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발작 (2)
사무실이 밀집한 중심가의 한 호텔 카페에서 주인은 지승을 다시 만났다. 주인을 발견한 지승이 서둘러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미안해요, 도경 씨. 여기로 오라고 해서. 근처에서 미팅이 있었거든요.”
자리에 앉자마자 냉수부터 벌컥벌컥 들이켜는 그의 얼굴은 약간 까칠하고 푸석해 보였다. 그런 상대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녀가 대꾸했다.
“아니에요. 제가 먼저 뵙자고 했는데 당연히 와야죠.”
상대의 노골적인 시선을 느낀 지승이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멋쩍게 스윽 쓸었다.
“하하, 제 꼴이 엉망이죠? 요즘 좀 경황이 없어서....”
“괜찮아요, 바쁘면 좋은 거죠. 사업하는 사람한테는.”
주인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정하게 위로했다.
“그러게요. 차라리 바쁜 게 훨씬 낫더라고요. 쓸데없는 잡념도 잊고 말이죠....”
자조 섞인 미소가 수척한 얼굴에 짧게 스쳤다. 어쩔 수 없는 연민을 느끼게 하는 표정이었다.
“참, 도경 씬 잘 지냈어요? 전보다 더 좋아 보이는데, 역시 퇴사가 약인 건가? 하하.”
지승이 의도와는 달리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 농을 던졌으나, 그 순간 직원이 주문한 음료를 가지고 오는 바람에 묻히고 말았다.
그렇게 주인과 지승은 한동안 어색한 표정으로 애꿎은 잔만 만지작거렸다.
잠시 뒤, 그가 먼저 슬며시 입술을 뗐다.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도경 씨가 이렇게 빨리 연락을 줄 거라곤 생각 못 했거든요.”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하셨잖아요, 대표님이.”
주인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여지를 잘 활용했다. 물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지승 또한 당연히도, 오랜만에 마주한 그녀가 몹시 반가웠다. 눈앞의 선명한 미소는 사람을 홀릴 만큼 여전히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상도 잠시, 그녀가 던진 질문 하나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혹시, 금장회계법인이라고 아세요?”
초점 잃은 연갈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또렷해졌다.
“네, 압니다. 근데 무슨 일로 묻는 거죠? 그 ‘개인적인’ 일, 때문입니까?”
“네.”
주인이 순순히 목적을 밝혔다. 지승이 체념한 듯 나직하게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께선 늘 말씀하셨죠. 비밀이 많은 여자랑 사연이 많은 여자는 멀리하라고.”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받아치자,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요. 근데 인간이란 게 참 이상하죠. 그런 면에 끌리거든요. 도경 씨에게 비밀이 많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묻지 않았던 건, 대답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건 지금도 변함없겠죠?”
“죄송해요.”
주인이 곤란한 기색을 띠었다. 지승이 다시 물었다.
“뭐가 알고 싶습니까?”
“금장에서 비밀리에 하는 그 ‘사업’이요.”
주인이 싱긋 웃으며 불순한 속내를 드러냈다. 지승이 산뜻한 미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저돌성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도경 씨는 재무 관련 부서가 아니어서 잘 몰랐겠지만, 금장은 이 바닥에서 소문이 퍼진 지 오래예요. 소위 신사업이 대박을 친 거죠. 얼마 전 해외에 고급 별장을 구입해 구설에 오른 엔터 기업 대표 알죠? 그 일도 거기서 추진한 거예요. 아마 국내 기업 중 금장과 미팅 한번 안 해 본 곳이 손에 꼽을 겁니다.”
줄줄이 읊듯 설명을 마친 지승이 타는 목을 달래려 음료를 싹 비웠다. 주인이 상체를 맞은편으로 바짝 들이밀며 은밀한 눈빛을 보냈다.
“혹시 그쪽에 아는 사람 있으세요?”
음모에 동조하는 것처럼 그도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네, 과장급 중에 지인이 있어요.”
“그럼, 그분을 연결해 주실 수 있나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뭐, 소개하는 거야 어렵진 않습니다만....”
그때,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둘 사이의 거리가 꽤 언짢았는지 누군가가 탁자 가운데를 신경질적인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주인과 지승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불쑥 등장한, 마디가 굵은 손가락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독경이었다.
삐딱하게 서서는 두 사람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그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오랜만입니다, 최 대표님.”
“네, 그러네요. 김주환 실장님.”
지승이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떨떠름하게 인사를 받았다.
“도경 씨도 오랜만이군요. 퇴사했다는 소식 들었습니다만....”
이윽고, 독경이 악동처럼 얄궂은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주인이 원망 가득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하필, 중요한 순간에 느닷없이 나타나 흐름을 끊은 그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날 선 그녀의 시선 따위는 본체만체하며,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볼일을 마치고 나가려는데, 마침 두 분이 얘기를 나누시는 게 보이더군요. 인사나 할까 하고 다가오다, 본의 아니게 대화를 엿들어 버렸네요?”
그러고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주인 옆에 털썩 앉으며, 뻔뻔한 제안을 했다.
“저도 금장에 관심 있거든요. 끼워 주시겠습니까?”
지승이 어이없다는 양 코웃음을 쳤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화제의 주인공이신데, 쉽게 움직여서야 되겠습니까? 물 들어올 때 노 젓고 싶은 욕심이 드는 건 알겠으나, 이럴 때일수록 자중하셔야죠.”
지승은 일만의 실장이라 자신을 소개한 독경이 실은, 미래투자 대표와 동일인임을 알아챘다. 동명인 데다, 비슷한 시기에 대외 활동을 시작한 것이 딱 맞아떨어졌던 탓이다.
그러나 진짜 정체가 무엇이든, 금장 같은 곳에 관심을 보이는 그가 썩 훌륭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말도 안 되는 허풍으로 몸값을 불린 뒤, 이득을 챙기는 전형적인 사기꾼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상대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평가하든 관심 없었다. 그저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하하, 눈치가 빠르시네요. 맞습니다. 미래투자 건으로 제가 요즘 좀 유명세를 치르고 있죠. 근데, 어쩌나? 자중은 딱히 저랑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어서요. 그냥 한 사람 더 끼운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별로 힘든 부탁은 아니잖아요? 아, 물론 도경 씨가 허락하신다면요.”
그렇게 무례하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발언을 쏟아 낸 그는, 곧바로 몹시도 상냥한 눈길을 옆에 보냈다.
주인은 예측할 수 없이 흘러가는 상황에 약간 질렸지만, 이내 침착하게 의견을 내며 수습에 나섰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최 대표님께서 고객사인 미래투자의 요청으로 금장을 연결해 주는 거예요. 저도 함께 미래투자 소속인 걸로 하고요. 최근에 유명세를 탄 회사니 그쪽에서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추후 문제가 생겼을 때, 최 대표님은 미래투자 쪽에 책임을 전가하며 발을 빼시고요.”
“좋네요. 깔끔하고 명확해요!”
독경이 무릎까지 탁 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지승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음, 이해가 맞았다고 해 두죠.”
주인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지승은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서 새빨간 불꽃이 튀어 오르는 주인과 독경을 예의 주시했다.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그때, 주인이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화장실 좀....”
그녀는 살벌한 기세를 내뿜으며 상대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두 남자만 두는 것이 못내 찜찜했지만, 놀란 탓에 속이 울렁거렸다.
최대한 빨리 돌아와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발길을 서둘렀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지승이 어금니를 으득 씹었다.
“도경 씨에게 관심 있습니까?”
느닷없는 공격에 태평하게 다리를 꼬고 있던 독경이 가소롭다는 양 미소 지었다.
“왜? 그럼 안 됩니까?”
탁자 아래 꽉 쥔 지승의 주먹이 바들거렸다. 폭력을 싫어하는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이죽거리는 저 교만한 면상을 갈겨 버리고 싶었다.
“좋은 사람입니다. 당신처럼 속이 시커먼 자에게는 과분할 만큼.”
지승의 목소리가 분을 참지 못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독경은 상대의 독설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맞습니다. 제게는 과분한 사람이죠.”
보통 사람이라면 ‘속이 시커먼 자’라는 표현에 발끈했겠지만, 독경의 방점은 ‘과분하다’에 찍혔다.
그랬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자신처럼 음흉하고 비열한 놈에게 그녀는 주제넘을 만큼 고결하고 존귀한 존재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그녀가 자신을 택했는데. 그저 기꺼이 따르는 수밖에.
“우리 내기할까요? 현도경 씨가 둘 중 누굴 선택할지. 진 사람이 그녀에게서 손 떼는 겁니다.”
이미 승자가 결정된 싸움이었건만, 독경은 간교하게도 상대에게 함정을 팠다.
“도경 씬 물건이 아닙니다!”
분노에 찬, 지승이 일갈했다. 그러자 독경의 눈 아래가 파르르 떨렸다. 상대의 황망한 얼굴을 보며, 그는 자신이 크게 한 방 먹였다는 사실에 통쾌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수 초가 걸리지 않았다. 남자의 가로로 긴 눈이 제 어깨 너머를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승이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호텔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의 남성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우르르 들어오고 있었다. 무리 사이로 신문 사회면에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얼굴도 보였다.
“어? 저 사람 태성그룹 현상현 부회장 아닌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독경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채 그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황당한 표정을 한 지승만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남았다.
독경은 입구 반대편에 있는 화장실로 걸음을 옮기며, 주인에게 다급히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상현과 마주치기 전에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선배, 어디 있어요? 왜, 전화는 안 받아요?”
그가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초조하게 혼잣말을 했다.
그러나 그런 간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화기 너머에서는 여전히 신호음만 무심하게 들릴 뿐이었다.
숨 가쁜 독경의 구둣발 소리만 텅 빈 복도를 불길하게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