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46화 (46/76)
  • #46화. 잠입 (2)

    “너무 큰데....”

    반지의 크기가 심히 부담스러웠는지, 주인은 꽤 진지한 얼굴로 토를 달았다.

    “이 정도는 돼야 멀리서도 임자 있는 몸이란 게 확실히 보이죠.”

    독경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였다.

    “그런 목적이라면 차라리 수갑을 채우는 게 낫지 않아?”

    그녀가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그러자 그가 곤혹스럽다는 양 제 하관을 큰 손으로 가리며 혼잣말을 했다.

    “음,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주인이 제 귀를 의심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길쭉하고 굵은 손가락 사이로 한껏 치솟아 있는 독경의 입매가 또렷하게 보였다.

    무언가 괴상망측한 상상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주인이 질겁하며 이번에는 그의 옆구리를 세게 꼬집었다.

    독경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화가 잔뜩 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머쓱해진 그가 씩 웃고는 딴청을 피우는 것처럼 허공을 보며 말했다.

    “그냥 그걸로 해요. 난 그게 좋단 말이에요.”

    “이건, 평상시에 끼기 너무 불편하단 말이야. 가격도 비쌀 거 같고....”

    주인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기다리는 직원을 곁눈질하며 말끝을 흐렸다.

    몇 차례 실랑이 끝에 결국, 두 사람은 적당히 튀면서도 무난한 반지로 합의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남성용 반지도 골랐다.

    독경의 왼손에 반지를 끼울 때, 주인은 자신의 가슴이 이상하게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진짜 약혼식이라도 올리는 것처럼, 저절로 몸과 마음이 경건해졌다.

    “이독경.”

    주인이 차분하고 우아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약혼, 축하해.”

    이어지는 말에 독경이 하얀 치아가 전부 드러날 정도로 크게 미소 지으며, 중저음의 울리는 음성으로 화답했다.

    “선배도요.”

    그는 오래전 스스로에게 한 약속대로 기어이, 그녀의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웠다.

    ***

    금장회계법인 이선욱 차장은 자료를 찾으며, 비릿하게 웃었다. 얼마 전, 업계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고객 하나를 소개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고객사 중 하나에서 보다 ‘전문적인’ 재무 컨설팅을 받고 싶어 한다며 은근슬쩍 말을 흘렸다.

    선욱이 그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근래 제법 익숙해진 미래투자라는 회사를 검색해 보았다. 그러나 기대보다 노출된 정보가 많지 않아 조금 찜찜했다.

    그러나 태성이나 일만 등 나름 규모 있는 기업의 주식 지분율이 꽤 높은 것으로 보아, 숨겨진 자금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김주환 대표와 현도경 이사를 만났을 때, 그는 확신했다. 명품으로 휘감은 그들에게서 졸부의 냄새가 팍팍 풍겼기 때문이었다.

    선욱의 시선이 은은하게 빛나는 그들의 왼손으로 향했다. 눈앞의 고객들은 결혼을 앞둔 사이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 말은 곧 이 회사 또한 개판이라는 뜻이었고, 눈먼 돈이 제 앞으로 굴러왔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가 만면 가득 비굴한 미소를 띠며 말문을 열었다.

    “최지승 대표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금장회계 이선욱 매니저라고 합니다. 편하게 이 차장이라고 부르십시오.”

    그의 인사에 독경이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거렸다.

    “네, 저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 차장님.”

    “최 대표님께 전해 듣긴 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서비스를 원하시는지요?”

    한껏 공손한 목소리가 회의실 안을 채웠다.

    “올해부터 저희가 공격적으로 투자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새로운 사업도 준비 중이고요. 그래서 그 전에, 해외에 법인을 하나 설립할까 합니다만....”

    독경의 예리한 눈매가 가늘어지자, 음험하고 탐욕스러운 분위기가 한층 농익었다.

    “혹시 원하시는 국가가 있습니까?”

    “글쎄요, 이왕이면 들키지 않을 만한 곳이었으면 좋겠군요.”

    상대의 질문에 독경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선욱이 입가를 실룩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전 본사가 있는 싱가포르나 홍콩 쪽을 추천드리지만, 원하시면 버진아일랜드나 세이셸 제도 등도 가능합니다. 이곳 모두 법인세 등의 세율이 낮아 획기적인 ‘절세’가 가능하죠. 이미 저희 쪽에서 만들어 둔 법인들이 있으니, 원하는 곳만 선택하시면 됩니다.”

    말을 마친 선욱이 남녀를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폈다. 독경이 약간 감탄한 어조로 감상을 표현했다.

    “음, 뭐랄까? 이건 마치, 쇼핑 같군요.”

    그의 머릿속에 진열장에 전시된 반지들처럼 종이 안에서만 존재하는 회사들이 죽 늘어서서 선택을 기다렸다.

    “하하, 따지고 보면 이것도 일종의 쇼핑이라 할 수 있죠.”

    선욱이 긴장을 풀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차갑고 깐깐해 보이는데 생각보다 순진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버진아일랜드로 하죠. 명의는 어떻게 하나요?”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주인이 입을 열었다. 맑고 또렷한 음색에 선욱은 흠칫 놀랐다. 의외로 단단한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아, 당연히 명의도 저희 쪽에서 제공합니다. 이런 경우, 직원 이름을 사용하는 건 흔하거든요. 물론, 별도의 명의 대여 수수료가 발생하긴 하지만요. 그리고 실소유주가 미래투자임을 명시하는 문서만 하나 더 작성하시면 됩니다. 저희 쪽 회계사들이 관련 서류를 꼼꼼히 준비하니,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그 순간, 주인이 눈을 반짝였다.

    “원소유주를 밝히는 문서가 하나 더 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이 서류만 있으면 그 회사가 본인 거라는 걸 증명할 수 있죠.”

    선욱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예시로 들 만한 서류 몇 개를 컴퓨터 화면에 띄웠다.

    “이런 식으로 된 문서입니다. 여기 이 칸에 여러분의 이름이 들어갈 겁니다.”

    그가 친절하게 손가락으로 위치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었다. 주인이 그 서류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그때, 독경이 따분해 죽겠다는 얼굴로 운을 뗐다.

    “참, 스타엔터 대표가 여길 통해서 LA에 별장을 구매했다던데....”

    “네, 맞습니다. 근데 재밌는 게 뭔지 아십니까? 기사가 나간 후, 해외 부동산 문의가 오히려 늘었다는 겁니다. 세준, 현진, 태성과도 계약 진행 중이고요.”

    제 딴에는 이렇게 알 만한 기업들과 거래한다고 자랑도 할 겸, 신뢰도 쌓을 겸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그 발언에 독경과 주인은 더욱 확신에 찰 뿐이었다. 드디어 상현의 꼬리를 잡았다.

    “우리도 이참에 해외에 별장이나 하나 장만할까?”

    독경이 너스레를 떨며 주인을 보았다.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그 뒤, 그가 어딘가 은밀한 표정을 지으며 선욱을 보았다.

    “혹시 여기서 흡연 가능한 곳이 어딥니까?”

    “아, 건물 밖에 작은 부스가 있습니다.”

    선욱이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며 대답했다.

    “하하, 이것 참 담배를 끊어야 하는데 쉽지가 않군요. 차장님은 비흡연자이십니까?”

    독경이 안광을 더욱 기이하게 빛내며 선욱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는 그것이 따로 할 말이 있다는 신호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 아닙니다. 저도 흡연자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같이 가실까요?”

    그러자 독경이 주인에게 허락을 구했다.

    “현 이사님, 잠시 자리 좀 비워도 괜찮겠습니까?”

    “네, 그러세요.”

    그녀가 도도하게 답했다.

    두 남자는 일상적인 주제를 올리며,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독경은 선욱에게 비밀을 고하듯 현 이사와 자신은 약혼한 사이며, 올해 안으로 결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결혼 선물로 해외 별장을 고려 중이라며, 조용히 알아봐 줄 수 있겠냐고 넌지시 물었다.

    당연히 선욱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넝쿨째 들어온 행운이 믿기지를 않았다.

    두 남자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사무실 안은 분주해졌다. 주인이 벌떡 일어나 선욱의 책상으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사실 주인과 독경은 이곳에 오기 전, 미리 합을 맞췄다. 독경이 금장 쪽 사람의 주의를 끄는 동안, 주인이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기로 말이다.

    그녀는 책상 위에 늘어놓은 각종 자료와 모니터에 띄운 예시 서류를 휴대 전화로 부지런히 촬영했다.

    선욱은 이것저것 캐묻는 그들을 위해 실제로 진행되는 서류들을 직접 보여 주었다. 그 덕분에 강석이 보낸 자료와 금장의 서류 양식이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현이 이곳의 고객이라는 것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됐어....”

    주인이 가녀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문밖에서 설핏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가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다급히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옷걸이에 걸려 있던 선욱의 재킷을 지나치다 귀걸이가 삐져나온 실올에 걸리고 말았다.

    “앗!!”

    주인이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재빨리 손을 올려 귀걸이를 빼내려 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당최 빠지지를 않았다. 그사이, 남자들의 구둣발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주인이 입술을 꽉 깨물며 걸린 실올을 팍 잡아당겼다.

    “윽!!”

    꾹 다문 잇새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렀다. 귓불이 화끈 달아오르며 욱신거렸다.

    그러나 상태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제자리에 앉아 머리카락으로 귀를 가리고는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달칵.

    그때, 외출했던 남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화기애애하게 웃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 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워낙 말씀을 잘하셔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요.”

    선욱이 너스레를 떨며, 주인에게 말했다.

    “아, 그러셨군요. 다행이네요.”

    그녀가 억지로 입가를 올리려 노력했다.

    “제가 할 말을 차장님이 하시는군요. 오랜만에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만나서 저도 즐거웠습니다.”

    독경이 넉살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앉다가, 주인을 보고는 어깨를 흠칫거리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살구색 블라우스 위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던 것이다.

    “자기야, 얼굴에 뭐가 묻었네?”

    독경이 커다란 손으로 주인의 뺨을 쓸어내리는 척하며, 귓불에 선연히 맺힌 핏방울을 손끝으로 슥 닦았다.

    “대, 대표님...?”

    예상 밖의 행동에 주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와 선욱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독경이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차장님께 우리 사이 말씀드렸어. 결혼식에도 초대했고. 그렇죠?”

    독경이 가는 눈을 부드럽게 휘며 동의를 구하자, 선욱이 허허 웃었다.

    “네, 그럼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그가 주인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다친 귀 쪽을 제 몸으로 가리더니, 천천히 일어섰다.

    “차장님,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언제쯤 나올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선욱이 입이 찢어질 만큼 환한 미소를 지었다.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정리해서 프레젠테이션 하겠습니다.”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서류들은 연락 주시면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독경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인사했다. 주인도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선욱이 사무실을 떠나는 두 사람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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