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등장 (1)
“선배, 미래투자 이사잖아요? 벌써 까먹었어요?”
독경이 짐짓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주인이 고개를 더욱 기울였다.
“그건 그냥 금장 쪽을 속이려고 한 거지, 진짜 직함은 아니었잖아. 그리고 계약할 때도 그런 조항은 없었고....”
“아, 안 그래도 계약서는 이 비서님이 다시 작성 중이에요. 나중에 사인만 하면 돼요.”
“왜 갑자기 나한테 높은 자리를 주는 건데?”
“선배....”
독경이 긴 다리를 꼬며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음험하고 불경스러운 속내를 드러냈다.
“이왕 들킨 거 좀 빨리 움직이죠? 현상현이 우리 정체를 알았다는 건, 현태성 귀에도 곧 들어갈 거란 의미니까. 분명히 무슨 대책을 내놓을 거예요. 그 전에 우리가 선수를 쳐야 해요.”
“음, 좋아.”
주인이 이지적인 눈을 내리깔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잠시 뒤, 그녀가 슬며시 운을 뗐다.
“이번 임시 주총에 참석하자.”
“가서?”
“이번에야말로 진짜 현상현을 끌어내려야지. 폭탄은 준비됐으니까, 밑 작업만 조금 하면 돼.”
주인이 탁자 위에 자신의 휴대 전화를 탁 놓으며 비장하게 말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얻은 것이 효과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으면서.
그 말에 독경이 긴 눈을 가늘게 뜨며 혀끝으로 송곳니를 쓸었다. 주인이 호응하듯 부드럽지만 어딘가 섬뜩한 미소를 그렸다.
선하가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어쩐지 오금이 저렸다.
***
“근데, 선배....”
선하가 떠난 뒤, 독경이 나른하게 주인을 불렀다. 그러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장난스럽게 비볐다.
“왜?”
주인이 들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제 어깨에 기댄 날렵한 턱을 손끝으로 쓸었다.
“승진 턱 안 낼 거예요?”
독경이 기대감을 가득 품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주인이 피식 웃었다.
“난 승진 원한 적 없는데? 그리고 당사자도 납득 못 할 승진이라니, 좀 이상하지 않아? 여기가 다단계 회사도 아니고....”
“음, 그런 사소한 문제는 넘어가죠? 지금 중요한 점은 선배가 승진을 했다는 거예요.”
독경이 은근슬쩍 그녀의 지적을 무마하려 했다.
“김주환 대표님, 그런 식으로 사업하면 망해요!”
주인이 그의 양 볼을 제 손바닥으로 꽉 누르며 마주 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망하죠, 뭐. 어차피 이 일도 슬슬 질려 가는데....”
“뭐?”
“나, 결심했어요. 이번 일만 끝나면, 은퇴할 거예요. 그리고 온종일 선배랑....”
“무슨, 말도 안 되는....”
주인이 황당함과 당혹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흘겨보자, 독경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그렇다는 거예요. 선배가 한턱 쏘기 싫다면 내가 쏘죠, 뭐.”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부엌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샴페인 병과 잔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오늘을 위해서 준비했죠!”
“못 말려, 정말.”
“하하! 우리 건배할까요?”
영롱한 금빛의 샴페인을 잔에 따라 건네며 독경이 제안했다.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맞부딪혔다. 쨍, 하는 맑고 고운 소리가 거실 안을 채웠다.
“축하해요, 선배.”
“고마워.”
두 사람이 동시에 샴페인을 가볍게 들이켰다.
“맛있네.”
달콤하고 알싸한 맛을 음미하며 그녀가 혀로 입술을 적셨다. 그가 그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말문을 열었다.
“아까부터 말이죠....”
독경이 말끝을 길게 늘이더니, 조금 짜증스럽다는 양 작게 지껄였다.
“자꾸 귀엽게 구는데, 이거 나 꾀는 거죠?”
주인이 긴 속눈썹을 두어 번 깜박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거 봐, 지금도 그러잖아요.”
“넌, 진짜 이상해. 제정신 아닌 거 같아.”
주인이 허탈하게 웃으며 그를 밀어냈다. 그러자 독경이 더욱 바짝 다가서며 빙글빙글 웃었다.
“나 미친놈인 거 다 알면서 왜 그래요, 새삼스럽게.”
그 말에 다시 헛웃음을 짓던 그녀가 뱀처럼 미끈하고 유연하게 그의 무릎 위를 타고 올랐다.
그가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느긋하게 기대며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상대를 뚫어지게 감상했다.
“알지, 너무 잘 알아서 문제야....”
주인이 그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샴페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고는 진하게 키스를 했다.
독경이 게걸스럽게 그녀의 입술과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술을 탐닉했다. 한 방울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고 또 집요하게.
“더 마실래?”
그녀가 물었다. 그가 애간장이 녹을 것처럼 갈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더 줘요. 아니, 모조리 다 줘요.”
그 말에 그녀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는 정말이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어둑하고 비좁은 자취방에서 마음까지 내 달라며 떼를 쓸 때부터 알았지만, 독경은 깨진 독처럼 그녀의 애정을 끝없이 요구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주인은 그것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만이 그의 갈증을 해소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이한 확신도 들었다.
상념에 잠긴 채 자신의 머리카락만 애꿎게 배배 꼬는 주인의 뺨을 독경이 코끝으로 툭 건드렸다.
“무슨 생각 해요?”
독경이 안개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을 관찰하는 검은 시선이 느껴졌다.
“내일 할 일이 뭐가 있나 해서....”
주인이 무심하게 답하고는, 곧바로 덧붙였다.
“오전까지는 좀 여유가 있는 것도 같고....”
어딘가 아리송한 말을 그는 단박에 알아들었다. 그녀와 맞댄 하체가 꺼덕였던 것이다.
주인이 다시 샴페인을 머금고는 입을 맞췄다. 독경이 그녀의 뒷덜미를 제 손으로 꽉 누른 채 허겁지겁 몽롱하게 퍼지는 술을 받아 마셨다.
그녀가 이번에는 아예 샴페인 병을 통째로 들어 마셨다. 황홀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그의 눈이 순간, 음욕으로 번뜩였다.
주인의 입가에서 흐른 술 몇 방울이 턱 선을 지나 목덜미를 타고 내린 뒤, 이내 쇄골에 고였던 것이다.
독경이 하릴없이 입을 벌리며 쇄골에 고인 금빛 액체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흐른 자국을 서서히 혀로 핥아 거슬러 갔다.
“음....”
술병에서 입술을 뗀 주인이 낮게 신음했다. 그러자 독경이 그녀의 마른 듯 탄탄한 허벅지를 꽉 그러쥐다 치마를 걷어 올렸다.
주인이 섬세한 손길로 그의 바지 지퍼를 내린 뒤, 단단히 부푼 그곳을 손끝으로 가볍게 쓸었다.
“아!”
그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침대로 갈래요?”
독경이 물었다.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여기서....”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굵직한 손가락을 밀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주인이 반쯤 눈을 감은 채 독경을 응시하며, 투박한 손끝을 혀로 살살 핥았다.
“후.”
그 광경을 주시하는 그의 얼굴이 흥분으로 점점 일그러졌다. 그 순간 그녀가 손가락을 끝까지 덥석 삼키더니, 입술을 동글게 오므려 빠르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혀와 점액이 뒤섞인 야릇한 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에 선명히 닿았다.
독경이 손가락 하나를 더 넣었다. 주인이 입안을 가득 채운 그것들을 잘근잘근 깨물다, 다시 쭉쭉 소리를 내며 빨았다.
잠시 뒤, 그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손가락들을 쑥 뺐다. 그러자 주인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렀다.
“하아....”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독경이 그녀의 아래 속옷을 비집고는 충분히 젖은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읏!”
갑자기 밀려드는 고통스러운 쾌감에 주인이 신음했다.
그러자 그가 짓궂게도 손가락 하나를 더 삽입했다. 손가락 세 개가 버거웠는지, 그녀는 허리를 바짝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핏줄이 불거진 채 꿈틀거리는 상대의 성기를 꺼내 꽉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샜다.
“하!”
독경이 그녀의 뒷덜미를 커다란 손으로 붙든 채 얼굴을 똑바로 보며 빠르게 삽입질을 했다. 주인 또한 질 수 없다는 양 그의 눈을 노려보며 성기를 감아쥔 손을 세게 흔들었다.
질척거리는 소음이 점점 가파르게 요동치다, 이내 터진 신음 사이에 섞였다.
“흐, 흐읏....”
주인이 그의 무릎 위에서 둔부와 허벅지 안쪽 근육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후우... 선배....”
그 모습을 그악스럽게 보던 독경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는 그녀의 손 위에 정액을 흩뿌렸다.
***
그로부터 얼마 뒤, 태성그룹 사내 게시판에 이상한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김강석 비서실장의 죽음에 현상현 부회장이 연관돼 있다는 요지의 글이었다. 워낙 흉흉한 주제였기에 다들 쉬쉬했지만, 전 사원에게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악재로 안팎 모두 위태로운 상황이었기에, 이 일도 공론화되면 태성은 회생 불가능한 지경에 이를지도 몰랐다.
보고를 받은 현 회장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영 찜찜했다.
불리한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스스로가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현 회장은 태어나 처음으로 제 나약함을 의심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한 적 없는 질문이었다.
그랬다. 그는 지금, 일이 벌어지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태풍 속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비바람에 휩쓸린 채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는,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린 사진 중 하나를 집었다.
단발머리를 한 차분한 인상의 여자와 까무잡잡한 피부의 건장한 남자가 대화를 나누는 사진이었다.
한 놈은 제가 내쫓은 자식이었고, 다른 놈은 죽은 줄 알았던 잡놈이었다.
오래전, 머릿속에서 지운 이들이 함께 나타났다. 하필 지금, 이 시기에.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분명, 이 두 사람이 있을 터였다.
‘목적은 하나겠지? 태성....’
현 회장이 잡념에 빠졌다. 두 사람에게 가장 큰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태성을 증오하는 마음이리라.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제 딸이 자신을 경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구 덕분에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사는지를 안다면, 감히 품을 수 없는 감정이라고 현 회장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배은망덕한 딸이 덜떨어진 아들놈보다 본인을 더 닮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분고분한 태도와 눈빛 속에 숨겨 둔 집요하고 냉철한 성정을 그는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그녀가 싫었다. 어린애답지 않은 차분함이, 여자애 같지 않은 대범함이.
동족 혐오와 위기의식 어디쯤에서 현 회장은 주인을 멀리했다.
그에 반해 아들인 상현은 오히려 다루기 편했다. 사고 치는 일만 잘 관리하면 구슬리기가 한층 수월했다.
머리가 나쁘니 제 위치를 위협할 거리도 안 됐다. 그렇게 그는 오랜 시간 큰 위기 없이 왕좌를 굳건히 지켰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위험 요소를 방치한 대가를 하나둘 치러야 할 때가 오고 있었다.
현 회장은 주인을 직접 만나 의중을 떠보든, 회유를 하든, 협박을 하든 뭐라도 할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상현이었다. 그는 상처가 희미하게 남은 얼굴로 물었다.
“보고, 받으셨어요? 미래투자 현도경 이사가 주인이라는 거...?”
쾅!!
현 회장이 제 책상을 주먹으로 세차게 내려쳤다. 상현의 두 눈이 겁먹은 듯 커졌다.
“너야말로 무슨 꿍꿍이냐? 김 실장, 진짜로 네가 죽였어?”
궁지에 몰린 상현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현 회장이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아! 아니에요, 전. 경찰 조사도 그렇게 나왔잖아요. 제가 김 실장 아저씨를 무슨 이유로 죽였겠어요. 아버지, 전 절대 아닙니다. 믿어 주세요!”
상현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현 회장이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물었다.
“너, 나한테 감춘 게 있냐? 빨리 말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