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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40화 (40/76)
  • #40화. 유산 (2)

    더 이상 주인의 뒤를 캐지 않아도 됐지만, 강석은 여전히 카페를 찾았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음료만 마시는 그를 수연은 특이한 사람이라 여겼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사고가 벌어졌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들어오는 윤희와 뒤에서 빨갛게 부은 눈으로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원우를 보며,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치 어떤 예감이 실현되기라도 한 것처럼....

    어쩌면 수연은 검은 양복에 진한 선글라스를 고집하는 그 남자를, 죽음을 몰고 다니는 사신쯤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강석은 사고 후에도 전과 다름없는 태도를 보였다.

    주인이 좋아하던 에스프레소를 시위라도 하듯 내민 후, 영영 발길을 끊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갈 뿐이었다.

    한 달에 두세 번, 많으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그는 이곳을 찾았다. 어느새 강석은 수연에게 익숙한 풍경 중 하나로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그렇다고 그 시간 동안,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거나 친밀하게 지냈던 것은 딱히 아니었다.

    수연은 늘 지쳐 보이는 그가 이 공간 안에서만큼은 편히 쉬기를 바랐고, 강석 또한 그녀의 배려를 몹시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아주 가끔, 막 구운 쿠키나 빵을 건넬 때 나눈 몇 마디가 대화의 전부였다.

    “뭡니까?”

    쟁반 위에 자신이 주문한 커피와 함께 나온 쿠키를 무심한 눈길로 훑으며, 강석이 탁하게 갈라지는 음성으로 물었다.

    “쿠키예요. 방금 만든 거라 맛있을 거예요.”

    수연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아, 제가 단 음식을 별로 안 좋아해서.”

    “견과류가 많이 들어서 그렇게 달진 않을 거예요. 한번 드셔 보세요.”

    상대의 사양에 수연이 딱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만 친절한 미소로 응대했다.

    그녀가 신경 써서 챙겨 준 것을 거절하기도 애매했는지, 그는 별말 없이 자신의 지정석에 가서 쿠키를 한입 깨물었다.

    잠시 뒤, 강석이 계산대로 뚜벅뚜벅 걸어와 말했다.

    “쿠키 맛있네요. 남은 거 있으면 다 포장해 주십시오.”

    “네? 다요?”

    당황한 수연이 되묻자, 그가 귀찮다는 양 고개만 까닥이고는 카드를 꺼냈다. 그것이 그때까지 그들이 나눈 두 번째로 긴 대화였다.

    ***

    시간은 더디지만 착실하게 흘러갔다.

    수연의 뇌리에서 주인과 독경의 모습은 기억 저편으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지만, 강석은 여전히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빈도가 점점 줄어 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일찌감치 알아챘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얼굴에 짙은 피로와 고민이 켜켜이 쌓여 가고 있다는 사실도....

    창가 자리에 앉아 묵묵히 밖을 응시하는 강석의 각진 옆얼굴을 보며, 수연은 어떤 ‘최후’를 예감했다.

    언제나 절망과 불화를 몰고 다니는 검은 옷의 남자는 이제 자신의 끝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석이 처음으로 수연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수연 씨, 실례지만 잠시 시간 좀 내 주시겠습니까?”

    너무 뜻밖에 벌어진 상황이라 수연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유리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재빨리 잔을 내려놓았다.

    “네, 그러세요.”

    그러자 그가 약도가 그려진 작은 명함 한 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괜찮으시다면, 내일 이 시각에 여기로 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그녀가 두 눈을 크게 뜨며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서울에서 멀지 않은 해변가에 위치한 레스토랑의 명함이었다.

    “내일 한 시간 전에 여기로 택시를 보내겠습니다. 그걸 타고 오시면 됩니다.”

    “아, 네....”

    강석의 말에 수연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바닷가가 훤히 보이는 통창 옆자리에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았다. 첫 만남 이후 두 번째였다.

    “바다 좋아하십니까?”

    강석이 물었다.

    “네, 좋아해요. 동해 쪽에서 나고 자랐거든요.”

    수연이 순순히 답했다.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중얼거리듯 읊었다.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카페에 걸린 그림들이 대부분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더군요.”

    그것은 그녀 본인도, 미처 깨닫지 못한 취향이었다. 자신은 그저 그때그때 마음이 가는 그림을 수집했을 뿐이었기에.

    “아, 그건 저도 몰랐어요.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순수한 감탄이 섞인 대답에, 강석은 처음으로 그녀 앞에서 픽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내 곧, 원래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식사를 하는 동안, 강석은 별말 없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딘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침묵이었다. 그런 상대를 유심히 관찰하며 수연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앞에 두고 드디어 그가 입술을 뗐다.

    “송구하지만 제가 부탁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한참 뒤에 나온 목소리는 차분하고 정중했으나, 어딘지 초조하고 불안하게 다가왔다.

    저렇게 강인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두려운 감정이 있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져, 그녀는 저도 모르게 덩달아 긴장하고 말았다.

    그러나 얼굴에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강석은 수연 앞에 두툼한 서류 봉투를 꺼내 놓았다.

    “제가 일주일 내로 카페에 오지 않으면, 이 서류를 위에 쓰여 있는 주소로 보내 주십시오.”

    “어디 출장이라도 가시나 보네요.”

    그녀가 서류 봉투를 집어 들며 여상하게 말했다. 이상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봉투 겉면에 쓰여 있는 수신자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봉투에는 서울에서 꽤 떨어진 도시의 주소와 함께, ‘현주인’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히 쓰여 있었다.

    “아, 혹시....”

    “아무것도 묻지 마시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지금 믿을 사람은 수연 씨뿐입니다.”

    어딘가 갈급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수연은 온갖 의문으로 소용돌이치는 머릿속을 진정하려 애썼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질문들을 막기 위해 입을 꾹 닫았다.

    강석이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불편하실 수도 있는데, 선뜻 승낙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부탁하실 건 이것뿐인가요?”

    그녀가 너그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 다부진 입술을 들썩이다 단념하고는, 특유의 거친 음성으로 짤막한 말만 남겼다.

    “네, 그것뿐입니다. 이제 곧, 차가 올 테니 타고 가시죠.”

    강석을 따라 수연이 일어섰다.

    그는 그녀를 택시에 태우고는 결연하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차가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지켜보았다.

    수연은 고개를 돌려 강석의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얼굴을 숙인 채 제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그 후 일 주, 이 주... 그리고 한 달이 지나도 강석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수연은 그와 약속한 대로 서류를 주인에게 전달했다.

    ***

    “아, 그럼 그게 역시....”

    “김강석이 보낸 게 맞았네요....”

    주인과 독경이 동시에 깨달음과 허탈함이 공존하는 탄식을 내뱉으며, 눈앞의 고아한 여인에게 집중했다.

    수연이 두 사람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인자하지만 어딘가 서글픈 미소를 띠었다.

    “그래, 맞아. 그 사람이 보낸 물건은 잘 받았나 보구나....”

    말을 건네는 표정은 뿌듯했지만, 음성은 이상하리만치 가냘팠다. 마치, 헛헛한 진심을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그 이질감을 곧바로 눈치챈 주인의 가슴이 불현듯 먹먹해졌다.

    “근데, 김 실장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수연의 질문에 독경이 심연 깊숙한 곳에서 퍼 올린 것 같은 저음으로 대답했다.

    주인은 그 짧은 답변이 배려 없이 너무 성급하지 않았나 걱정했으나, 당사자는 의외로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녀는 이미 막연하게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부러 그에 대해 수소문하지 않았을지도. 명백한 진실보다 불투명한 기대감이 더 필요했기에.

    “그래, 그랬구나.... 역시....”

    수연이 고개를 작게 끄덕거리며, 아주 느리게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잠시간 조용히 상념에 젖은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고독해 보였다.

    “사장님 덕분에 저희가 김 실장님이 남기신 걸 무사히 받을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주인이 연민과 애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수연이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미소 지었다.

    “아니야,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희한테 꼭 필요한 거겠지? 유용하게 잘 사용했으면 좋겠다. 김 실장님도 그러길 바라실 거야.”

    “네, 꼭 그럴 겁니다.”

    독경이 몹시도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수연이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하려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지나 버렸네. 내가 너무 길게 떠들어서, 귀한 시간을 다 빼앗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에요. 저희야말로 바쁘신 분께 민폐를 끼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주인이 부랴부랴 손을 내저으며 일어섰다. 수연이 따라 일어서며 빙그레 웃었다.

    “그럴 리가.... 또 놀러 와. 두 사람은 언제든 환영이니까.”

    주인과 독경은 극구 사양했지만, 수연은 주차장까지 따라 나와 옛 인연들을 배웅했다. 두 사람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차에 올랐다.

    수연은 그들이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명랑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혼자 남겨진 그녀의 얼굴에 애써 숨겼던 비애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시렸다. 분명히 머리 위로 찬란한 봄볕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데도, 마음은 한겨울 눈밭 위를 걷는 것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그 싸늘함을 이기지 못한 어깨가 저절로 바르르 떨렸다.

    수연이 제 어깨를 둥글게 말아 감싸며, 두 사람에게는 차마 밝힐 수 없었던 장면 하나를 속절없이 떠올렸다.

    그것은 강석에게 부탁을 받고 난 얼마 뒤에, 알게 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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