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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52화 (52/76)

#52화. 습격 (4)

“여긴 어쩐 일로??”

독경이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놓고 언짢은 티를 팍팍 냈다.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차 회장은 그런 상대에게 이미 익숙하다는 양 비난부터 퍼부었다.

“이놈아, 내 돈 가져다 펑펑 쓰는 주제에 집 한번 찾아왔다고 성화냐?”

서로를 향해 털을 곤두세우는 두 사람 사이에 낀 주인만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마른 입술을 축였다.

“흥, 그 돈 다 제가 벌어다 드린 거잖아요.”

그가 콧방귀를 끼며, 그녀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깨질까 봐 염려하듯 애달픈 눈길로 여기저기 살폈다.

“선배, 많이 놀랐죠? 저 영감님이 쓸데없는 말 하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어? 으응....”

주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차 회장이 버럭 성질을 부렸다.

“뭐? 쓸데없는 말? 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

독경은 강석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은 그 말에 콧방귀를 세게 뀌었다.

“그래서 몸이 부서지게 일해서 갚았잖아요. 전 이제, 영감님께 빚 없습니다.”

“뭐, 뭐야??”

주인이 그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으며 말렸다. 그러고는 역정을 내는 노신사를 향해 조심스레 수습을 시도했다.

“주환 씨가 말은 이렇게 해도 항상 회장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저도 그렇고요. 친아들처럼 대해 주셨다고....”

“흥, 내가 저놈을 몰라? 중간에서 고생하지 말고 그냥 둬! 그리고 내 아들은 얌전하고 공부도 잘했다고, 어디 저런 불량하기 짝이 없는 불상놈이랑 비교를 해?”

차 회장이 콧김을 씩씩 내뿜었다.

“음, 주환 씨도 공부는 잘했는데.... 대학 수석 입학했거든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그녀가 은근히 독경의 편을 들었다. 차 회장이 솔깃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그래?”

“네. 사고 때문에 졸업은 못 했지만, 전액 장학금도 받고 그랬어요.”

“흠, 잔꾀만 있는 줄 알았더니 공부 머리도 나쁘진 않은가 보군.”

차 회장이 그를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독경은 자신의 편을 들어 주는 그녀를 보며 싱글벙글거리다, 노신사의 따끔한 시선을 느끼고는 곧장 웃음기를 싹 거뒀다.

“근데, 여긴 왜 오셨어요?”

“요즘 하도 이런저런 말들이 많아서 와 봤다. 잘하고 있냐?”

“네, 뭐....”

“그럼요. 잘되고 있어요. 너무 심려 마세요.”

주인이 성의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말을 싹둑 잘랐다.

“아가씨도 저런 놈 뒤치다꺼리하느라 고생이 많구먼.”

차 회장이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지 혀를 끌끌 차며 가냘픈 인상의 여인을 보았다. 하지만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아니에요, 그 반대인걸요. 제가 일 벌이면 주환 씨가 수습해 줘요.”

그 말이 맞았다. 그녀가 계획을 짜면 실행은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 덕을 주인은 톡톡히 보는 중이었다.

“하, 알다가도 모를 게 사람이라더니.... 고삐 풀린 망아지를 잘도 길들였소.”

차 회장이 순수하게 탄식과 감탄, 그사이 어디 즈음에 있는 감상을 표현했다. 그때, 독경이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가....”

그 순간, 주인이 무뚝뚝한 얼굴을 쏙 가리며 끼어들었다.

“식사 전이시면 저녁 드시고 가시겠어요? 마침 샤부샤부를 하려고 하는데....”

차 회장은 얼굴이나 잠깐 보고 가려던 계획을 수정해서 보란 듯 저녁을 배불리 먹고, 후식까지 싹싹 비운 뒤에야 자리를 떴다.

똥 씹은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독경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통쾌하던지. 게다가 옆에서 장단을 잘 맞춰 주는 주인이 있어 더욱 즐거웠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나이라 그런지, 이런 추억들이 하나씩 쌓일 때마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불청객이 유유히 사라진 후, 독경은 패배한 장수처럼 사기를 잃은 채 주인을 보았다. 그녀는 유쾌하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식탁을 정리 중이었다.

“놔둬요. 내일 도우미분이 해 주실 텐데....”

그가 은근슬쩍 다가서서 말했다. 그러고는 투정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영감님껜 잘 보일 필요 없어요. 어차피 우리랑 상관없는 사람인데.”

그 말에 주인이 발끈했다.

“왜 우리랑 상관없어? 일만 쪽 자금이 없었으면, 우린 이 일 시작도 못 했어. 그리고 너 어려울 때 도와주신 분이잖아. 그럼 나한텐 중요한 사람이야!”

마지막 말에 독경은 기분이 좋아졌다. 입꼬리가 저절로 들썩거렸다. 그가 새까맣고 보들보들한 정수리에 제 뺨을 비볐다.

“알겠어요. 하지만 영감님이 부담스럽게 하면, 근처엔 얼씬도 못 하게 할 거예요.”

“이독경, 넌 예의를 좀 배울 필요가 있어. 선하 씨나 회장님께 왜 그리 까칠하게 굴어? 보나 마나 김 실장님께도 똑같이 했겠지?”

독경이 속으로 뜨끔하며, 아양을 떨었다.

“남들한테 아무렴 어때요. 선배한테 잘하는 게 중요하지.”

“난 충분하니, 이젠 주변 사람들도 좀 챙겨. 다들 좋은 분들이잖아.”

그 말에 그가 끙 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일렁이는 눈을 마주쳤다.

“솔직히 난, 안심했어. 나한테 윤희랑 원우가 있는 것처럼, 너한테도 좋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주인의 다정한 미소에 독경의 탁한 검은 눈도 번들거렸다.

“그런가요? 그럼 노력해 볼게요.”

그러고는 곧장, 다짐이라도 하듯 고집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한텐 현주인이 가장 중요해요. 나 자신보다도 더! 그건 확실히 해 둘게요.”

어딘가 비장하기까지 한 선언에, 주인이 서글프게 웃었다.

***

상현은 근래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개인은 물론이고 회사에 연이어 터지는 악재와 씨름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열하고 험상궂은 인상이 쌓여 가는 피로로 인해 더욱 까칠해 보였다. 그는 피로에 거뭇해진 눈 밑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하....”

그 순간, 누군가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며 외쳤다.

“사, 상현아!!”

그가 활짝 열린 문 앞으로 시선을 던지자, 중우가 안경을 코끝까지 내린 채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미친 새끼가.... 여기 회사....”

“그, 그게 문제가 아냐!! 기, 김주환 찾았어!!”

상현은 자신의 말을 뚝 자르는 그에게 물 잔을 던지려다, 이어지는 외침에 동작을 우뚝 멈췄다.

“그게 누군데?”

“너, 너도 아는 사람이야!!”

귀신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허옇다 못해 퍼렇게 질린 상대의 얼굴에, 상현은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중우는 상현과 진 비서를 앉혀 두고는 그 앞에 프로젝터로 흐릿한 화면 하나를 띄웠다. 그러고는 식은땀으로 자꾸만 미끄러지는 안경을 손으로 추켜올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금장회계법인 사무실 CCTV 영상입니다.”

“금장? 여기서 금장이 왜 나와?”

상현이 눈살을 팍 찌푸리며 성마르게 물었다.

“최근에 자신을 미래투자 대표라고 자처한 자가 컨설팅을 받기 위해 금장을 방문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 말에 상현이 중우에게 고개를 까닥이며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중우가 화면 멀찍이 잡힌 키가 큰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와 정장 원피스를 입은 마른 체형의 여자를 가리켰다.

“바로 이 남자가 미래투자 대표고, 옆에 있는 여자가 이사라고 합니다.”

“하도 외부 활동이 없어서 이름뿐인 유령인 줄 알았는데, 실체가 있긴 하네?”

상현이 얼굴 가득 냉소를 머금은 채 지껄였다. 중우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 화면은 그들이 상담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찍힌 겁니다. 정면에서 잡혀서 얼굴이 제법 식별 가능합니다.”

그의 말대로 바뀐 영상에는 남녀가 막 건물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포착돼 있었다.

상현이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눈꺼풀도 깜박이지 않은 채 화면을 주시했다. 지금까지 자신을 엿 먹인 놈의 얼굴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때, 중우가 영상을 정지시켰다.

그러자 주변을 사나운 눈길로 경계하며 밖으로 나오는 까무잡잡한 얼굴의 남자가 잡혔다. 어딘가 꽤 익숙한 이목구비에, 상현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 순간, 벼락이 머리 위에 내리꽂히듯 전율이 흘렀다.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이독경...? 저... 저 새끼가 왜...? 왜, 왜 저기 있지...?”

목이 꽉 막힌 것처럼 꺽꺽대는 소리가 잇새로 터졌다.

중우가 상현이 품은 일말의 의구심을 해소해 주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아는 그 ‘이독경’ 맞아.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야....”

어딘가 참담함이 서린 음성에 상현의 시선이 다시 화면으로 향했다. 재생된 영상에서 남자의 너른 어깨 너머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여자가 보였다.

두 눈을 내리깐 채 우수 어린 표정을 짓는 여자는 한눈에 보아도 미인이었다.

“혀, 현주인.... 저 미친....”

상현이 제 입술을 으득 씹으며, 노기 서린 음성을 뱉었다.

“주인이가 이번에 주식을 싹쓸이한 현도경이야.”

덧붙여 오는 한마디에, 그의 눈에 핏발이 선명하게 섰다.

“나가....”

“네?”

희미하게 들린 말소리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진 비서가 되물었다. 그러자 상현이 붉게 물든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다, 나가!! 나가라고!!”

귀를 찢을 것처럼 날카로운 괴성에 진 비서와 중우는 도망치듯 밖으로 빠져나왔다.

꽉 닫힌 문 너머에서 짐승 같은 포효가 들리더니, 이내 물건들이 와장창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한참 뒤,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상현이 두 눈을 희게 뒤집으며 영상 속 남녀를 응시했다.

“그래, 너희들이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가 한쪽 입가를 표독스럽게 들어 올리며 웃었다.

상현처럼 악랄하고 간교한 자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상대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그들이 뭘 두려워하고, 뭘 잃고 싶지 않은지를.

칼춤을 추는 망나니들처럼 거침없이 굴고 있지만, 그들에게도 분명 약점은 있었다.

“난 알지. 난, 다 알지.”

그가 실성한 사람처럼 흐흐, 하고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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