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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44화 (44/76)

#44화. 발작 (3)

화장실 안에서 주인은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까 봐 염려스러워, 말하지 않고 외출한 것인데 독경은 기어이 이곳까지 찾아오고야 말았다.

‘차라리 말을 할 걸 그랬나?’

그녀가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상황은 같으리라는 결론에 다다르자 빠르게 단념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승에게 마음의 빚이 있던, 주인만 입맛이 썼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만남을 청한 것뿐인데, 어느새 본의 아니게 그를 속이고 이용까지 한 셈이 됐으니, 영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화장실 밖으로 나서며 어떻게든 심보 고약한 훼방꾼을 떼어 놓고, 지승에게 식사라도 대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고는 들어온 복도와는 반대쪽 길로 나가 카페에 막 발을 들이려는데, 정문 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주인은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내리깐 시선을 들었다. 그곳에는 지긋한 중년의 남성들이 담소를 나누며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때, 그녀의 시야에 무리 한가운데서 여유로운 미소를 띤, 상대적으로 젊은 남자의 얼굴이 잡혔다.

그는 턱을 높이 치켜든 채 거만한 눈으로 자신을 호위하듯 에워싼 남자들을 둘러보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날카로운 실눈에 경멸과 욕망이 번들거렸다.

“현상현....”

주인의 입술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렀다.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눈빛과 표정이었으므로.

어린 시절 모친의 손에 이끌려 본가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그는 저런 눈으로 자신을 오시했다.

갑자기 맥박이 빨라지며, 호흡이 가빠 왔다. 꽉 쥔 두 주먹에 식은땀이 배었다.

주인이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저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픈 욕구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제일 먼저, 독경의 상처만큼 그의 왼팔을 찢어 놓으리라. 그런 다음, 자신처럼 그의 왼 손목을 짓이겨야지.

검붉은 핏빛이 가득 튀는 잔인한 상상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거침없이 폭주했다.

주인이 성난 걸음을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 순간 굵은 팔뚝이 그녀 앞을 탁, 막아섰다. 고급스러운 정장 옷감 위로 근육이 도드라져 보이는 그 팔은 주인의 어깨를 감싸더니, 이내 몸을 자신 쪽으로 빙글 돌려세웠다.

그녀의 시야에 너른 가슴팍이 꽉 찼다. 큼직한 두 손이 제 어깨를 꽉 다잡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저음의 목소리가 신의 계시처럼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저 새끼 찢어발기고 싶죠? 근데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선배가 아니라 내가 해요. 지금이라도 당장 말만 해요. 버러지만도 못한 새끼, 죽여 버릴까요?”

충직한 사냥개가 공격 신호를 기다리며, 사납게 그르렁거렸다. 독경이었다. 그 울림이 주인을 잔혹한 상상에서 퍼뜩, 일깨웠다.

“아니야, 기다려!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녀가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팔을 붙잡으며 비틀거렸다. 그가 휘청거리는 연약한 허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선배....”

“일단, 일단... 여기서 나가자....”

주인이 갈급하게 애원했다.

***

펜트하우스로 돌아온 주인은 그대로 소파 위에 풀썩 쓰러져 버렸다. 독경이 따뜻한 물을 한잔 들고 오며 물었다.

“괜찮아요?”

“응, 약간 놀란 것뿐이야. 쉬면 괜찮아질 거야.”

주인이 그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제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독경이 그런 그녀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거기서 갑자기 현상현을 만날 줄이야.... 참, 전화는 왜 이렇게 안 받았어요?”

“아!”

주인이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리자, 재빠르게 눈치챈 독경이 호텔 카페로 전화를 걸었다. 짤막한 통화를 마친 그가 말했다.

“직원이 근처를 다 뒤져 봤는데도 없다고 하네요. 분실물도 접수된 게 없고요. 아무래도 최지승이 가져간 것 같은데....”

그가 샐쭉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노파심에 황급히 덧붙였다.

“이걸 구실로 또 그 자식 만날 생각은 말아요. 내가 직접, 받아 올 거니까!”

“이독경....”

그때, 주인이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독경은 또 혼날까 싶어, 지레 어깨를 움찔거렸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어지는 음성은 봄바람만큼이나 따스하고 보드라웠다.

“오늘 와 줘서 고마워. 네가 말리지 않았으면, 내가 다 망쳤을지도 몰라....”

그녀가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떨리는 목소리에서 자책과 후회가 진하게 묻어났다. 그가 슬며시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괜찮아요, 잘 참았잖아요. 그거면 됐어요.”

상냥한 위로에 주인이 손을 천천히 내리며 그를 마주 보았다. 독경이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기대감 어린 눈을 반짝였다.

“나 오늘 잘한 거 맞죠?”

“응.”

칭찬을 갈구하는 아이 같은 미소에 그녀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럼, 뭐 잊은 거 없어요?”

독경이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에 입을 쪽쪽 맞추며 물었다.

“그, 글쎄...?”

주인이 저돌적으로 자신의 몸을 부딪쳐 오는 그에게 속절없이 휘둘리며 대답했다.

“나 참, 그새 까먹은 거예요? 잘하면 상 주기로 했잖아요. 줘요, 이제.”

“아!”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탄성을 질렀다.

이렇듯 그는 그녀가 빈틈을 보이는 순간을, 귀신같이 노렸다. 절대로 거절할 수 없게, 완벽히 빠져나가지 못하게.

주인을 소파 한쪽으로 몰아붙인 독경이 키스를 하며 벌어진 블라우스 사이로 손을 넣었다. 부드럽게 말캉거리는 감촉이 황홀하게 손끝에 닿았다.

격렬하게 맞부딪히는 입술 사이로 신음이 삐져나왔다.

“으음....”

그는 언제나 그녀의 신음이 들리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흥분하며 이성을 잃고는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독경은 거칠게 그녀의 목덜미를 혀로 핥고, 이로 깨물다 아예 윗옷을 가차 없이 뜯어 버렸다. 그러고는 봉긋하게 솟은 주인의 젖가슴을 입안이 꽉 차도록 물고는 쭉쭉 빨았다.

잠시 뒤, 굳게 닫혀 있던 그녀의 가랑이를 그가 손으로 억지로 벌렸다.

“헉!”

놀란 주인이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며 외쳤다.

“침실, 침실로 가자. 응?”

독경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그녀를 한쪽 어깨에 둘러메고는 침실로 뚜벅뚜벅 향했다. 그러고는 주인을 침대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는, 한쪽 눈을 가볍게 접었다 폈다.

“여기로 오자는 건 밤샐 각오가 됐단 뜻이겠죠?”

“아, 아니. 그런 건....”

당황한 그녀가 서서히 다가오는 그를 밀어냈으나, 그는 그녀의 아랫배를 제 뜨끈한 하체로 꾹 누를 뿐이었다.

그날 새벽까지 독경은 온갖 이름을 붙여 가며 주인에게 갖가지 상을 받아 냈다. 그리고 기어이 대상까지 타 낸 뒤에야, 만족스럽게 잠이 들었다.

흐트러진 침대 한쪽에 뒤엉킨 두 사람이 죽은 듯 고요한 꿈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날 밤, 요구 사항을 관철한 사람이 그만은 아니었다. 그녀도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

지승과 단둘이 만날 기회를 얻은 것이다.

***

그녀의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두른 채 유연하게 허리를 치대던 독경이 인상을 팍 구겼다.

“선배는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꼭 그 자식 얘기를 해야겠어요?”

“음, 그렇지만 오늘 인사도 못 하고... 하아, 헤어졌잖아.... 가방도 돌려받아야 하고.... 금장 건도 마무리 지어야, 아앗!!”

마지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독경이 제 몸을 난폭하게 밀어 넣었다. 주인이 짧게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가 입술을 지그시 씹으며 물었다. 이마에 불거진 핏줄이 더욱 선명하게 꿈틀거렸다.

“선배, 혹시 최지승 좋아해요?”

“뭐??”

그녀가 힘없이 늘어졌던 윗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자꾸 만나려고 하니까 그러잖아요,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너, 미쳤어?”

그녀가 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 쳤다. 그가 그 작은 주먹을 자신의 손으로 꽉 그러쥐었다.

“그러니까 만나지 말라고요. 한 번 더 만나면, 나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으니까.”

“그래서 마지막으로 얘기하는 거잖아.”

주인이 가녀린 두 팔을 벌려 독경을 껴안으며, 귓가를 뜨겁게 간질였다.

“다시 또 몰래 만날 수도 있지만, 그러긴 싫어. 난 너 속이고 싶지 않아. 너 마음 상하면 나도 속상하니까....”

독경은 그녀의 감미로운 말과 행동에 짜증과 불만이 사르르 녹는 것이 스스로도 몹시 기가 찼다.

그러나 결국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결연하게 약속을 받아 낼 뿐이었다.

“나 참, 알겠어요.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에요. 더는 용납 못 해요!”

“응!”

주인이 배시시 웃자, 독경이 그녀를 너른 제 품에 담으며 털썩 드러누웠다.

“그럼 이제, 하던 거 마저 할까요? 다리 벌려요.”

***

주인과 지승은 함께 근무했던 사무실 근처 카페에서 다시 만남을 가졌다.

대로변에서 한참 떨어진 한적한 곳이었으나, 점심시간이 걸린 탓인지 실내는 제법 복작거렸다.

주인이 먼저 사과의 말부터 꺼냈다.

“그날은 말도 없이 가서 죄송해요.”

그러자 지승이 무표정한 얼굴로 높낮이 없이 답했다.

“괜찮습니다. 무슨 사정이 있었겠죠. 도경 씬 비밀이 많은 사람이니까.”

말에 돋친 뾰족한 가시 때문일까, 그의 표정이 몹시도 싸늘해 보였다. 늘 웃음기를 잃은 적 없던 사람이기에 더욱, 냉담하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도경 씨가 사라지고 김주환 실장도 떠난 뒤에, 한참을 앉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뭐가 문제였을까...?”

“대표님....”

주인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불렀다.

“이독경이 누굽니까?”

지승의 매서운 눈빛이 그녀의 심장을 쿡 찔렀다. 혹시나 싶었지만, 역시나였다.

그는 독경이 미래투자 대표도 겸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만큼 눈치가 빨랐다.

그런 사람 앞에서 어설프게 거짓말을 했다가는, 도리어 신뢰를 완벽히 잃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은 더 이상 그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지승은 이런 일에 아무것도 모른 채 이용당할 만큼, 하찮은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이였다.

그녀는 살얼음판을 걷듯 조마조마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물었다.

“그 이름, 어떻게 아셨어요?”

그 질문에 지승은 대답 대신, 탁자 위에 그녀의 가방과 휴대 전화를 올려놓았다.

“김 실장이 떠난 후에 도경 씨 자리에서 계속 진동이 울리더군요. 일부러 볼 생각은 없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호기심을 누를 순 없었습니다. ‘이독경’이라는 사람에게 계속 전화가 오고 있었으니까요.”

말을 마친 그가 앞에 있던 찬물을 단숨에 비웠다.

“그런데 그 번호가 낯익었습니다. 확인해 보니 제가 저장한 김 실장 번호와 같더군요.”

주인의 초승달같이 섬세한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지승이 그 미세한 반응을 날카롭게 주목했다.

“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까요?”

그녀가 나른하고 고혹적인 음성으로 운을 뗐다.

전설 속 세이렌의 노래처럼, 그는 신비로운 목소리에 넋을 잃었다.

분명 화를 내야 하는데 그래야 맞는데, 어떤 변명이든 기꺼이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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