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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51화 (51/76)
  • #51화. 습격 (3)

    “하하, 뭘요. 저야말로 도움을 드려 기쁜걸요. 독경 형님께 진 빚, 갚는다 생각했어요.”

    선하가 쑥스럽게 웃으며 제 은인을 보았다. 독경이 식탁 위에 두둑한 봉투를 무심하게 툭 올렸다.

    “이것만 먹고 일어나라. 당분간은 어디 조용한 데서 얌전히 있고.”

    “네.”

    그 말에 선하가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인은 어쩐지 두 사람의 관계가 예전의 강석과 독경 같다고 느꼈다.

    선하가 떠나고, 주인이 독경에게 살며시 다가갔다.

    “왜 나한테 선하 씨 얘기 안 했어?”

    “그냥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아서요.”

    독경이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주인이 나긋한 어조로 운을 뗐다.

    “선하 씬, 널 굉장히 따르던데.... 좋은 사람 같아 보여. 친하게 지내.”

    그러자 그가 픽, 조소했다.

    “실실 웃는다고 다 좋은 놈은 아니에요. 그놈이 얼마나 독한지 알면 선배도 혀를 내두를걸요?”

    그녀가 뒤에서 옹골찬 허리를 꽉 껴안으며, 제 몸을 딱 붙였다.

    “그래도 좋아! 어쨌든 너한테도 친한 사람이 있다는 게.”

    “아니, 안 친하다니까....”

    독경이 뚱한 표정으로 투덜대고는 몸을 돌려, 주인의 어깨를 감쌌다.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우리한테 집중할까요? 뜻대로 돼서 기뻐요?”

    “글쎄, 아직 잘 모르겠어. 이제 시작이니까.”

    그가 하얗고 반질거리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맞아요, 이제 시작이죠. 내가 얼마나 쓸모가 많은 놈인지 보여 줄게요.”

    ***

    한 주 동안 증권가와 경제지는 태성그룹의 주식을 싹쓸이한 슈퍼 개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도경’이라는 이름 외에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었던 탓이었다.

    이렇듯 일개 투자자가 중견 기업의 주식을 대량 매수했다는 사실을 두고 온라인에서는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그중에는 이 미지의 투자자가 현씨 성을 가진 사람이기에, 당연히 총수 일가의 방계 중 하나일 것이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가상화폐 투자로 대박 난 인물이라 추측했고, 다른 쪽에서는 부동산으로 돈을 모은 자산가 중 한 명이 아닐까 짐작했다.

    또, 공공연히 태성에 선전 포고를 해 온 미래투자 세력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합리적이라 해도 추론은 ‘추론’일 뿐, 실체는 가까이 간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법이었다.

    “어때요? 슈퍼 개미로 등극한 기분이?”

    독경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온라인에 뜬 기사를 보여 주었다.

    “내 돈도 아닌데 뭘....”

    주인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기사를 검색했다.

    “에이, 내 돈이 선배 돈이죠. 그리고 수익 나면 그 돈도 다 선배 거고.”

    “말했잖아. 돈은 필요 없다고. 이 돈도 다 돌려줄 거야.”

    그녀가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유지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몹시 놀라는 중이었다.

    그가 이 정도로 대규모의 자금을 손쉽게 끌어올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자긴 부잔 모양이네. 아니면 정말 능력이 출중하거나.... 그 둘 다인가?’

    셔츠를 걷어붙인 채 다시 일에 열중하는 독경을 주인은 새삼 다시 보았다. 처음 눈을 마주친 순간 느꼈던 예감이 실현된 것만 같아 마음이 이상했다.

    거칠고 투박한 원석 같던 남자가 어느새 매끈하게 세공된 보석으로 세상에 나왔다. 여자는 그 가치를 진작 읽어 내고는, 제 손으로 갈고닦기를 원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남자는 순전히 본인의 힘으로 가치를 증명했다.

    여자는 그것이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어쩌면 처음부터 상대에게 자신은 필요 없는지도 몰랐다.

    “흠....”

    독경이 어느새 고개를 들어 상념에 빠진 그녀를 응시했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주인이 저렇게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면, 그는 가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작은 머릿속은 자신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너무 복잡해서 가끔은 따라잡기 벅찰 정도로. 그래서 그럴 때마다 그는 그 생각을 멈추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여겼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아니에요. 차라리 다른 건설적인 걸 고민해 볼까요? 예를 들면, 저녁 메뉴라든가.”

    그의 말에 그녀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무슨 생각 하는 줄 알고?”

    “보나 마나 또 땅 파는 거겠죠.”

    독경이 벌떡 일어서서는 주인에게 다가가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며 말했다.

    “나 잠깐 회사 다녀와야 해요. 처리할 일이 몇 건 있거든요. 집에 있을 거죠?”

    “응, 나도 해야 할 게 좀 있어.”

    그가 다정하게 눈을 반으로 접었다.

    “그래요, 그럼 저녁에 뭐 먹을지 생각해 둬요. 오는 길에 포장해 올게요.”

    “응, 잘 다녀와.”

    그녀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며 인사했다.

    독경이 떠난 뒤, 홀로 남은 주인은 몇 사람에게 전화를 돌렸다.

    제일 먼저 전화를 받은 사람은 윤희였다. 안부를 묻자, 그녀는 자신에게 미행이 붙은 것 같다고 알려 주었다.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고, 감시하는 수준이라고.

    주인은 독경을 통해 경호원을 붙여 주겠다고 했으나, 윤희는 오히려 더 의심을 살 수 있다며 거절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바로 연락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이어 주인은 페이퍼컴퍼니 관련 기사를 터뜨린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자의 목소리는 기대보다 밝았다. 기사에 대한 반향이 제법 컸다고 했다.

    전직 대통령 자녀를 포함한 후속 명단도 곧 발표할 예정이라며 귀띔했다. 주인은 힘닿는 선에서 협조할 것을 약속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잠시 뒤, 성만과도 통화했다.

    그는 집에만 있는 것이 조금 답답하지만, 불편함은 전혀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을 세심하게 잘 준비해 줘 고맙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은근한 목소리로 현 상황을 물었다. 주인이 당분간은 인터넷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많은 사람이 성만의 상황에 공감해 준 덕분에 태성이 곤란해졌다고 전했다. 그것만으로도 맺힌 한이 조금 풀렸는지, 그는 코끝을 연신 훌쩍였다.

    주인은 불편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을 달라는 말을 남기고 대화를 마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승에게 전화를 걸었다. 독경이 알면 난리 나겠지만 만남을 금지한 것이지 통화를 금지한 것은 아니기에, 뻔뻔해지기로 했다.

    [네, 주인 씨.]

    본명을 알고 난 후, 지승은 주인을 현도경으로 부르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던 그녀까지도 받아들이겠다는 양 아주 자연스럽게 본명을 불렀다.

    “잘 지내셨죠?”

    주인이 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네, 그럼요. 화제의 주인공께서 이렇게 직접 전화를 주시고, 무슨 일이에요?]

    지승의 너스레에 그녀가 수줍게 웃었다.

    “잘 지내시나 해서요. 곤란하진 않으신가요?”

    [아니요, 전혀. 금장 내부가 지금 엄청 정신없나 봐요. 저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여전히 구김살 없이 상냥한 목소리가 귓가에 간질거렸다. 주인이 깊이 안도했다.

    “다행이네요, 혹시나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그 말에 지승이 짧은 침묵 후, 입을 열었다.

    [도움은 됐고, 밥이나 한번 사요.]

    “하하, 노력해 볼게요.”

    주인이 독경의 심술궂은 얼굴을 떠올렸다. 지승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더 조르지는 않았다.

    [그럼, 잘 지내요....]

    그저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음성으로 안녕을 고할 뿐이었다.

    통화를 끝낸 주인이 잠시 멍하니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제 무릎을 치며 한 사람을 기억해 냈다.

    “아차, 유선하 씨!”

    이 일에 가장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을 빼먹다니. 그녀는 이른 시일 내에 독경을 구슬려 번호를 받아 내리라 결심하며 싱긋 웃었다.

    그때, 정적을 깨고 인터폰이 울렸다.

    독경이나 이신일 리는 없기에 주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화면을 확인했다. 흐릿한 액정 너머로 노년의 남성이 고개를 쭉 들이밀고 있었다.

    “누구세요?”

    [나, 차덕균일세.]

    그녀의 질문에 노인이 새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인은 기사에서 그의 이름을 본 적 있었다. 일만그룹의 창업주이자 명예 회장, 그리고 독경을 거둬 준 은인.

    “아, 네! 어서 오세요!”

    그녀는 시댁 어른들을 처음 맞는 심정으로 긴장한 채 외쳤다.

    ***

    차 회장은 들어오자마자, 매서운 눈길로 집 안을 구석구석 훑었다.

    딱 한 번 이 집에 왔을 때, 그는 이 공간이 번지르르한 폐가나 다름없다 여겼다. 음습한 데다 냉기가 줄줄 흐른 탓이었다.

    그러나 오늘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그는 그제야 집 안에 온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겼다.

    노신사가 쟁반 가득 먹을거리를 들고 오는 여자를 보았다. 그녀가 이 집에 변화를 가져온 사람이라 생각하니,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외모가 서구적인 미인이기도 했고.

    딱, 한 가지만 빼면 말이다.

    “너무 말랐구먼.”

    그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고는 곧장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놈이 밥 안 먹이나?”

    “아니에요, 잘 챙겨 줘요.”

    주인이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다소곳이 차를 따르며 물었다.

    “회장님께서 어떤 걸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녹차랑 과일 좀 내왔어요. 괜찮으신가요?”

    “녹차는 무슨, 아메리까노 줘. 시원한 걸로!”

    의외로 확고한 취향에 그녀는 긴장이 확 풀렸다.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고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주인이 부엌으로 돌아갔다.

    독경은 그녀가 직접 내린 커피를 먹고 싶다며, 전문 매장에서나 쓰는 커피 머신을 두 대나 들여놓았다.

    그녀가 그 기계를 이용해 능숙하게 커피를 내리고는 손님 앞에 내놓았다.

    “흠....”

    차 회장이 향을 음미하며 음료를 죽 들이켰다. 주인이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음, 제법 풍미가 있구먼. 가게 하나 차려도 되겠어.”

    차 회장의 칭찬에 주인의 얼굴이 활짝 폈다.

    “제가 예전에 카페에서 일을 했거든요.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에요.”

    “흠흠.”

    그녀의 밝은 미소에 그가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제가 먼저 찾아뵀어야 하는데, 이리 오시게 해 죄송해요.”

    주인이 면목 없다는 투로 말하자, 차 회장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고 시커먼 놈한테 있지, 아가씨가 뭔 잘못인가? 그래도 그쪽은 경우가 있어서 참 다행이구먼.”

    그 순간, 현관문이 벌컥 열리더니 앙칼진 목소리가 났다.

    “선배,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요? 걱정되게. 그냥 내 맘대로 샤부샤부....”

    말은 거기서 끊겼다.

    독경이 거실 소파에 앉은 차 회장과 주인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무척이나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여, 영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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