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잠입 (1)
“맞아요. 김주환 실장과 전,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니에요. 스물하나에 대학 선후배로 만나 사귀었죠.”
주인이 담담한 표정으로 털어놓는 과거에 지승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애매한 심경이었다.
솔직하게 말해 주는 것은 고마웠으나, 그 과거가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기에 더 그렇게 느끼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두 눈을 차분히 내리깐 채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하지만 저흰 오래 만나지 못하고 헤어졌어요. 집안의 반대가 심했거든요. 그래서 몇 년간 서로 소식도 모르고 살다, 최근에 다시 만난 거예요.”
“그럼, 그 이름은...?”
그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물었다.
“원래 이름은 이독경이고, 김주환은 가명이에요. 저도 직접 만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어요.”
주인이 어딘가 구슬프게 미소 지었다.
지승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이름까지 바꾸고 살아야 할 만큼 그들의 인생이 기구하고 험난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가 다시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이 실마리를 풀면 숨겨진 그들의 이야기에 더 다가갈 수 있으리라.
“그럼, 두 사람은 왜 금장에 접근하려는 겁니까?”
그 물음에 주인이 잠시 두 눈을 크게 떴다. 크고 맑은 검은 눈동자가 잠시 일렁거리더니,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저희에겐 풀어야 할 숙제 같은 게 있거든요....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시는 편이 대표님껜 좋을 거예요. 원치 않는 일에 휘말리실 수도 있거든요.”
“하....”
지승이 진득한 한숨을 내쉬며 단정하게 맸던 넥타이를 거칠게 흐트러뜨렸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녀가 눈앞의 남자를 연민 어린 시선으로 응시했다.
“혼란스럽게 해 드려 죄송해요. 일부러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사람에겐 누구나 꺼내고 싶지 않은 과거가 하나쯤은 있는 법이잖아요.”
지승이 푹 수그렸던 얼굴을 들어 주인을 보았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깊숙이 뿌리 내린 나무처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앉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목 같은 저 단단함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 같았다.
그는 생각했다. 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 상대의 모든 것을 알 수도 없고,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추궁 아닌 추궁을 하며 그녀를 몰아세우는 자신의 태도가 도리어 온당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승은 딱, 한 가지만은 반드시 얻어 내겠다고 다짐했다.
“도경 씨 이름도 가짜입니까? 그럼 진짜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음....”
주인이 잠시 번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결심하고는,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발음하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현주인이에요. 현, 주, 인.”
지승은 그녀가 너무도 순순히 본명을 밝히자, 적잖이 놀랐다. 반쯤은 거절하지 않을까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주인이 두 뺨을 살짝 물들이며 수줍게 말했다.
“제 인생에 큰 도움을 주신 분께 이름 정도는 말해도 괜찮겠죠? 그 회사에 들어간 게 저한테 얼마나 많은 힘이 됐는지 아시면 놀랄 거예요.”
꾸밈없는 표정과 말투에서 순수한 진심이 엿보였다.
그 순간, 지승은 어떻게든 주인을 미워해 보려고 굳게 다졌던 못난 마음을 접어 버렸다. 미련하다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다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푹 내쉬더니, 결연한 눈빛을 반짝이며 명함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이선욱 차장이라고, 전 직장 동료를 통해 알게 됐습니다. 일단, 전화로 언질을 줬으니 한번 연락해 보십시오.”
그녀가 무심결에 명함을 받아 들며, 상대를 뚫어지게 보았다. 뜻밖이었다. 재빨리 상황을 파악한 주인이 단호한 어조로 그를 안심시켰다.
“저희 일로 대표님께 피해가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약속드려요.”
그러자 이번에는 지승이 그녀를 무안할 정도로 빤히 바라보았다.
“주인 씨는 의외로 남자 마음을 잘 모르는군요. 내가 돕기로 한 건, 어느 정도 손해를 각오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본명을 알게 된 이상, 나 또한 그 일에 발을 들인 거나 마찬가지고요.”
말을 마친 그가 후회 따위는 털어 버리겠다는 양 벌떡 일어섰다.
“필요하면 언제든 또 연락해요. 기다리겠습니다.”
주인이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지승의 뒷모습을 하릴없이 좇았다.
“최지승, 저 인간 의외로 시원한 구석이 있네요. 좀스럽게 굴 줄 알았는데....”
그때, 누군가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그녀의 등 뒤로 쓱 등장했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깜짝 놀란 주인이 뒤를 돌아보자, 독경이 빙긋 웃으며 그녀의 손에서 명함을 낚아챈 뒤 슬쩍 훑었다.
“이독경, 너 왜 여기 있어...?”
얼떨떨한 표정으로 던지는 질문에 뻔뻔한 낯짝으로 내뱉는 답이 돌아왔다.
“대화를 허락한다고 했지, 감시를 하지 않을 거라곤 안 했어요.”
“맙소사!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주인이 제 이마를 한 손으로 짚으며 경악스럽게 탄식했다. 독경이 약 올리듯 빙글빙글 웃으며 조금 떨어진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큰 기둥이 가린 탓에 그녀의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그는 두 사람이 만나기 한참 전부터 자리를 잡고 앉아, 감시 태세를 갖췄다.
지승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내비치면, 곧바로 달려들어 그를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팰 생각이었다. 아주 약간의, 분풀이 겸 경고라고나 할까?
독경은 미약하게나마 주인이 지승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언제나 불필요한 관계를 지양하는 그녀가, 곁을 내준 것 자체가 이를 증명했다.
당연하게도 그는 짜증이 치밀었다. 어떻게 되찾은 관심과 애정인데, 이를 누군가와 한 톨만큼이라도 나눌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쌍심지를 켜고 두 사람을 감시했다.
하지만 주인과 지승 모두,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결이 비슷한 부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음 만남을 허락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에게 집요하게 달라붙는 음흉하고 추잡한 눈길을 봐준 것만으로도, 그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이었기 때문이다.
독경이 저답지 않게 상큼한 눈웃음을 지으며, 주인에게 제안했다.
“나한테 꽤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이동하면서 진짜 ‘대화’라는 걸 해 보지 않을래요?”
***
“어디 가는 거야?”
운전석에 앉아 의미심장하게 웃는 독경을 보며 주인이 탐탁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실실 웃는 낯을 보아하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일단, 이 비서님이 금장이랑 미팅 잡기로 했어요. 선배도 갈 거죠?”
“당연하지. 그건 이미 끝난 얘기 아냐?”
그녀가 한껏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그가 힐끗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럼, 그쪽에 뭐라고 소개할 거예요?”
“글쎄, 네 비서나 재무 담당자쯤으로 하지 뭐. 명함 하나 파는 거야 금방이니까. 근데, 왜?”
그의 질문에 주인이 심드렁한 척하며 상대를 떠보았다. 그때, 독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떤 속셈이 있을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음, 그래서 말인데.... 선배를 미래투자 이사로 소개하는 건 어떨까요?”
“뭐??”
앙칼진 목소리가 차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것은 그녀도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얄미울 만큼 여유 넘치는 저음이 놀란 상대를 달래듯 나긋나긋 이어졌다.
“자세한 설정이 있으니까, 일단 좀 더 들어 봐요. 지금 선배는 제 약혼녀예요.”
눈 깜짝할 새 누군가와 약혼식을 올리고 만 주인이 인상을 팍 구겼다. 그 누군가인 독경이 반응을 살피더니 소리 내 웃었다.
“하하, 더 들어 보라니까요. 만약, 금장에서 대표의 약혼녀를 이사로 앉히는 회사를 고객사로 만난다 치죠. 그럼, 어떤 생각이 들까요? 아, 여기는 개판에 호구구나 싶지 않겠어요? 만만해 보이니 방심할 거예요. 그리고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비겠죠. 그리고 우린 그 틈을 노리는 거고요.”
덧붙인 설명에 잔뜩 찡그려진 미간이 약간 펴졌다. 그러나 여전히 퉁명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코 꿰는 건 나 같은데?”
“하하, 기분 탓이에요.”
그가 호탕하게 웃고는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독경이 그녀를 데려간 곳은 결혼 예물로 유명한 브랜드 매장이었다.
주인이 휘황찬란한 빛에 눈을 흐리는 사이,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는 매장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안내 직원이 경쾌한 목소리로 두 사람을 맞았다.
“약혼반지를 보려고 합니다만....”
그 말에 직원이 훤칠하고 번듯한 남녀를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 모두 상당히 출중한 외모였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남자 쪽은 선이 굵고 거친 느낌이었고, 여자 쪽은 가늘고 섬세한 인상이었다.
“어머, 축하드려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그녀가 활짝 웃으며 축하 인사를 건네고는, 반짝이는 반지들이 보기 좋게 나열된 진열장으로 안내했다.
“혹시 찾는 제품이 있으신가요?”
“다이아 반지. 무조건 크고, 예쁘고, 비싼 거!”
단순무식한 말을 태연하게 던지며 독경은 직원을 향해 씩 웃었다. 짓궂으면서도 어딘가 야릇한 미소에 상대는 슬며시 얼굴을 붉히며 풋 하고 웃었다.
“저희 매장은 0.3캐럿 이상의 상품만 취급하고 있어요. 혹시 반지 호수는 아시나요?”
“전 마디가 굵은 편이어서 평균보다 큰 걸 착용하고, 이쪽은 원래 10호였는데 지금은 살이 좀 빠져서, 더 작을 수도 있습니다.”
독경이 주인을 슬쩍 내려다본 뒤, 거침없이 말했다.
“어머, 다정하셔라. 자세히도 아시네요. 크기는 나중에 얼마든지 조절 가능하니, 일단 디자인부터 결정하시는 게 좋겠네요.”
직원이 진열장에서 여러 종류의 반지를 꺼내 늘어놓는 사이, 주인이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너, 내 반지 호수는 어떻게 알았어?”
그 말에 독경이 한쪽 입꼬리를 들며 픽 웃었다.
“내가 선배에 대해 모르는 게 있던가요? 몸 어디에 점이 있는지, 눈 감고도 맞힐 수 있는데....”
음심으로 가득한 넉살에 그녀가 소리 없이 입을 쩍 벌리더니, 이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장난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가 간질거리는 옆구리를 손으로 쓸며 개구지게 낄낄거렸다.
“일단 만족도 높은 제품 위주로 골랐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때마침 직원이 말을 건넸다.
독경이 다시 험악해 보일 만큼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와 그것들을 슥 훑더니, 별 고민 없이 가장 크고 화려한 반지를 골라 주인의 약지에 끼웠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제 턱을 쓸며 예술품이라도 보듯, 길고 하얀 손가락을 흡족하게 감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