러섰다. 패잔병도 이보다 더 비참하고 굴욕적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주인이 참담한 표정으로 비켜선 그를 향해 고개를 까닥거리고는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를 독경이 비웃음을 슬슬 흘리며 따랐다.

이 모든 광경을 현 회장은, 매서운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주인이 그런 그와 눈을 마주쳤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였다. 멀리서도 그의 주름이 더 짙고 깊어졌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당연히, 동정심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흘렀구나, 하는 감상만 새삼 떠오를 뿐이었다.

그녀가 제 부친을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그러나 그는 인사를 받는 대신, 그저 벌레를 대하듯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딸을 외면했다.

그리고 그 순간, 현 회장은 자신을 건방지게 응시하는 또 다른 얼굴과 마주했다. 독경이었다.

저 근본 모를 종자는 뻣뻣하게 얼굴을 쳐들고는 사나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현 회장은 처음으로 그의 실물을 목도하며, 제 판단을 약간 수정했다. 그저 시정잡배쯤으로 여겼으나, 온몸에서 뻗치는 기운이 남달랐던 탓이었다.

‘보통 놈은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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