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48화 (48/76)

#48화. 초대 (2)

주인이 빙긋 웃으며 청첩장을 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음, 가을이네....”

“근데 말이야....”

그때, 원우가 슬쩍 운을 뗐다.

“어째 우리보다 저쪽이 더 청첩장에 어울리는 거 같지 않아? 여기가 더 신혼집 같고.”

“아, 그러네. 야, 현주인. 너 내 결혼식 때 부케 받을래?”

윤희가 맞장구를 치며 농을 던졌다.

“뭐?”

뜻밖의 제안에 주인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독경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기만 할 뿐 굳이 참견하지 않았다.

“어때? 독경 후배.”

“전, 좋습니다만?”

윤희의 질문에 그가 냉큼 답했다.

주인이 식탁 아래로 독경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으나, 무쇠로 만들어졌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하, 좀 덥네. 문 열고 올게.”

주인이 벌떡 일어서서는 테라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자, 윤희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싹 걷어 내고는 진지하게 물었다.

“처음보단 좀 나아 보이는데, 쟤 상태는 어때? 귀에 붕대는 또 뭐고?”

그 말에 독경이 약간 음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귀는 어제 일이 있어서 다쳤고, 상태는.... 음, 썩 좋진 않아요....”

“어디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추궁에 그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글쎄요, 뭐랄까? 자기 자신을 너무 몰아붙인다고나 할까요?”

그 말에 윤희가 쓴웃음을 지었다.

“쟨, 옛날부터 그랬어. 스스로한테 너무 가혹해. 제정신 아냐, 너만큼....”

톡 쏘아붙이는 독설에, 독경이 능글맞게 되받아쳤다.

“보통, 그런 걸 사자성어로 천생연분이라고 하죠.”

“미친놈.”

윤희가 헛웃음을 지었다.

“야, 주인이 온다!”

두 사람의 대화에 쫑긋 귀를 세우고 있던 원우가 다급히 속삭였다.

“오늘 날씨, 선선하고 좋다. 후식은 테라스에서 먹을래? 여기 야경이 참 예쁘거든.”

열을 식히고 돌아온 주인이 배시시 웃었다.

“그래요. 뒷정리는 남자들이 할 테니, 두 분 먼저 나가시죠.”

독경이 선선히 일어서며 말했다.

원우가 식탁을 정리하고 독경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두 여자는 와인과 간단한 안줏거리를 챙겨 테라스로 나왔다.

“나도 여긴 처음 써 봐.”

야외용 탁자를 펼치며 주인이 말했다.

“그래? 야경 완전 끝내주는데 자주 쓰지.”

윤희가 상쾌한 밤공기에 머리를 식히며 잠시 경치를 감상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 위로 차들이 반딧불이처럼 빛을 깜박이며 움직였고, 그 너머로 한강이 검고 진득하게 넘실거렸다.

“그동안 좀 바빴거든.”

탁자 위에 천을 가지런히 펴며, 주인이 대꾸했다. 윤희가 힐끗 돌아보았다.

“참, 금장이랑 접촉한 건 어떻게 됐어?”

대답 대신 주인은 구석에 있던 의자 두 개를 들고 와 펴 앉으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어느새 윤희가 옆에 다가와 남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불순한 음모를 꾸미는 것 같은 서늘한 목소리가 밤공기에 찬찬히 스며들었다.

“일단 금장과 관련된 자료는 꽤 모았어. 김 실장님이 남기신 자료와 우리가 접근해 얻은 문서가 일치하는지도 확인했고. 알고 보니 소유주로 기재된 스티븐 리라는 사람이 담당 직원이더라고. 실소유주가 현상현이라고 명시된 문서만 확보하면 돼. 문제는 이걸 누가, 언제, 어떻게 터트리냐는 건데....”

그때, 윤희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나한테 넘겨! 내가 할게!”

“넌 안 돼. 이미 노출돼서 위험해. 태성 쪽에선 연락 없었어?”

“당연히, 있었지.”

주인의 질문에 윤희가 짙게 조소했다.

“그래? 뭐라고 했어?”

“홍보실 통해서 연락 받았는데, 미래투자 쪽이랑 연락하고 싶다나 뭐라나. 아는 대로 다 불라기에, 난 그쪽에서 연락을 받았고 인터뷰도 서면으로 진행해서 모른다고 딱 잡아뗐지. 기사 때문에 자기들이 얼마나 피해를 봤는지 모른다고 징징대기에, 태성의 ‘ㅌ’ 자도 안 나왔는데 뭔 소리냐고 받아치니 잠잠하던데?”

“그래서?”

주인이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윤희가 심드렁하게 그동안의 일을 간략히 마무리했다.

“나랑은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데스크 쪽에 연락한 것 같아. 신 부장이 앞으로 태성 기사 쓸 거면 자기한테 먼저 보고하라더라.”

주인이 한 손으로 제 입술을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마 그쪽에서 널 관리 대상자로 올렸을 거야.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겠다.”

“그럼, 그 자료는 어떻게 할 거야?”

“글쎄, 적당한 사람을 물색해 봐야지....”

그 순간, 윤희의 머릿속으로 섬광이 빠르게 스쳤다.

“내가 그 ‘적당한 사람’을 아는 것 같은데.... 태성이라면 이를 가는, 오늘만 사는 무데뽀가 있거든. 연락처 넘길게.”

“그래, 고마워. 여러모로.”

윤희가 또렷한 눈매를 부라리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주인이 제 친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와, 이독경 요리 대박 잘해! 남은 음식들로 뚝딱뚝딱! 백종원인 줄!”

원우가 양손 가득 푸짐한 요리를 들고 밖으로 나오며 신나게 떠들었다.

“와, 라면 물도 못 맞추는 누구랑 비교되는 듯! 분발하시길!”

윤희가 그의 말투를 흉내 내며 면박을 주었다. 뒤따르던 독경이 의자 두 개를 더 펴며 픽 웃었다.

“혼자 살면 느는 생존 기술이에요. 별거 없으니 큰 기대는 마시고.”

“둘 다 고생했어.”

주인이 두 사람의 잔에 와인을 따라 건넸다.

“그나저나 두 분이야말로 무슨 얘길 그리 진지하게 나누셨는지?”

독경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두 여자를 번갈아 훑었다. 윤희가 짐짓 근엄한 어조로 꾸짖었다.

“어허, 여자들이 큰일 하는데 남자가 끼면 안 되지!”

원우가 어이없다는 양 헛웃음을 짓고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참, 윤희야. 그 얘기 했어? 카페 사장님 말이야.”

“아차차, 중요한 걸 까먹었네.”

윤희가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팍 때렸다. 주인과 독경이 동시에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며칠 전에 원우가 카페에 잠깐 들렀었는데, 사장님이 가게 접는다고 하셨대.”

“뭐?”

뜻밖의 소식에 놀란 주인이 하마터면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원우가 덧붙였다.

“갑자기 결정한 거라 인사도 못 하고 간다고, 미안하다 전하셨어.”

“어디로 가신대?”

주인이 황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고향이 속초인가 그런데, 거기로 가신다고 얼핏 들은 것 같아.”

원우가 조심스레 기억을 더듬으며 답했다.

“대체 왜 접으시는 거지?”

주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손님이 있었는데, 이제 더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대....”

이번에는 윤희가 무심한 어조로 흘리듯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주인과 독경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일렁이는 눈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그 틈으로 밤바람이 쓸쓸하게 불었다.

윤희와 원우가 택시에 무사히 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온 독경이, 부엌에서 그릇을 정리하는 주인을 뒤에서 부둥켜안았다.

“애들은 잘 갔어?”

“네.”

선이 고운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으며 그가 답했다. 알코올 향이 희미하게 코끝을 스쳤다.

“정리 안 해도 돼요. 내일 도우미 아주머니 오시면 부탁할게요.”

“음식만 할 거야. 집에 냄새 배니까.”

짧은 침묵 후,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오늘 고마웠어. 나 때문에 이런 자리도 만들고. 많이 피곤하지?”

독경이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나도 재밌었어요. 이제 씻을 거죠? 물 받아 놓을 테니까, 같이 해요.”

그가 몸을 돌려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뒤 돌아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는 욕실로 옮겼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옷을 벗기고는 라벤더 향 입욕제를 풀어 놓은 물속으로 퐁당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노곤했던 몸을 부드럽게 녹아내리게 했다.

주인이 손으로 거품을 만지며 장난을 치는 동안, 독경이 나른한 표정으로 욕조에 등을 댄 채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선배....”

습기를 머금은 굵직한 저음이 욕실 안에 울려 퍼졌다.

“응?”

그녀가 천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물 아래 잠겨 있는 날씬한 허리를 팔뚝으로 감아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난 행복한데, 선배는 어때요?”

독경이 그윽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인이 오뚝하게 선 그의 코끝에 동글게 만 거품을 올리며 웃었다.

“나도 그래. 더할 나위 없을 만큼.”

그 말에 독경이 한 손으로 주인의 목덜미를 쓸며, 진하게 키스했다. 그러고는 다른 손을 물 안에 넣으며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으응....”

주인의 입에서 야릇한 교성이 흘렀다.

그가 한 손으로 젖가슴을 주무르며, 물속에 넣은 손으로 그녀의 음부를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이내 손끝으로 음핵을 집요하게 꾹꾹 누르며 자극하다 빙글빙글 돌리며 애무하더니, 손가락 두 개를 쑥 집어넣었다.

“읏!”

주인이 흠칫 놀라며 그의 단단한 팔뚝을 꽉 움켜쥐었다. 독경이 그녀의 귓불을 잘게 씹으며, 전완근이 도드라질 만큼 거칠게 손가락을 놀렸다.

“아, 아흑....”

어느새 손끝에 뜨끈한 점성이 느껴졌다. 독경이 이를 놓칠세라 곧장, 꺼덕이는 성기를 입구 안으로 뻐근하게 밀어 넣었다.

그 뒤 한 팔로 주인의 허리를 세게 휘감아 꼼짝 못 하게 한 그가, 뒤에서 제 몸을 힘껏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후우, 선배....”

“흐흣....”

주인이 대답 대신, 가쁜 호흡만 뱉었다. 열기를 머금은 습기 탓인지 금방 숨이 찼다. 그러나 독경은 제 허리를 거세게 쳐올리며 공기를 더욱 달굴 뿐이었다.

철썩, 철썩.

두 사람의 몸이 위로 들릴 때마다, 욕조 물이 파도인 양 출렁이며 한 움큼씩 넘쳤다. 물방울이 파편처럼 이리저리 튀었다.

“아응, 이... 이제 그만....”

주인이 허리를 뒤틀며 신음했다. 그러자 독경이 마른 몸을 으스러지게 끌어안으며 포말같이 뿌연 정액을 울컥 터뜨렸다.

***

그날 밤, 상현은 불도 켜지 않아 캄캄한 사무실 의자에 몸을 기대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상체를 일으켜 책상 위에 있는 작은 조명을 켰다. 그러고는 어지럽게 널린 서류들을 뒤지며 무언가를 찾았다.

잠시 뒤, 그가 자신이 찾은 서류와 사진을 차근히 되짚어 보았다. 종이에는 한 사람의 신상과 얼굴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김윤희, 인사이트경제 선임기자, 한국대 경영학과 졸업. 그래, 이제 기억나네. 현주인 친구였지, 아마?”

상현이 섬찟하게 두 눈을 번득였다.

“이게 우연일까? 아니면 의도적일까?”

무심하지만 예민하고 날카로운 음성이 허공을 부유했다.

그가 휴대 전화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잠이 덜 깬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흘렀다.

“진 비서, 내일부터 김윤희한테 사람 붙여.”

상대가 잠이 깨든 말든 제 할 말만 하고 통화를 끊은 상현이 또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번화가의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렸다.

“박중우, 어디야?”

[여기 청담입니다.]

“금장 만나고 있어? 아무래도 일을 빨리 끝내야 할 것 같다. 내가 지금 그리로 가지.”

[네, 알겠습니다. 위치 보내겠습니다.]

그가 재빨리 외투를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순찰 중이던 젊은 보안 요원과 마주쳤다.

보안 요원은 텅 빈 복도에 갑자기 사람이 등장하자 놀랐는지 움찔거렸으나, 이내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고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상현이 그런 상대의 인사를 본체만체하고는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보안 요원이 거만하기 짝이 없는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 이내 자신도 몸을 돌렸다.

“야!”

그 순간, 상현이 걸음을 멈추며 그를 불러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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