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39화 (39/76)
  • #39화. 유산 (1)

    윤희가 쓴 기사와 그를 둘러싼 갖가지 소문과 추측으로 당연히 태성그룹은, 발칵 뒤집혔다.

    상현이 흉흉한 기세로 출근하더니, 아침부터 홍보팀장을 호출해 갈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가 손에 말아 쥐었던 경제지를 신경질적으로 내던지며 욕지거리를 한바탕 퍼부었다.

    “X발, X같은 새끼들이 터진 입이라고 나불대고 지X이야. 오너 리스크 좋아하네. 내 회사,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뭐가 불만이야.”

    부동자세로 있던 홍보팀장이 대답 대신 침만 꿀꺽 삼켰다. 상현이 그를 지그시 노려보다 목청을 높였다.

    “야, 강 팀장! 이 기사 쓴 기자 누군지 알아내. 그리고 미래투잔지 뭔지 하는 회사랑 대표 새끼 신상은 왜 아직도 몰라?”

    “아, 그게 파악 중이긴 한데 워낙 오리무중이라 가진 정보만으로는 부족....”

    “그걸 말이라고 하냐? 옷 벗고 싶어?”

    아침부터 험악한 어조로 협박하는 상사 앞에서, 강 팀장은 머릿속에 그린 손바닥 위로 참을 인을 몇 번이나 새겼다.

    음주 운전부터 시작해 온갖 기행이 기사로 나갈 뻔한 것을 막으려 동분서주해 온 그였다. 기자들 입막음용으로 나간 접대비만 모아도 빌딩 한 채는 너끈히 샀을 것이다.

    그나마 김강석 비서실장이 있을 때는 좀 수월했으나, 그가 사고사한 이후 상현의 폭주는 날이 갈수록 대담해졌다.

    넌덜머리가 났다. 자신보다 어린놈이 회장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말을 찍찍 할 때마다, 그는 모멸감을 느꼈다.

    그러나 가족을 위해서 참아야 했다. 주택 담보 대출을 갚으려면 아직 멀었다. 딸아이 학자금도 필요했다.

    “네, 알아보겠습니다.”

    홍보팀장이 울분을 쓰게 삼키며 고개를 조아렸다.

    “아, 그리고 박중우 팀장 좀 불러와.”

    상현이 다시 자신을 종처럼 부렸다. 강 팀장은 만성 위염으로 타는 속을 슬쩍 부여잡으며, 알겠다는 시늉을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잠시 뒤, 중우가 상현의 방으로 들어왔다. 상현이 고개를 들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들어오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어?”

    “네, 조만간 금장회계 쪽이랑 만나기로 했습니다. 근데....”

    “근데?”

    상현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꼬리를 잡았다.

    “아버지께서 아시면 어쩔까 걱정이.... 지난번 일도 좀 무리하게 추진한 감이 있고. 아무래도 꼬리가 길면 밟히지 않을까 싶은 게....”

    쾅!!

    그때, 상현이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불같이 화를 냈다.

    “누가 네 아버지야? 현 회장님이라고 호칭 똑바로 안 써?”

    “아! 죄,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중우가 식은땀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손으로 추켜올리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현이 불만스럽게 혀를 쯧 차며 말했다.

    “걱정 말고 계속 진행해. 어차피 김 실장도 없는 마당에, 눈치챌 사람은 없으니까.”

    ***

    그 무렵, 주인은 윤희와 통화 중이었다.

    [기사 봤어?]

    “응, 봤어. 데스크에서 통과 못 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청탁 기사도 대놓고 싣는 게 이 바닥인데, 뭐. 괜찮은 정보 있으면 공유하기로 하고 대충 마무리 지었어.]

    윤희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응, 고마워. 아마 태성 쪽에서 조만간 너한테 접근할 거야, 괜찮겠어?”

    주인이 제 입술을 매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휴, 내 걱정은 붙들어 매라니까. 것보다 주식 커뮤에서 미래투자 김주환과 일만 김주환이 동일인 아니냐는 얘기가 돌더라. 워낙 알려진 게 없어서 지금은 추정에만 그치고 있지만, 조만간 정체가 탄로 날지도 몰라.]

    “응, 우리도 더 조심하려고.”

    상대의 조언에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각오한 일이었다.

    [아, 맞다! 원우가 너 보고 싶대!]

    그때, 윤희가 유쾌한 어조로 외쳤다. 주인이 빙그레 웃었다.

    “나도 원우 보고 싶어. 이독경이 조만간 자리 한번 마련하겠대.”

    [정말? 신난다. 아, 그리고....]

    무릎을 탁 치는 생생한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어제 원우랑 이런저런 얘기 하다 떠오른 게 있는데.... 너 학교 앞에서 일했던 카페 기억나? 원우가 대학원 가면서 나도 가끔 학교 놀러 갔거든. 그때마다 시간 나면 거기서 사장님이랑 수다 떨고 그랬어. 근데 어느 날인가, 사장님이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하시는 거야. 어쩌면 네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나.... 그때는 이미 시간이 꽤 지난 뒤여서 그냥 흘려들었는데, 이제 보니 이상한 거 있지?]

    주인이 크고 까만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기묘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솜털이 쭈뼛 섰다.

    “그게 언제였어?”

    [음, 이 년인가 삼 년쯤 전인 것 같아.]

    어딘가 다급하게 재촉하는 것 같은 질문에, 윤희가 긴가민가 고민하며 자신감 없이 대답했다.

    “그렇구나. 알려 줘서 고마워. 몸조심하고 조만간 보자.”

    주인이 인사를 건네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또다시 휴대 전화를 들었다.

    [윤희 선배랑 통화 잘 했어요?]

    중저음의 느릿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거렸다.

    “응, 시간 있으면 나랑 어디 좀 갈래?”

    그 말에 독경이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 물었다.

    [지금 그거 데이트 신청인 거죠?]

    이동 중인 차 안에서 주인은 제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독경에게 전했다.

    “흠,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요.”

    “너도 그렇지? 사장님이랑 우리는 전혀 접점이 없는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셨을까?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걸까?”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번갈아 가며 기우뚱거렸다. 그가 픽 하고 작게 웃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가고 있잖아요. 궁금증은 가서 해결하면 되죠. 그나저나, 난 선배가 데이트 신청하는 줄 알고 설렜는데.... 이렇게 부려 먹으려고 호출할 줄이야.”

    “그래서, 싫어?”

    짐짓 부리는 투정에 주인이 가볍게 눈을 흘겼다.

    “그럴 리가요.”

    독경이 너스레를 떨었다.

    때마침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추자, 그가 그녀의 손등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은근한 손길로 그녀의 뒷덜미를 슥 쓸었다.

    “데이트는 일 끝나고 하면 되죠. 열심히 할 테니까 상 줘야 해요.”

    독경이 야릇하게 끈적거리는 눈길을 보내자, 주인은 그만 저항 없이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거 알아? 너, 점점 더 능글맞아지고 있어.”

    ***

    예전보다 조금 낡기는 했지만, 카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영업 중이었다.

    그 앞에 선 주인과 독경은 애틋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갓 스무 살이 넘은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평화롭고 행복했던 순간 안에는 분명, 이 풍경도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이 천천히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섰다. 그러자, 익숙한 커피 향이 훅 하고 그들을 덮쳤다.

    그러자 또 한 번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한때의 환영이 신비롭게 눈앞에 펼쳐졌다.

    기계 앞에서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채 커피를 내리는 그녀의 뒷모습과 손님이 떠난 탁자를 정리하는 그의 옆모습이, 벚꽃처럼 아련하게 흩날렸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평범한 한때마저 너무 갑작스럽게, 지나치게 가혹하게 빼앗겼고 오늘에 이르렀다.

    “주문하시겠어요?”

    그때, 그들의 몽상을 앳된 얼굴의 점원이 깨뜨렸다. 독경이 음료를 주문한 뒤, 물었다.

    “사장님께선 아직 안 오셨습니까?”

    자신보다 훨씬 어른스러우면서도 묘하게 도발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남녀를 곁눈질하던 점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장님은 금방 오실 거예요. 근데, 무슨 일이세요?”

    “저희도 예전에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했었거든요. 사장님 뵙고 싶어서 잠깐 들렀어요. 오시면 알려 주실래요? 저쪽에 앉아 있을게요.”

    주인이 상냥하게 웃으며, 비어 있는 창가 자리를 가리켰다. 점원이 대답 대신, 우아한 듯 화려한 이목구비를 빤히 보며 약간 빨개진 얼굴을 끄덕였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아 주문한 음료를 반쯤 비웠을 때, 한 여자가 들어오며 말했다.

    “연진 학생, 별일 없었죠?”

    주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차분하고 다정하지만 힘 있는 음성, 수연이었다.

    점원이 쪼르르 달려 나가더니, 창가 석을 가리키며 빠르게 소곤거렸다.

    수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정장을 반듯하게 갖춰 입은 손님들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그녀가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으며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질렀다.

    “어머!!”

    잠시 뒤, 수연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주인과 독경을 몇 번이고 번갈아 보았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잘 지내셨죠? 사장님은 정말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주인이 놀란 상대의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가벼운 말을 던지며 안부를 물었다.

    “무슨 소리야,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런 말 하면 못써....”

    그 말에 그녀가 긴장을 풀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는지 두 사람을 만난 소감을 솔직하게 전했다.

    “주인 학생이랑 독경 학생은 많이 변했네. 길에서 만나도 못 알아보겠어....”

    기억 속 앳되고 순수한 학생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성숙하고 예민함이 넘치는 사회인이 눈앞에서 자신의 말을 기다렸다.

    무언가 아쉬우면서도 뿌듯했다. 마치 공들여 키운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거기다 죽은 줄만 알았던 이들이 살아 돌아왔으니, 감정의 진폭은 더욱 커졌다.

    “윤희 학생한테 사고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조차 없었으니, 원.”

    수연이 한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주인이 조심스럽게 사과의 뜻을 건넸다.

    “많이 놀라셨었죠? 그땐 정말 죄송했어요.”

    “죄송은 무슨. 이렇게 살아 돌아왔으면 됐지....”

    그녀가 그렁그렁한 눈을 부드럽게 접으며 단아한 주인의 손을 꼭 잡았다.

    “저....”

    그때, 독경이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윤희 선배에게 얘기 듣고 찾아왔습니다. 주인 선배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하셨다고요.”

    그의 질문에 수연이 잠시, 속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사자들이니 얘기해도 괜찮겠지? 김강석 실장님이 알려 주셨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뜻밖의 이름에, 이번에는 주인과 독경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한동안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사고가 있기 전에, 김 실장님이 여기 와서는 두 사람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가셨어. 그게 시작이었지.”

    수연이 멀고 먼 옛이야기를 꺼내듯, 애잔하고 아련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눈부신 햇살 틈으로 설핏,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의 뒷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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