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유산 (3)
수연은 카페 앞에 장식용으로 내놓은 화분이 하나씩 사라지자, 범인을 찾기 위해 가게 앞에 설치한 방범용 카메라를 돌려 보았다.
화면 속에는 익숙한 밤거리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하루 전, 이틀 전, 사흘 전으로 날짜를 넘기며 살피던 그녀는 이내 낯선 광경을 목도했다.
가게 맞은편 가로등 아래 한 남자가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던 것이다.
수연이 화면을 정지한 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남자는 나른하게 차에 기대서서는, 담배를 피우며 한참이나 불 꺼진 카페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검은 양복에 짙은 선글라스를 낀 그 남자는 흐릿하게 보아도 강석이 틀림없었다.
수연이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영상이 찍힌 날짜를 확인했다. 장면이 녹화된 날은 그가 그녀에게 부탁을 하고 떠난 바로, 그날 밤이었다.
한 손으로 가린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렀다.
그 밤, 강석은 왜 카페를 다시 찾았을까? 주인 없는 카페를 오래도록 바라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머뭇거리다 끝끝내 하지 못한 마지막 말은 또 무엇이었을까?
수연은 긴 시간 동안 가슴에 꼭꼭 묻어 둔 질문들을 언젠가 꼭 던지리라 다짐했지만, 이제 영원히 답을 들을 수는 없게 됐다.
그것이 그녀의 심장 한쪽에 지울 수 없는, 작은 흔적을 남겼다.
***
어느새 땅거미가 조금씩 내려앉은 도로 위를 달리는 차 안은 무거운 정적으로 가득 찼다.
주인과 독경 모두, 각자의 상념에 잠긴 채 입을 굳게 닫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뒤, 그가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무슨 생각 해요?”
“음, 글쎄....”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던 그녀가 쉽사리 입술을 떼지 못했다.
“잘 모르겠어. 그냥, 마음이 좀... 아파.... 넌 김 실장님이 카페에 자주 갔다는 거 알고 있었어?”
“아니요, 몰랐어요. 그런 일상적인 얘기를 할 만큼 친하진 않았거든요.”
“목숨까지 구해 준 사람한테 너무 야박하게 구는 거 아닌가?”
주인의 타박 섞인 반응에 독경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런가요? 하지만 사실인걸요.”
“난, 가끔 궁금해. 왜 김 실장님이 널 살려 줬을까? 현태성을 거스르는 무리를 하면서까지, 왜 널 도와줬을까? 너무나 오랫동안 미워하고 무서워한 사람인데, 널 살려 준 걸 생각하면 고맙기도 하고.... 뭔가 굉장히 복잡한 감정이 들어....”
고뇌에 찬 주인이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그런 상대의 혼란스러운 머리를 독경이 한 손으로 살짝 흐트러뜨렸다.
그는 그녀가 늘, 생각이 너무 많다고 느꼈다. 신중한 것은 좋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때마다 독경은 주인의 사고 회로를 멈추는 제동 역할을 자처했다. 자신은 그녀에게 있어 일종의 안전장치 같은 것이었다.
“너무 깊게 파지 마요. 지금은 목표에만 집중해야죠. 난 오히려 김강석이 왜 선배한테 그 자료를 넘겼는지 궁금해요. 태성의 약점이나 다름없는 걸 왜 굳이 ‘선배’한테 줬을까요?”
“난,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어쩌면 김 실장님은 태성이 망하길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닐까?”
주인이 역모라도 꾀하듯 음험하고 도발적인 음성으로 속삭였다. 독경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꺾었다.
“그런 목표라면 직접 하거나 날 이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선배를요?”
“애증이니까....”
그녀의 한마디가 어스름한 허공에 불온한 파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목숨 바쳐 일한 만큼 미웠으니까. 복수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직접 할 순 없었겠지. 제 손으로 쌓아 올린 걸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테니....”
스산한 어둠 속에서 주인의 안광이 번들거렸다. 그 변화를 독경은 놓치지 않고 주목했다. 그녀가 주문이라도 외는 것처럼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남의 손에 맡기기도 싫었을 거야. 비슷한 이유로 말이지. 그럼, 내부에서 균열을 일으키면 어떨까? 아무리 충성을 바쳐도 결국 이방인인 그는 내부에 간섭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그 집 핏줄이면서도, 추방당한 날 선택한 거야. 왕국 하나를 자멸시키는 데 가문의 추방자만큼 적합한 인물이 또 없으리라 계산했겠지.”
그녀의 입꼬리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하지만 그 안에는 기이한 냉소와 광기가 한데 뒤섞여 있었다.
독경이 그런 그녀를 걱정과 애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난, 선배 말고 다른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는 걸 경멸해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네요.”
“그러게 말이야.”
주인이 선선히 동의했다.
“이제 자료가 신뢰할 만하다는 건 확인했으니, 이 비서님이 유용한 정보를 가져오기를 기다려야겠네.”
“그건 걱정 말아요.”
그가 매끈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
주인은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휴대 전화를 들어 뉴스부터 훑었다. 밤사이 태성과 관련해서 놓친 부분은 없는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액정에서 뿜어지는 빛살에 눈이 부셔 깬 독경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고는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눈 뜨자마자 또 일이에요? 정말 너무하네.”
“아, 미안. 나 때문에 깼어? 그러니까 다른 방 쓰지....”
그녀가 그의 헝클어진 새까만 머리를 다정히 쓸며 말했다.
“그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요. 난 여기 아니면 잠 못 잔다고요.”
“그럼, 내가 딴 방으로....”
“아이참, 것도 안 된다니까요!”
독경이 주인의 말을 대번에 끊어 버렸다.
그녀에게는 가끔 그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로 고집스럽고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
물론 그런 대쪽 같은 성품조차도 독경은 좋았으나, 가끔 불안하기는 했다. 거침없는 성정이 스스로를 망칠까 봐 염려됐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미 목격했다. 카페에서 돌아오는 길, 어둠 속에서 번뜩이던 광기에 찬 눈동자를.
그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증오하는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설령, 자기 스스로를 불씨로 쓰게 될지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독경은 주인이 다른 일에 흥미를 가지면 극단적으로 쏠린 관심을 조금 분산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취미가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그가 제 턱을 매만지며 열심히 궁리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묘책이 불쑥 떠올랐다.
“선배, 나한테 요리 한번 배워 볼래요?”
독경이 모닝커피를 내리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주인이 하던 일을 멈추고는 그를 빤히 보았다.
“이독경, 요즘 삶이 무료해?”
“아니요.”
억양 없는 질문에 그가 짧게 답했다.
“근데, 왜 인생의 난이도를 높이는 거지? 아님, 나한테 암살이라도 당하고 싶은 건가?”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경이 성큼 다가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 참, 취미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잖아요. 혹시 알아요? 이제야 재능을 꽃피울지? 커피 내리는 것처럼 요리도 쉬울 수 있어요. 오늘 배워서 선배들 초대할 때 써먹을 수도 있고.”
그가 나긋한 어조로 설득하자, 주인이 조금 혹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런가?”
기회를 포착한 독경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사실 나, 선배가 해 주는 밥 먹어 보고 싶어요.”
간절한 눈망울로 자신을 보며 애처롭게 웃는 그를 보며, 주인이 어색하게 제 뒷덜미를 주물렀다.
이곳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식사를 직접 차린 적 없어, 내심 신경이 쓰인 참이었다.
“음, 그럼 뭐가 제일 먹고 싶은데?”
그녀가 쑥스러운 기색을 띠며 물었다.
“선배가 만들기만 하면 아무거나 다 좋아요.”
“그, 그렇게 말하면... 좀 부담스럽단 말이야.... 왠지, 막... 엄청난 걸 해야 할 것 같고....”
그 말에 그가 재빨리 새로운 대책을 내놓았다.
“그럼 우리, 쉬운 것부터 해요. 쉽고 간단한 거! 그리고 우리 둘 다, 좋아할 만한 거.”
“음....”
주인이 큰 눈알을 또르르 굴리며 고민에 잠겼다. 독경은 깜찍하게 구는 그녀를 보며 요리 따위는 때려치우고 침대로 직행하고 싶었으나, 꾸욱 참았다.
“음, 칼국수 어때요? 선배랑 나 둘 다 좋아하는 음식이고 많이 먹어 봤으니, 대충 흉내 내 볼 순 있을 것 같은데.”
그의 말이 제법 일리 있다고 여겨졌는지, 주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한번 해 보자!”
독경이 빙그레 웃으며 개수대 아래 수납장 한쪽을 열어 밀가루와 둥근 볼을 꺼냈다.
“일단 반죽부터 만들어 볼까요?”
그가 넓은 볼에 밀가루를 넣고는 물을 조금씩 부었다.
“자, 찰흙 놀이 하는 것처럼 물이랑 밀가루를 섞어 봐요.”
“이, 이렇게??”
어느새 머리까지 질끈 묶은 주인이 지시를 성실히 따랐다. 독경도 팔을 걷어붙이고는 합류했다.
“반죽을 잘 치대야 쫄깃한 면이 나오니까, 더 팍팍 해도 돼요.”
금세 두 사람의 손이 한데 엉켰다. 그가 반죽 속에서 장난스럽게 그녀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아, 하지 마.”
주인이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슬쩍 뺐다. 독경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는 작은 귀에 뜨거운 바람을 훅 불어 넣었다.
그녀의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었다.
“선배, 우리 오늘은 여기까지만 수업하고 침실로 갈래요?”
독경이 은근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주인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싫어!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요리 배운다, 내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녀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고지식했다.
잠시 뒤, 타원형으로 둥글게 뭉친 반죽 덩어리가 완성됐다.
“자, 이건 냉장고에 잠깐 넣어 두고, 이번엔 국물을 내 볼까요? 일단, 바지락을 먼저 해감하죠.”
독경이 방송에 등장하는 요리 선생님처럼 차분하게 진행했다.
“응? 으응!!”
주인이 다시 눈을 빛내며 재빨리 움직였다.
두 사람은 개수대 앞에 나란히 서서는 바지락을 박박 닦았다. 그러고는 소금물에 푹 담근 뒤, 뚜껑을 덮었다.
“원래는 더 오랫동안 둬야 하는데,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짧게 해야겠네요.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채소를 손질합시다.”
“응응.”
주인이 진동이 울리는 것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이건 칼을 쓰는 거니까, 내가 할게요. 선배는 옆에서 잘 봐요.”
주인이 꺼내 온 재료들을, 독경이 능숙하게 다듬더니 순식간에 가지런히 채를 썰었다.
“이독경, 너 대단하다.”
그녀가 새삼 존경스러운 눈길로 우러러보았다. 칭찬에 우쭐해진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나 참. 열심히 배우면 선배도 나만큼 할 수 있어요.”
윤희가 봤다면 꼴사납다고 놀렸을 것이 확실한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