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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53화 (53/76)

#53화. 반격 (1)

“자, 입 벌려 봐요. 내가 넣어 줄게요.”

독경이 주인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순순히 두 눈을 감은 채, 장미 잎처럼 붉고 만질만질한 입술을 슬쩍 열었다.

그가 흐뭇한 미소를 그리며 그 틈으로 뽀얀 액체를 흘려 넣었다. 주인의 가녀린 목선이 위아래로 꿀꺽 움직였다.

이윽고, 두 눈을 살포시 뜬 그녀가 환한 얼굴로 외쳤다.

“우와, 맛있어!”

“그렇죠?”

사골 국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커다란 솥 앞에서 독경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어때요? 이 정도면 삼십팔 년 장인의 맛과 견줄 만하죠?”

그의 질문에 그녀가 가소롭다는 양 코웃음을 쳤다.

“맛있긴 한데, 그 정돈 아니야. 잘 쳐줘야 팔 년 정도?”

야박하기 짝이 없는 평가에 독경이 눈을 흘겼다. 그러자 주인이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팔짱을 끼었다.

“물론 나한테야 최고의 맛이지만.”

“그럼 이건 조금 더 끓이고, 이따 저녁에 먹을까요?”

“응, 그러자.”

어느 날부터인가, 두 사람은 틈날 때마다 요리에 도전했다. 당연히 담당자는 독경이었지만, 주인은 나름대로 훌륭하게 보조 역할을 수행했다.

눈치가 빠른 데다, 눈썰미가 좋아서 곧잘 따라 하고는 했던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하나하나 세심하게 알려 주면서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듯한, 굉장히 오묘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특히 맛의 미묘한 차이를 알려 줄 때, 독경은 기이하게 흥분됐다.

두 눈을 감고 입안에 음식을 넣은 채 모든 감각으로 맛을 음미하는 주인의 얼굴이 묘하게 야릇했던 탓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뻣뻣하게 굳어 가는 하체를 느끼며, 그녀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이제 뭐 할까요?”

“글쎄, 영화나 볼까?”

주인이 웃으며 의견을 냈다. 독경이 고개를 저었다.

“선배는 매번 괴상한 영화만 보잖아요. 취향 참 독특해.”

“괴상한 영화 아닌데. 나름 컬트적인 인기를 끈 유명 작품들이라고.”

그녀가 반박했다. 그러자 그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우물거렸다.

“오늘은 내가 보고 싶은 거 봐요.”

TV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독경이 전원을 툭 켰다. 그러고는 영화를 하나씩 골라, 보여 주었다.

“이거 어때요?”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건?”

이번에도 고개가 옆으로 흔들렸다.

“이건? 이건? 이건?”

연달아 이어지는 물음에 주인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독경이 고르는 영화가 모두, 야한 것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독경, 진짜로 하고 싶은 게 뭐야?”

그러자, 그가 새초롬하게 대꾸했다.

“알면서.”

어이없는 답변에 그녀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식 웃었다.

“너답지 않게 왜 빙빙 돌려?”

“그야....”

독경은 요 며칠 동안 밤마다 그녀를 매섭게 몰아붙인 기억을 상기했다. 결국, 주인은 어젯밤 거의 울먹이는 얼굴로 그에게 애원했다.

“이, 이독경.... 그만, 나 이제 너무... 힘들어....”

숨을 헐떡이며 뜨겁게 속삭이는 말에 더 달아오른 그가, 그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는 더욱 세게 상대를 짓눌렀다.

그 일로 삐친 주인은 아침까지 독경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달래기 위해 그는 몇 시간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사골 국물을 끓였던 것이다.

“영화 안 볼 거면, 끄고 이리 와.”

보다 못한 주인이 그를 불렀다. 독경이 아무런 미련 없이 전원을 끄고 돌아서서는, 냉큼 걸어왔다.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눈 감아 볼래?”

주인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참, 부끄럽게.”

독경이 시답지도 않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분고분 따랐다. 그녀의 속눈썹이 자신의 뺨을 간질이는 촉감이 느껴졌다.

그가 슬며시 입술을 벌렸다. 그러자, 말랑말랑한 무언가가 틈으로 들어와 혀끝에 닿았다.

달콤하고 새콤한 맛에 침이 고였다. 마치, 어제 주인이 먹던 청포도 맛 젤리처럼....

독경이 번쩍,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입안으로 뭔가가 쏙 들어오며, 주인이 끅끅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어금니를 으적 씹으니, 말캉한 식감이 느껴지며 청포도 향이 확 퍼졌다. 독경의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지금 나 놀리면 후회할 텐데?”

독경이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불온하게 중얼거렸다. 그 기세에 주인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어딜 가요?”

독경이 한 발짝 그녀를 따라붙었다.

“오, 오지 마!”

주인이 재빨리 뒤를 돌아 달아나려는 순간, 그가 달려들더니 마른 몸을 제 한쪽 어깨에 번쩍 둘러멨다.

“꺅!!”

그녀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가 씩 웃으며 침실 쪽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후회해도 늦었지요~.”

그가 콧노래를 부르며, 그녀를 침대 위에 내던졌다.

“미안, 내가 잘못했어.”

주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독경이 입고 있던 얇은 티셔츠를 벗으며 빙글빙글 웃었다.

“글쎄, 늦었다니까요~.”

그가 탄탄한 복근을 드러내며, 그녀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턱을 잡아 억지로 벌린 잇새로 혀를 넣는데,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윙윙 울렸다.

독경이 거칠게 키스하며 한 손으로 휴대 전화를 꺼내 침대 구석에 던졌다. 하지만 그사이 멈춘 줄 알았던 진동이 다시 울렸다.

주인이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입술을 뗐다.

“받아 봐. 급한 거 같은데.”

그가 상체를 일으키며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몹시도 퉁명스러운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네, 무슨 일입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이신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독경의 눈살이 더욱 구겨졌다.

짧은 통화를 마친 그가 주인에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잠깐 회사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독경의 말에 그녀도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인데? 급한 거야?”

“아니요, 별거 아니에요. 저녁 전까진 올 거니까. 국만 좀 데워 줘요.”

“응.”

주인은 어쩐지 독경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으나, 더 캐묻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독경이 나간 뒤, 주인은 잠깐 외출에 나섰다. 국에 간을 맞출 소금이 똑 떨어졌던 것이다.

그녀 이름으로 태성 주식을 대량 매수한 뒤, 정체가 탄로 날 것을 염려한 독경은 외출을 금지했었다.

그러나 마냥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기가 답답했기에, 주인은 핑곗거리가 생기자 곧장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코앞에 있는 가게를 가는 것이라, 덜 부담스럽기도 했고.

초여름 오후의 거리는 공기마저 느리게 흐를 정도로 한산했다. 쏟아지는 빛살을 받으며 걷는데 문득, 전화가 걸려 왔다. 원우였다.

주인이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어, 원우야 무슨 일이야?”

[주인아, 지금 통화 가능하니?]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생기가 없었다.

“어, 그럼.”

그녀가 고개를 가볍게 주억거렸다. 원우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어제, 태성 사람들이 집에 찾아왔었어. 윤희가 너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난 아무래도 걱정돼서....]

주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원우야, 그 사람들이 무슨 얘기 했는지 자세히 말해 줄래?”

[별말은 없었어. 그냥, 앞으로도 회사 계속 다니고 싶으면 자기들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뒤에 누가 있는지 다 아니까 협조하면 불리할 거라고, 그렇게....]

협박에 가까운 발언에, 주인은 소리 없이 기함했다. 주변 사람들부터 서서히 압박해 가겠다는, 치사하고 비열한 수법이었다. 현상현다웠다.

그때, 그녀 옆으로 검은색의 고급 세단이 따라붙었다.

느릿한 차의 속도가 자신에게 맞춰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뒷머리가 쭈뼛 섰다. 휴대 전화를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원우야, 알려 줘서 고마워.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걱정 말고 있어. 당분간은 조심하고.”

전화를 끊은 주인이 우뚝, 멈춰 섰다. 차도 따라 정지했다.

언젠가 한번은 닥칠 일이었다. 피할 수 없었다. 그녀가 휴대 전화의 스피커가 위로 향하도록 주머니에 넣으며, 차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뒷좌석 문이 덜컥 열리며 정장을 쫙 빼입은 채 거만하게 다리를 꼰 남자가 차게 명령했다.

“타!”

상현이었다. 주인이 군말 없이 차에 올랐다. 그녀를 태운 차가 빠르게 출발했다.

“언제까지 감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니?”

그가 의외로 아주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전처럼 죽은 듯 살지, 왜 아득바득 기어 나와서 일을 이렇게 만들어? 응, 주인아?”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그가 짧은 침묵 뒤, 본론에 들어갔다.

“아버진, 아직 모르신다. 지금이라도 정리하고 어디든 떠나라. 필요한 경비는 다 대 줄 테니.... 그러면 여태까지의 일 모두, 없던 걸로 해 줄게. 물론, 네 친구들도.”

순간, 주인은 처음으로 갈등했다. 자신이 괴로운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물어볼 수밖에 없는 일 또한 있었다.

“그때, 왜 그랬어요?”

그녀가 어딘가 참혹한 목소리로 따졌다. 운전기사조차도 슬쩍 돌아볼 정도의 농도 짙은 감정이었다.

“그때, 이독경이랑 제가 떠나게 뒀으면, 우린 아무도 모르는 데서 조용히 살았을 거예요. 근데 오빠가 못 가게 막았잖아요. 지금 벌어지는 모든 건 오빠가 자초한 거예요. 안 그래요?”

주인이 상현을 직시했다. 얌전하고 순종적이던 소녀는 어느새 악에 받친 여인으로 자라 자신을 위협했다.

그는 부아가 치밀었다. 저 하찮은 종자가 감히 대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상현은 잠시 분을 삭이며 그녀를 살살 달랬다. 이미 주변을 압박하며 죄책감을 건드렸으니, 조금만 회유하면 넘어올 것이라 계산했다.

“그래, 그 일은 미안하게 됐다. 하지만 그걸로 천륜을 끊을 순 없는 거야.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난 네 오빠다. 가족을 곤란케 하진 말아야지.”

“오빠라, 오빠가 동생을 죽이려는 게 흔한 일인가?”

주인이 여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무심하리만치 나직한 독설에 상현의 얼굴이 벌게졌다. 안 그래도 바닥난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당장이라도 저 파리한 모가지를 비틀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눌렀다.

“적당히 해라. 험한 꼴 당하기 전에.”

그가 인상을 흉흉하게 구겼다.

“저도 김 실장님처럼 죽일 거예요?”

그녀가 서슬 퍼렇게 도발했다. 그리고 곧장, 이어 말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한번 죽었다 살아난 몸인데 또 죽는 게 뭐가 무섭겠.... 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현이 주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결국, 이성의 끈을 놓친 그가 선연한 살기를 내뿜었다.

“이년이 보자 보자 하니까, 분수도 모르고 설치지? 너도 김 실장처럼 저수지에 처박혀 볼래? 네가 물고 빠는 그 개새끼랑 같이 말이야.”

주인의 두 눈이 형언할 수 없는 공포로 급격히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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