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47화 (47/76)
  • #47화. 초대 (1)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지하 주차장 한구석에 서 있는 고급 세단 안에서 독경은 피가 뚝뚝 흐르는 작고 하얀 귀를 보며 경악했다.

    주인이 여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 별거 아니야. 옷에 귀걸이가 걸려서 빼느라 힘을 좀 줬어. 그나저나 이선욱이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가 새빨갛게 부은 그녀의 귓불을 휴지로 조심스럽게 닦으며 말했다.

    “그 사람은 지금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계산하느라 바쁠걸요? 내가 아는 사람 싹 다, 소개해 준다고 했거든요.”

    그러고 나서 독경은 잠시, 후 하고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다음부터 이런 일은 그냥 내가 할게요. 선배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

    “됐어. 살짝 피 좀 난 거 가지고, 뭐....”

    유난을 떠는 상대를 향해 주인이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그러자 독경이 인상을 팍 썼다.

    “난, 선배가 손톱 하나 나가는 것도 못 봐요. 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일은 내가 할게요, 알겠죠?”

    그가 양 볼을 부루퉁하게 부풀리며 못마땅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뜨거운 입김을 다친 귓가에 불어 넣는가 싶더니, 갑자기 귓불을 제 입에 꿀꺽 삼키고는 혀끝으로 살살 핥기 시작했다.

    “앗!!”

    놀란 주인이 그의 딴딴한 어깨에 손을 올리며 밀어내려 했으나, 독경은 귓불을 부드럽게 빨며 입술 틈새로 말했다.

    “이래야 피가 멈추니까, 잠깐만 가만히 있어요.”

    그녀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았다.

    집으로 돌아온 독경은 주인의 귀를 소독하고는 조심스레 연고를 발라 주었다.

    침대에 얌전히 앉아 그의 손길을 받으며, 그녀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최근에 박중우가 금장 관계자와 자주 만난 게, 부동산 때문이었나 봐. 아예, 회사를 거덜 내기로 작정했나?”

    “승계가 불투명해지니, 제 살길을 마련하는 게 아닐까요?”

    그 말에 독경이 연고 뚜껑을 닫으며 의견을 냈다. 주인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반박했다.

    “아니. 대안이 없는 이상, 현태성은 자기 아들한테 회사를 물려줄 거야.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현상현도 그걸 아니까 뒷주머니를 차는 거고. 하지만 아무리 핏줄이라도 정도 이상을 탐하면, 현태성도 가만있지 않을 텐데. 일단, 실소유주가 현상현이라는 문건부터 확보해야 해.”

    “김강석이 준 자료에는 그것만 빠져 있죠?”

    “응, 아마 그건 현상현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아.”

    “그건 제가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뜻밖의 말에 주인이 토끼 눈을 떴다. 독경이 가지런한 이를 싱긋 드러냈다.

    “우리한텐 태성에 심은 첩자가 있잖아요. 내일은 선배들 오는 날이니까, 일찍 자요. 할 일 많잖아요.”

    그가 그녀의 몸에 다정히 이불을 덮어 주며 말했다. 그 말에 주인이 순순히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리자 피곤이 몰려왔다.

    어느새 새근새근 잠든 얼굴을 빤히 보던 독경이 휴대 전화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는 잠시 통창 너머의 야경에 시선을 두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들리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독경이 무감하게 느껴질 만큼 억양 없는 어조로 말했다.

    “나다, 보내 준 파일 확인했지? 현상현 사무실에서 그것과 똑같이 생긴 서류를 찾으면 된다. 작업 시작해.”

    수화기 너머에서 청명한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

    “주인아!”

    결혼과 논문 준비로 초췌해진 원우가 펜트하우스에 들어서자마자, 눈앞에서 미소 짓는 주인에게로 달려갔다.

    “원우야!”

    그녀 또한 달려오는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옆에 선 독경이 팔짱을 낀 채 짙은 눈썹을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윤희가 약 올리듯 빙글빙글 웃었다.

    “무슨 이산가족 상봉하냐?”

    하지만 주변의 따가운 눈초리에도 두 사람은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현주인, 너 진짜 너무하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었으면서, 어떻게 나랑 윤희한테 연락 한번 안 하냐?”

    원우의 하얀 눈가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주인의 눈망울도 어느새 그렁그렁해졌다.

    “미안해. 사정이 좀 있었어.”

    “그래, 알아. 윤희한테 대충 들었어.”

    원우가 믿을 수 없다는 양 아련한 눈길로 친구를 보다, 고개를 돌려 멀뚱히 서 있던 후배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이독경, 다시 만나서 반갑다!”

    진심이 잔뜩 실린 그 말에 독경이 빙그레 웃었다.

    “저도 반갑습니다, 원우 선배.”

    “아, 맞다. 여기 와인!”

    윤희가 양손에 들고 있던 와인 병을 독경에게 떠넘겼다.

    “그냥 오시라니까....”

    “내가 먹으려고 사 온 거야!”

    돌아오는 핀잔에 그녀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고는 집을 휙 둘러보더니, 탄성을 질렀다.

    “집 좋다! 독경 후배, 진짜 성공했네? 원우야, 나도 이런 집 사 줘!!”

    윤희가 원우에게 다가가 투정을 부렸다. 그가 난처한 기색으로 말을 더듬었다.

    “내, 내가? 이런 집을??”

    그때, 주인이 원우를 곤경에서 구했다.

    “얘들아, 배 안 고프면 구경 먼저 할래? 이독경이 안내할 거야.”

    그 말에 독경은 흠칫 놀랐지만, 이미 다 얘기가 된 것처럼 침착하게 나섰다.

    “이쪽으로 오시죠.”

    윤희와 원우가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나선 아이들처럼 홀린 듯 뒤를 졸졸 쫓았다. 그사이 주인은 준비된 음식들을 접시에 담았다.

    독경은 영혼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태도로 집을 소개했다. 하지만 윤희와 원우는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려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대박! 이거 자동이네.”

    “나 이거 알아! TV에 나온 연예인 집에서 봤어!”

    두 사람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것저것 만지고, 누르고, 사용해 보았다. 놀이공원에 처음 온 아이들처럼 들뜬 것이 한눈에 보였다.

    독경은 상반된 성격의 두 사람이 오랫동안 연애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취향이 비슷하고 대화가 잘 통한다는 점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다.

    윤희가 연신 호들갑을 떠는 자신들을 빤히 보는 시선을 의식하고는 머쓱하게 웃었다.

    “우리가 좀 산만하게 굴었지? 요즘 가전제품을 보러 다니니까 관심이 느네, 하하.”

    그제야 원우도 안마 의자에서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하하, 그러게. 우리가 실례를 했구나. 언짢았다면 미안....”

    두 사람이 머쓱한 표정으로 제 눈치를 살피자, 독경은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혀요. 더 구경하셔도 돼요. 어차피 선배랑 전 잘 안 쓰는 것들도 많고....”

    “주인이도 여기서 같이 살아?”

    원우가 안경 너머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희가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우리가 꼬꼬마들도 아니고, 먹을 만큼 먹었는데 같이 살 수도 있지 뭐.”

    “아!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신기해서. 아직도 나한텐 너희가 스무 살쯤으로 보이나 봐. 빨리 업데이트해야겠다!”

    원우가 천진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독경이 옅게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육 년 만에 만났잖아요. 참, 저 제품 마음에 드시면 결혼 선물로 드릴까요? 주소 알려 주시면 새 상품으로 보낼게요.”

    “정말??”

    독경이 안마 의자를 가리키며 묻자, 윤희가 손뼉을 짝 치며 반색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원우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니야, 어차피 집도 좁아서 놓을 데가 없어.”

    “왜에~ 내 머리에 이고 살 거야!!”

    윤희가 억지를 부리자, 원우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주인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구경 다 했으면 밥 먹자. 식기 전에 먹어야 맛있지.”

    그 말을 따라 세 사람은 부엌으로 이동했다. 맨 뒤에 서 있던 윤희가 앞에 선 독경을 어깨로 슥 밀었다.

    “님, 축의금으로 대신 콜?”

    말뜻을 알아들은 독경이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희가 약간 사나워 보이는 눈 한쪽을 찡긋거렸다.

    먼저 도착한 원우가 식탁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우와, 이게 다 뭐야?”

    안 그래도 넓은 식탁을 각종 요리로 꽉 채우니, 잔칫상이 따로 없었다. 윤희도 감탄했다.

    “뭘 이렇게까지 했어?”

    “아니야. 내가 직접 하고 싶었는데, 좀 바쁘기도 했고 또 요리도 잘 못해서.... 이독경이 출장 뷔페 불러 줬어. 난 그냥 그릇에 담기만 한 거니까 부담 갖지 마.”

    주인이 볼을 살짝 붉히며 독경을 흘깃 보았다. 지난번 우당탕 요리 수업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은 그가 픽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음식 다 식겠어요. 빨리 앉으시죠.”

    세 사람이 식탁에 빙 둘러앉는 동안, 독경이 셀러에서 와인을 꺼내 왔다.

    “술 괜찮죠?”

    “그럼! 그럼!”

    윤희가 빛의 속도로 잔을 내밀었다. 독경이 네 잔에 와인을 채우고는 주인 옆에 앉았다.

    쾌활한 목소리가 실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렇게 모두 모인 게 얼마 만이냐. 정말 꿈만 같다. 그동안 다들 고생했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길 바라자. 건배!”

    “건배!”

    원우가 웃으며 제일 먼저 잔을 부딪쳤다. 주인이 제가 다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도 결혼 축하해!”

    네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눴다.

    독경이 주인을 슥 살피더니, 손님들 앞에 접시 하나를 내밀었다. 쿠키로 짐작되는 괴상한 음식이었다.

    “이건 주인 선배가 직접 만든 거예요. 한번 맛보세요.”

    “오호? 그래?”

    윤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하나를 집더니 입에 가져갔다. 원우도 웃으며 입에 쏙 넣었다.

    “우어억!!”

    곧바로 윤희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먹던 음식을 와르르 뱉었다. 원우는 그녀처럼 차마 뱉지는 못하고 목 뒤로 꿀꺽 넘겼다.

    “맙소사, 이게 뭐야?”

    윤희가 입맛을 다시며 인상을 썼다. 주인이 울상을 지었다.

    “미안, 맛없지? 나 요리는 포기해야 할까 봐.”

    그 말에 독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쿠키 하나를 바삭 씹었다.

    “음, 이번엔 괜찮았는데....”

    그랬다. 그날 이후, 그는 주인의 음식에 면역이 생겼던 것이다.

    “아, 맞다!”

    그때, 남들 몰래 물통 하나를 다 비운 원우가 무릎을 치며 일어서더니 새하얀 봉투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하, 내가 너한테 청첩장을 주게 될 줄이야. 인쇄할 때만 해도 꿈도 못 꿨는데....”

    윤희가 살짝 취기가 오른, 젖은 눈으로 친구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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