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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42화 (42/76)
  • #42화. 발작 (1)

    독경과 주인은 본격적으로 요리에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시원한 멸치 육수를 우리고, 그사이 반죽을 꺼내 면을 만들었다.

    이제, 국물이 보글보글 끓으면 준비한 모든 재료를 집어넣어 익히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때, 식탁 위에 올려 둔 독경의 휴대 전화가 가볍게 윙윙 울렸다. 그가 화면을 확인해 보니, 전화를 건 사람은 이신이었다.

    “선배! 나 전화 좀 받고 올 테니까, 국물 끓으면 재료 다 넣어요!”

    “응, 알겠어.”

    그 말에 주인이 약간 불안한 것처럼 움츠러들었으나, 이내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런 그녀를 믿음직스럽게 바라본 뒤, 전화를 받으러 서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네, 이 비서님. 무슨 일입니까? 말씀하십시오.”

    통화는 예상보다 조금 길어졌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독경은 보폭을 크게 벌리며, 부엌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그 순간, 주인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식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릇을 내려놓았다.

    “뭐예요? 혼자 완성한 거예요?”

    그가 가로로 긴 눈을 크게 떴다.

    “응? 으응!”

    그녀가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으며 주억거렸다.

    독경이 잽싸게 식탁 앞으로 가더니, 그릇 안을 들여다보았다.

    맑게 우러난 국물 안에 탱탱한 면발이 반쯤 잠겨 있었고, 그 위를 채 썬 채소들이 색색으로 보기 좋게 장식했다.

    곳곳에 놓인 바지락들 또한 먹음직스럽게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이, 꼭 요리책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그럴싸했다.

    “뭐야? 이렇게 잘하면서, 지금껏 못하는 척했어요?”

    독경이 활짝 웃으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주인이 쪼르르 달려가 맞은편에 따라 앉았다.

    “음, 일단 모양은 합격! 대체 어떻게 했어요?”

    “인터넷으로 검색한 다음에 따라 해 봤어.”

    주인이 약간이나마 긴장이 풀린 기색으로 답했다. 그러고는 상체를 앞으로 쭉 내밀며 시식을 종용했다.

    “궁금하니까, 빨리 먹어 봐.”

    “그럴까요?”

    독경이 슬며시 숟가락을 들며 냄새를 맡아 보았다.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익숙한 칼국수 향이었다.

    “냄새도 그럴듯하네요. 자, 이제 국물부터 먹어 볼게요.”

    그녀가 대답 대신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렸다. 그가 픽 웃으며 국물을 한 숟갈 떠 입안에 넣었다.

    잠시 맛을 음미하던 독경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감격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구, 국물에서... 바다, 바다 맛이 나요....”

    그랬다. 그 말 그대로 국물은 인천 앞바다에서 갓 퍼 올린 것만큼이나 짜고 비렸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요리법대로 착실하게 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발생하다니. 그것도 자신이 자리를 비운 몇 분 사이에 말이다.

    이것은 연금술의 영역이 틀림없었다.

    ‘그래, 국물이 좀 짤 수도 있지....’

    그래도 독경은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은 채,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었다. 주인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그녀의 시선이 몹시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독경이 조심스레 입안으로 면을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앞니로 면을 툭 끊는 순간, 텁텁한 밀가루 맛이 사정없이 입천장을 후려쳤다.

    “면이 너무 퍼지면 맛이 없을 것 같아서, 살짝 데치기만 했어.”

    주인이 자신감 없는 투로 중얼거리듯 설명했다.

    그가 꾸덕꾸덕한 면발을 우물우물 씹으며 화답했다.

    “그, 그래요.... 잘했어요....”

    그때, 단정하던 그녀의 미간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맛없구나?”

    한 입 한 입 씹을 때마다 상대의 낯짝이 점점 일그러져 가는 것을 보며, 주인이 눈치를 챘다.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는 싸늘한 한마디에, 독경의 심장이 선뜩하게 얼어붙었다.

    “아, 아니에요! 진짜, 맛있어요! 진짜!!”

    황급히 내뱉는 말들을 한 귀로 흘리며, 주인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 그래서 내가 안 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어느새 도톰한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창피하면서도 분이 치밀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그도 따라 일어서며 외쳤다.

    “대체, 누가 맛없다고 그랬어요!! 맛있다니까요!! 자, 봐요!!”

    독경이 그릇을 통째로 번쩍 들더니, 안의 내용물을 제 입으로 와르르 쏟아부었다. 난데없는 먹방에 주인이 눈물 콧물도 멈추고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금세 내용물을 싹 비운 그가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빈 그릇을 보란 듯 눈앞에서 흔들었다.

    “자, 봐요. 다 먹었죠? 맛없으면 이렇게 못 먹어요!”

    그녀가 그와 빈 그릇을 동그란 두 눈으로 번갈아 보았다. 의심과 경탄이 공존하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독경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과 복통에 시달리며 잠을 설쳤다.

    워낙 건강한 체질이라 감기 한번 걸린 적 없었기에, 이렇게 앓아누운 것은 사고 때를 빼면 태어나 처음이었다.

    하지만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그는 낮에 부린 객기를 후회하지 않았다. 주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간호해 주었던 것이다.

    밤을 꼬박 지새우며 차갑게 젖은 수건으로 자신의 온몸을 연신 닦아 주는 그녀를 보며,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위안을 준다는 사실을 그는 몸소 체험했다.

    ***

    며칠 뒤, 펜트하우스의 서재로 주인과 독경, 그리고 이신이 모였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이틀이나 병가를 낸 뒤, 오랜만에 만나는 상사를 보며 이신은 안부부터 챙겼다. 그가 병가를 내는 것을 처음 본지라 조금 놀랐던 것이다.

    “아, 네. 이제 괜찮습니다.”

    독경이 픽 웃으며 답했다. 사실 병은 오전이 지나자 말끔하게 나았으나, 핑곗거리가 생긴 참에 하루를 더 쉬며 주인 옆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평소라면 그의 행동에 그녀가 잔소리를 퍼부었겠지만, 지은 죄를 아는 탓인지 주인은 순순히 하자는 대로 군소리 없이 따랐다.

    그 덕분에 독경은 온종일 침대에서 뒹굴며 그녀를 이리저리 짓궂게 괴롭혔다. 아픈 기억이 싹 날아갈 만큼, 무척이나 보람찬 휴무였다.

    이신이 자리에 앉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태성 쪽에서 미래투자 사무실에 사람을 붙인 모양입니다. 어차피 서류상으로만 등록된 곳이어서 들킬 염려는 없지만, 혹시 모르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독경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창가에 기대서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차분하게 물었다.

    “오늘 회의를 소집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아, 이걸 좀 봐 주십시오.”

    이신이 코끝에 걸렸던 안경을 손가락으로 쓱 올리더니, 사진과 서류를 앞으로 내밀었다. 주인이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으며, 그 자료를 정중하게 손에 들었다.

    독경이 그녀가 앉은 소파 옆으로 슬쩍 다가오더니, 팔걸이에 오만하게 툭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자료를 함께 들여다보며 설명을 기다렸다.

    “사진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박중우 자금운용 팀장입니다.”

    “네, 그렇군요.”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낯익은 사진 속 얼굴을 슥 훑었다.

    “왼쪽은요?”

    독경이 낯선 중년 남성을 빤히 보며, 여상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왼쪽은 이민의라고 금장회계법인 상무보입니다. 최근 두 사람이 청담 인근 술집에서 여러 차례 만남을 갖는 게 목격됐습니다.”

    “사진은 어떻게 구하신 건가요?”

    주인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그러자 이신이 상사 쪽을 흘깃 보았다. 말을 해도 될지 허락을 구하는 몸짓이었다. 독경이 대신 입을 열어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이건 지난번에 말한 저희 쪽 스파이가 찍은 거예요.”

    “아, 그렇구나. 그럼 금장은 뭘 하는 곳이죠?”

    주인의 질문에 이신이 자료 중 하나를 손으로 콕 가리켰다.

    “여기에도 나와 있지만 저희가 알아본 바로는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세무 및 회계 컨설팅 전문 업체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말이죠.”

    비서의 의미심장한 마지막 표현에 독경이 먹잇감을 발견한 포식자처럼 두 눈을 서늘하게 빛냈다.

    “그럼 실제로 하는 일은?”

    “업계에 암암리에 퍼진 소문에 따르면 명목상으로는 재무 설계를 해 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탈세나 조세 회피를 돕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만큼 보안이 까다롭고 철저해서 더 자세히 접근할 순 없었습니다. 신원이 확실하거나 기존 고객의 소개로 온 부유층을 대상으로만 컨설팅을 진행한다고 하더군요.”

    “흠....”

    독경이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쓸며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인이 나직이 의견을 냈다.

    “아무래도 최지승 대표님을 한번 만나야겠네요. 그분이라면 방법을 알지도 몰라요.”

    그 말에 독경이 도끼눈을 뜨고는 그녀를 째려보았다.

    “그 인간을 왜요? 그리고 이젠, 최지승 ‘씨’라고 불러야죠. 그 회사 그만뒀잖아요.”

    가시가 뾰족뾰족 돋친 것 같은 날 선 태도에 주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설득에 나섰다.

    “겉은 유해 보여도, 나름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분이야. 인맥도 넓어서 가진 정보도 많고. 한번 시도해 볼 가치가 있어.”

    주인의 설명에도 독경은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양 무뚝뚝한 표정으로 애꿎은 자료만 뒤적거렸다.

    두 사람 사이의 냉랭한 분위기를 감지한 이신이 이쯤에서 자리를 털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슬그머니 일어섰다.

    “혹시 최 대표님께 쓸 만한 정보를 얻으시면 공유 부탁드립니다. 저도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 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주인이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신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휘적휘적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사라지기 무섭게, 독경이 주인의 정수리에 제 턱을 비비며 투덜투덜 떠들기 시작했다.

    “꼭, 그 자식 만나야 해요? 저랑 이 비서님이 다른 쪽을 뚫어 볼게요.”

    “그 자식 아니고 최 대표님이라고 불러야지. 그리고 난 어쩐지 이쪽이 제일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라 여겨지는데?”

    “쳇!”

    그가 불만스럽게 혀를 차며, 긴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그 안에 섞인 불충한 악의를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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