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반격 (3)
새빨간 스포츠카를 배경으로 등장한 검은 인영은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가 긴 다리를 죽 뻗으며 성큼성큼 다가오자, 검은 베일을 벗듯 서서히 얼굴이 드러났다. 독경이었다.
그는 말끔하게 뒤로 넘겼던 앞머리를 잔뜩 흐트러뜨린 채, 엉망으로 구겨진 셔츠를 입고는 차 앞까지 금세 당도했다.
“저, 저 새끼가 여길 어떻게...?”
상현이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주인이 다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때, 운전기사가 험악한 표정으로 안전띠를 풀며 말했다.
“부회장님께선 여기 계십시오.”
차 밖으로 나선 기사는 경호 업무도 겸하는지, 제법 체구가 컸다. 그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독경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독경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손놀림으로 상대의 목젖을 가격해 충격을 준 뒤, 꽉 움켜쥐었다.
“컥!!”
두툼한 목이 그의 커다란 손에 잡혔다. 숨이 턱 막히는 소리가 차 안에까지 들렸다.
하지만 독경은 속눈썹 하나 깜박이지 않은 채, 그를 질질 끌고 오더니 차 보닛에 냅다 꽂아 버렸다.
쾅!!
굉음과 동시에 차가 덜컹 흔들렸다.
상현이 전방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침만 꿀꺽 삼켰다. 앞 유리 너머로 고통에 일그러지는 운전기사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인 탓이었다.
독경이 그의 얼굴을 차체에 뭉개며, 어둑한 차 내부를 주시한 채 웃었다.
눈에는 광기와 살기가 줄줄 흘러넘치는데, 입은 안이 다 보일 정도로 활짝 벌린 것이 괴기스러운 느낌마저 주었다. 악귀가 따로 없었다.
이윽고 그가 손에서 힘을 빼자, 기절한 운전기사가 바닥으로 스르륵 쓰러졌다.
독경이 그런 남자를 구둣발로 툭 친 뒤, 지나갔다. 그러고는 열려 있던 운전석으로 상체를 쑥 들이밀었다.
그가 뒷좌석을 보며 송곳니까지 전부 드러날 정도로 환히 웃었다. 천진한 악의로 똘똘 뭉친 미소였다.
“안녕! 현상현.”
“이, 이 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독경이 긴 팔을 순식간에 뻗어 상현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짓눌렀다. 머리통을 터뜨리려는 듯 어마어마한 악력이 얼굴에 전해졌다.
“으, 으윽....”
상현이 굵은 손가락 틈으로 신음을 흘리며, 독경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쳤다.
그때 독경이 성가시다는 양 그의 머리를 차창에 쾅, 박아 버렸다. 머리를 세차게 부딪치자, 상현은 충격으로 잠시 멍해졌다.
독경이 짓씹듯 나직이 말했다.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상대가 얌전해진 틈을 타, 독경이 주인을 챙겼다.
“괜찮아요?”
“응....”
걱정이 묻어나는 물음에 주인이 안심하라는 양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안 괜찮은 것 같은데....”
독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약한 피부 탓에 상현의 손자국이 희미하게 남은 것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다시 눈살을 슬쩍 찌푸리며, 움켜쥔 머리를 다시 창에 던지듯 박았다.
“으으....”
상현이 눈을 반쯤 감은 채 신음했다.
“선배는 나가 있을래요?”
그가 운전석에서 잠금장치를 풀며 말했다. 그녀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 문을 열고 나갔다.
밖은 어느새 노을로 조금씩 타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린 상현도 잽싸게 문을 열고는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얼마 가지 못하고는 풀썩 고꾸라졌다. 독경이 한 발 한 발 천천히 다가갔다.
“이 개새끼야! 나한테 이런 짓을 하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알아?”
상현이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악다구니를 썼다. 독경이 주저앉은 그와 눈을 맞추기 위해 긴 다리를 불량하게 접었다.
“상현이 형, 주인 선배 건들지 마요. 한 번만 더 이러면 저수지에 처박히는 건, 형이 될 거니까. 아,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자신이 한 협박을 고스란히, 아니 그보다 더 가증스럽게 돌려받은 상현이 대꾸도 못 한 채 숨만 씩씩 내쉬었다.
독경이 그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상현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가 잔뜩 주눅 든 상대를 조롱하듯, 삐뚤어진 넥타이를 세심하게 고쳐 주었다. 그러고는 슥 일어서더니 멀찍이 서 있는 주인을 향해 느긋하게 걸었다.
독경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제 차로 데려갔다. 주인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초라하게 굽은 상현의 등이 굴욕과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광경이 멀리서도 한눈에 보였다.
“보지 마요. 저렇게 더럽고 추한 걸 담기에 선배 눈은 귀하니까.”
그가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그녀가 그 말을 따라 시선을 거뒀다.
***
돌아가는 동안, 독경은 의외로 화를 내거나 추궁하지 않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차가 신호에 걸린 틈에,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통화 연결음이 울리기 무섭게, 곧장 전화를 받았다. 그가 명령하듯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전화를 끊어 버렸다.
“유선하, 딴 데 가지 말고 바로 와라. 할 일 있다.”
그리고 잠시 뒤, 주인을 힐끗 보며 말을 걸었다.
“내가 선배를 어떻게 찾았는지 왜 안 물어요?”
“너, 내 폰에 위치 추적 앱 깔았잖아. 그때 최 대표님께 나 대신 문자 보냈을 때.”
그녀가 심상한 말투로 읊조렸다. 독경이 멋쩍게 픽 웃었다.
“알고 있었어요?”
집에 온 독경은 곧장, 따뜻한 차를 우려 주인에게 건넸다.
“많이 놀랐죠?”
그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주인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내 잘못인걸. 미안해, 방심했어. 너야말로 나 때문에 많이 놀랐지?”
이번에는 그녀가 이마에 달라붙은 독경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뗐다. 그가 그녀의 손바닥에 제 뺨을 가져다 대며 고백했다.
“현상현 목소리를 들었을 때, 기절할 것 같았어요. 눈이 뒤집히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도 침착하려고 노력했어요. 안 그럼 선배가 다치니까....”
그 말에 주인이 옅게 미소 지었다.
“너 엄청 침착했어. 냉혹해 보일 만큼....”
“그랬나요? 다행이네요. 싸울 때는 말이죠, 흥분한 사람이 지는 거예요.”
독경이 크고 두꺼운 제 손바닥을 쥐었다 펴며 중얼거렸다.
주인은 예전에 윤희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가 선배들과 싸우는 장면을 상상했다.
분명 그는 난폭하지만, 교묘하고 집요하게 상대의 약점을 공략했을 것이다. 싸움도 꼭 타고난 성질대로 해야 직성이 풀릴 인간이었으므로.
그때 그가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푸, 하고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내가 흥분할 때는 말이죠. 선배랑 이렇게 살을 맞대는 순간뿐이에요.”
독경이 제 몸을 그녀에게 은근히 치댔다. 어이가 없어진 주인이 싱겁게 웃어 버렸다.
“이독경.”
이름을 불린 그가 새까만 눈망울로 그녀를 응시했다.
“오늘, 고마웠어.”
주인이 그의 볼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독경의 입가에 그린 듯한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턱을 감싼 뒤 지그시 입술을 붙였다.
***
독경은 그날 사건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더욱 철저하게 주인을 제 영역 아래 두며 보호하려 들었다. 사람도 붙였다. 선하였다.
“주인 누님, 잘 부탁드립니다.”
정장을 단정하게 갖춘 선하가 깍듯이 인사했다. 주인이 불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잘 쉬고 있는데, 괜히 나 때문에....”
“아니에요. 안 그래도 노는 게 슬슬 지겨워지던 참이었어요.”
그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아무리 보아도 갓 학교를 졸업한 사회 초년생처럼 풋풋하고 발랄한 느낌을 풍기는 얼굴이었다.
그런 선하가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것이 잘 상상되지 않아, 주인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때, 독경이 그녀의 의구심을 빠르게 읽었다.
“저렇게 보여도 유도 선수 출신이에요.”
“어머? 운동했어요?”
의외의 사실에 주인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네, 고등학교 때까지요. 근데 실력이 부족해서, 진학엔 실패했어요. 그래서 이리저리 방황하다 독경 형님을 만났죠, 하하!”
선하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잠시 뒤, 아련하고 쓸쓸한 미소를 띠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때, 독경 형님이 절 많이 도와주셨어요. 제 인생의 은인이시죠.”
“유선하,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이상한 데서 청담파 애들한테 쫓기느니 차라리 사람 많은 곳에 있는 게 너한테도 안전할 거다. 한번 호되게 당했으니, 현상현도 당분간은 잠잠하겠지.”
독경이 뭔가를 더 말하려던 그를 제지하고는 제 할 말만 떠들었다. 그러고는 주인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옛날 얘긴 별로 재미없으니까 넘어가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죠?”
“난 재밌는데....”
그 말에 주인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독경이 그 모습을 보며 픽 웃다가, 선하의 놀란 시선을 느끼고는 재빨리 정색했다.
“흠흠, 선배 일은 앞으로 유선하가 거들 거예요. 비서 겸 운전기사 겸 경호원 등등, 부려 먹을 수 있는 건 다 해도 돼요.”
“그건, 너무 악덕 고용주 같은데?”
주인이 양심에 찔리는지 소극적으로 반응했다. 그러자 독경이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그만큼 월급 많이 받으니까.”
진위를 확인하고자 그녀가 선하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가 웃는 낯으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잘 부탁해요. 혹시라도 제가 무리한 요구를 하면 바로 얘기해 줘요.”
“네!! 주인 누님!!”
선하가 싱글벙글 웃으며, 크게 외쳤다. 선수 출신이라 그런지 기합도 남달리 느껴졌다.
독경이 그런 상대를 마뜩잖게 훑으며 말했다.
“이제부턴 현 이사님이라고 불러라.”
“왜?”
하지만 질문이 튀어나온 곳은 선하의 입이 아니라, 주인의 입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독경을 바라보았다.
“내가 왜 이사야?”
동그랗게 뜬 두 눈이 꽤 깜찍해서, 독경은 다시 웃음이 새려는 입을 꾹꾹 눌렀다. 선하가 자신을 빤히 관찰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