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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54화 (54/76)
  • #54화. 반격 (2)

    “커, 흑.... 이... 이독경은... 거, 건들지 마....”

    주인이 마른 손으로 제 목을 틀어쥔 상현의 손을 떼려 안간힘을 쓰며 중얼거렸다. 그가 그녀의 간절한 몸짓을 비웃었다.

    “죽는 거 안 무섭다며? 왜 발버둥을 쳐? 응? 그 사고 때 너도, 그 개새끼도 죽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상현이 살기로 가득한 안광을 번뜩이며 웃었다.

    그때, 주인의 주머니 속에서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상현이 낚아채듯 꺼내더니, 액정을 확인하고는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이 새끼도 양반은 못 되네? 이렇게 연락을 다 주시고. 마침, 나도 할 말이 있었는데 대화 좀 해 볼까?”

    그가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선배!! 어디예요??]

    독경의 다급한 목소리가 차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안녕, 이독경. 아니, 지금은 김주환이라고 불러야 하나?”

    상현이 산뜻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수화기 너머로 이가 빠드득 갈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현상현!!]

    독경의 날 선 고함에 상현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래, 나다. 단번에 알아맞히다니, 좀 감격스럽네?”

    [주인 선배, 어디 있어?]

    상대의 수작질을 무시하며, 독경이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내 옆에, 잘 있지....”

    상현이 목덜미를 쥐었던 손을 슥 풀며 주인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손길에 움찔거렸다.

    [바꿔.]

    독경이 매섭게 명령했다.

    “내가 왜?”

    상현이 얄밉게 뻗댔다.

    [그편이 너한테도 좋을 테니까.]

    독경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삼키며 말했다.

    “그래, 그럼.”

    상현이 주인에게 순순히 휴대 전화를 건넸다. 그는 독경의 약점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다.

    “이독경....”

    그녀가 저도 모르게 벌벌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괜찮아요?]

    그가 침착하고 다정하게 안부를 물었다.

    “응, 괜찮아....”

    그때, 상현이 전화기를 확 빼앗았다.

    “아직은, 괜찮아. 근데 앞으론 어떻게 될지 몰라. 어느 저수지에서 시체로 발견될 수도 있거든. 다, 너한테 달렸어.”

    [원하는 게 뭐야?]

    독경이 서릿발처럼 냉혹하게 물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주식의 절반을 나한테 넘겨라.”

    상현이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구체적인 조건을 덧붙였다.

    “지금부터 정확히 삼십 분 뒤에 시간 외 대량 매도하도록. 주인인 거래가 확인되면 바로 돌려보내지.”

    [너무 촉박하군. 좋아, 그럼 다섯 시 정각에 시작하지.]

    상대의 말에 상현이 네 시 이십오 분을 가리키는 시곗바늘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래. 오 분 정도는 봐줄게.”

    [후회할 거다....]

    독경이 어둑한 동굴 안처럼 낮고 음침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개새끼 주제에 말이 많네.”

    상현이 천박한 어조로 욕을 지껄이고는 전화를 뚝 끊었다.

    ***

    그날 오후, 독경은 심히 짜증스러웠다. 방해꾼만 없었다면, 주인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말이다.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그는 셔츠만 대충 걸치고는 휴가를 반납하고 출근했다. 사무실로 들어서는 상사에게 이신이 따라붙으며 보고를 올렸다.

    “구성만 씨의 말에 따르면, 아내분께서 친척과 통화하다 위치를 노출했다고 합니다. 태성 측에서 이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들이닥쳤다는군요.”

    “그래서 그쪽에선 뭐라고 했다고 합니까?”

    “계약서를 내밀면서 여기에 사인만 하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없던 걸로 해 주겠다고 회유한 모양입니다. 구성만 씨가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한 뒤, 저희 쪽에 연락을 줬고요.”

    “분명 계약서 안에 온갖 불리한 조건을 달았겠죠. 치졸한 새끼들이니....”

    “네,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녹취록도 반납해야 하고, 비밀 유지 조항도 있었다고 합니다.”

    “쯧, 하여간 창의성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놈들이라니까.”

    독경이 혀를 끌끌 찼다.

    “일단 새벽쯤에 조용히 장소 옮겨 드리세요. 핸드폰도 당분간은 사용 금지하시고.”

    그때 그가 자리에 앉으려다, 잠시 멈칫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일은 주인 선배에게는 말하지 않는 걸로 하죠. 괜한 걱정만 늘 테니.”

    “네, 알겠습니다.”

    이신이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는 곧장 일을 처리하러 나갔다.

    그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결국, 태성 쪽에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말은 자신들의 정체도 곧, 탄로 날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 전화가 윙 울렸다. 화면을 확인해 보니 선하였다. 그가 심드렁하게 전화를 받았다.

    “별일 아니면 끊....”

    [형님, 저 지금 쫓기고 있어요.]

    선하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러나 몹시도 은밀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독경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 간신히 따돌리긴 했는데.... 그 왜, 청담파 알죠? 거기 똘마니 몇이 숙소 근처를 어슬렁거리더라고요. 아무래도 태성의 사주를 받은 것 같아요....]

    “흠, 일단 다른 데로 이동해라.”

    [네, 그러려고요. 주인 누님은 잘 계시죠?]

    그 질문에 독경의 혼탁한 검은자위가 일순, 흔들렸다.

    “끊어.”

    보나 마나 집에 있을 것이 뻔했지만, 그래도 불길한 마음에 그는 위치 추적 앱을 켰다.

    지난번 주인이 곤히 잠든 동안 지승에게 문자를 보내며, 독경은 위치 추적 앱을 몰래 설치했었다.

    그녀가 어디를 가든 졸졸 따라나서던 그였기에 딱히 쓸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가끔 들여다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는 했다.

    이제 더 이상 주인을 찾아 헤매도 되지 않는다는 현실이, 묘한 위안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독경이 외출을 금지했음에도, 주인은 집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었다. 움직이는 속도로 보아 차로 이동 중인 모양이었다. 덜컥, 심장이 주저앉았다.

    독경이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선배!! 어디예요??”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오더니, 그의 뺨을 후려쳤다.

    [안녕, 이독경.]

    어딘가 야비함이 물씬 풍기는 남자의 목소리에, 독경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가 미간을 팍 구기며 어금니를 빠드득 깨물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주인의 안부부터 확인했다. 수화기 너머로 침착을 가장한 목소리가 애처롭게 흘렀다. 창백하게 마른 얼굴이 눈앞에 생생했다.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상대는 아직 위치 추적 앱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독경은 상현이 제시한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하며, 삼십 분을 벌었다.

    상현은 선심 쓰듯 내준 오 분이 스스로의 발등을 찍을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결단코 그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통화를 마친 그가 바쁘게 사무실을 나가려다, 들어오는 이신과 부딪혔다.

    “어, 어디 가세요?”

    이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급한 일입니다. 다녀와서 말씀드리죠!”

    독경이 빠르게 뛰며 외쳤다. 그녀는 평소 느긋한 성향의 그가 저리 서두르는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차에 올라탄 그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주인은 서울 외곽의 한강 공원에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빠듯했다. 일 분이라도 늦는 순간, 상현은 바로 눈치챌 것이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그는 단정하던 머리가 어느새 헝클어진 것도 모른 채, 거칠게 차를 몰았다. 운전대를 꽉 쥔 손등 위로 핏줄이 억세게 돋았다.

    ***

    상현은 주인에게 전화기를 던지고는, 제 것을 꺼내 어딘가로 통화를 시도했다.

    “박중우! 다섯 시 정각에 태성 주식이 대량으로 나올 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싹 다 매수해!”

    갑작스러운 지시에 중우가 다급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뭔 말이 많아, 하라면 하지! 대출을 받든, 사채를 끌어오든 싹 다 매수하라고!!”

    차 안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른 그가 험악하게 종료 버튼을 눌렀다.

    “하,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서야....”

    상현이 짜증 섞인 혼잣말을 내뱉은 후, 굳은 표정으로 정면만 주시하는 그녀를 슬쩍 보았다.

    “생각해 보면 김 실장 아저씨만큼 일 잘하는 사람도 드물어, 그렇지? 지금 일하는 애들 보면 절로 후회가 된다니까. 근데 그땐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아저씨가 내 약점을 잡고 협박하더라고. 아버지한테 이른다고....”

    그가 정장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음흉한 시선으로 주인을 위아래로 훑었다.

    “네가 아끼는 그 개새낀 어때? 일 처리 깔끔하던데.... 우리 애들이 너희 찾느라 고생 좀 했거든.”

    주인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그저 꼿꼿이 앞만 보며 앉아 있었다. 상현이 매캐한 담배 연기를 도발하듯 그녀에게 후 하고 뿜었다.

    “원하는 게 뭐야? 경영권? 계열사? 말만 하면 괜찮은 자리 하나쯤은 줄 수 있어. 그 개새끼한테도. 아, 걘 필요 없나? 이미 일만에서 잘나가는 거 같던데....”

    그가 약간의 조소를 머금으며 담배를 껐다. 그러고는 다시 시각을 확인했다.

    약속 시각까지는 아직 삼 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상현은 눈앞에 넘실거리는 한강을 물끄러미 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최근 몇 년 동안 오늘만큼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 늘 쫓기듯 바빴고, 겁먹은 채 위축됐다. 폭군 같은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숨조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자신들의 왕국을 위협하는 반역자를 제 손으로 제압했다. 게다가 전리품도 얻었다. 일거양득이었다.

    이번 공로를 발판으로 부친에게 당당히 승계권을 요구하리라 결심했다.

    그렇게 눈부신 미래를 꿈꾸던 그 순간, 멀리서 요란한 굉음이 안락한 평화를 무참히 깨뜨렸다.

    “어, 어?? 저, 차가 왜??”

    우락부락하게 생긴 운전기사가 급하게 시동을 켜며 망연히 중얼거렸다. 주인이 눈을 반짝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사이 굉음의 근원이었던 새빨간 스포츠카가 전조등을 환히 빛내며, 상현과 주인이 탄 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가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손잡이를 꽉 잡았다.

    “X발, 저거 뭐야?? 빨리 출발 안 해??”

    상현이 운전석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악을 썼다. 차가 꿈틀거리며 조금씩 전진했다. 하지만 상대 쪽이 더 빨랐다.

    스포츠카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검은 차 앞을 우뚝 막아선 것이다.

    그때, 상현의 손목시계가 정확히 다섯 시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스포츠카에서 검은 인영이 불쑥,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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