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38화 (38/76)
  • #38화. 작전

    독경은 주인과 윤희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져 앉아, 흥미로운 눈으로 두 여자의 해후를 관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냉랭하게 대치 중이었다.

    “윤희야, 잘 지냈어?”

    주인이 다정한 말투로 안부를 재차 물었다. 윤희가 어금니를 꽉 물며 버럭 성질을 부렸다.

    “조용히 해. 짜증 나니까.”

    그 말에 주인이 벌어졌던 입을 멋쩍게 다물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독경이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자신보다 체구가 훨씬 작은 윤희에게 쩔쩔매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톰과 제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금세 웃음기를 거두며 심각해졌다. 자신 또한 주인 앞에서는, 전전긍긍하며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새를 취했던 탓이었다. 신나 할 때가 아니었다.

    “나쁜 년!”

    윤희가 잇새로 거친 말을 터뜨렸다.

    “미안해.”

    주인이 가지런한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못된 년!”

    “잘못했어.”

    “독한 년!”

    짧은 단어로 거침없이 원망을 쏟아 내던 윤희의 눈에서, 어느새 눈물이 퐁퐁 솟기 시작했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이 그 집을 들락거렸는지 알아? 너희 엄마는 네가 죽었다고만 하고, 장례식은커녕 납골당도 안 알려 줬어. 내가 너 때문에, 흑....”

    윤희가 그동안의 서러움이 밀려오는지 어깨를 심하게 들썩였다. 주인이 그녀 옆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작은 몸을 끌어안고 귀엣말을 했다.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다, 내 탓이야.”

    귓가를 간질이는 서글픈 자책을 듣자마자, 윤희는 아이처럼 목 놓아 엉엉 울었다.

    “이것 좀 마셔.”

    한참 뒤, 조금 진정된 친구의 등을 쓸며 주인이 따뜻한 물을 건넸다.

    울음을 그친 윤희는 여전히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물 잔을 내민 손을 밀어내고는, 탁자에 놓인 아이스커피를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고는 천불이 나는 속을 삭이려는 듯 얼음을 으득으득 씹으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어떻게 된 거야? 그동안 우리 속이고, 둘이 내내 같이 있었던 거야?”

    “아니야, 우리도 지금껏 서로 죽은 줄 알고 살았어. 그러다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났고....”

    어딘가 씁쓸한 아픔이 진하게 묻어나는 한마디에, 윤희는 주인과 독경이 얼마나 굴곡진 시간을 보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너, 대체 집에는 왜 없었던 거야? 여태까지 어디서 뭐 했냐고!”

    “그 집에선 쫓겨났어. 그래서 살려고 도망쳤지.”

    “뭐?? 그럼, 제일 먼저 나한테 연락을 했어야지!!”

    윤희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고함을 빽 질렀다.

    “그러려고 했는데, 태성에서 너한테도 사람을 붙일 거 같아서....”

    주인이 두 눈을 내리깐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이고!!”

    그 말에 윤희가 딱히 반박하지 못한 채, 곡소리를 내며 제 이마만 퍽퍽 쳤다.

    “어쨌든, 너랑 독경 후배 살아 있는 거 알면 원우도 좋아하겠다.”

    그 말에 주인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원우! 원우는 잘 지내? 너희 아직도 사귀는 거야?”

    “짠!!”

    윤희가 눈물로 퉁퉁 부은 얼굴을 환히 빛내며, 왼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약지에 낀 반지가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였다. 주인의 눈이 차오르는 감격으로 동그래졌다.

    “설마, 너희....”

    “그래, 이것아. 우리 결혼한다!”

    “와, 너무 축하해!!”

    주인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윤희가 뿌듯한 얼굴로 반지를 매만지며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내 지랄 맞은 성격 받아 주는 애가 원우밖에 더 있냐? 이렇게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아서 결심했어. 너, 내 결혼식은 꼭 와야 해!”

    “흠흠, 결혼 축하드립니다. 윤희 선배님.”

    그때, 어느새 다가와 그녀의 반지를 뚫어지게 눈여겨보던 독경이 불쑥 축하 인사를 건넸다. 윤희가 그런 그를 대놓고 위아래로 훑었다.

    “그나저나, 독경 후배는 엄청 성공했나 봐? 신수가 완전 훤하네. 길에서 마주쳐도 못 알아볼 거 같은데?”

    “그 말,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독경이 픽 웃으며 상대의 말을 가볍게 받아쳤다.

    “아, 맞다! 근데, 나 여기 일하러 왔는데??”

    윤희가 느닷없이 손뼉을 짝 치며 이곳에 온 목적을 고했다. 주인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윤희야, 나 부탁할 게 있어서 널 불렀어.”

    주인은 그동안 자신과 독경에게 벌어졌던 일들을 윤희에게 간략히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 교통사고가 네 이복 오빠인 현상현이 벌인 짓이라고? 그리고 넌, 그 인간이 태성그룹을 승계받는 걸 막을 계획인 거고?”

    “응, 비슷해.”

    윤희가 도도하게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정리했다. 주인은 사실 그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만,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일단 수긍했다.

    “그리고 저 시커먼 놈이 일만의 김주환 본부장이고?”

    그녀가 이번에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느긋하게 서 있는 독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래서 내가 뭘 해야 하는데?”

    윤희가 기세등등하게 눈을 빛내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 전에 먼저....”

    주인이 신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너한테 물어보고 싶어. 최대한 막아 보겠지만, 우리 일에 휘말리면 네가 다칠 수도 있거든. 난, 더 이상 나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생기길 원치 않아.”

    그 말을 하는 주인의 표정이 몹시도 괴로워 보여, 독경은 그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희가 불손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 와서 무슨.... 내가 너희 집을 드나들면서 마음이 어땠는지 알아? 진작 그 숨 막히는 집구석에서 널 빼냈어야 했는데 죽을 때까지 방치한 건 아닐까, 그 생각뿐이었어. 웃긴 게 그 집 사람들 나중엔 나도 문전 박대하더라.”

    윤희가 새삼 떠오르는 분노에 몸서리를 쳤다. 주인이 그런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고마워. 진짜로 안 잊을게.”

    “말로만 그러지 말고, 축의금이나 많이 내. 그리고 이독경, 얘 뭐 좀 먹여라. 왜 이렇게 말랐냐?”

    “안 그래도 노력 중입니다.”

    독경이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나직이 대꾸했다.

    “자, 그럼 진짜 일 얘기를 시작해 볼까? 너희가 원하는 게 뭐야?”

    윤희가 음모를 꾸미는 악당처럼 간교하게 양손을 비비적거렸다.

    ***

    “잘될까?”

    육 년 만에 만난 친구와 헤어진 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주인이 낮게 속삭였다. 독경이 부드럽게 운전대를 돌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한번 해 보는 수밖에요. 걱정돼요?”

    “그냥, 좀 불안해서....”

    그가 근심 가득한 그녀의 옆얼굴을 슬쩍 곁눈질했다. 윤희와 만났을 때만 해도 무척 밝았는데, 도로 어두워진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독경은 이신을 통해 주인의 병원 기록을 다시 확인했다.

    자신처럼 크게 다친 것은 아닐까 싶어, 대형 병원 위주로 조사하다 보니 놓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주인은 정신 병원에 입원한 전력이 있었다.

    그 자료를 집어 든 독경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자신이 없는 동안 그녀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생생하게 통감하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미련한 새끼는 주인의 상처를 보며 마냥 기뻐하기만 했다. 그것이 저를 사랑하는 증거라 여기며. 철없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선배 판단이 맞아요. 시장에 태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주면, 가치도 떨어뜨릴 수 있고 동시에 사람들에게도 위험 신호를 줄 수 있으니까요. 빠져나갈 사람들은 눈치채고 움직이겠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거예요.”

    “흠, 그럴까?”

    주인이 고뇌에 잠긴 얼굴로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시간을 좀 벌고 싶어.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면 안 되니까.”

    그 말에 담긴 묵직한 죄책감을 독경은 고스란히 느꼈다. 스스로가 만든 깊고 짙은 어둠으로 침잠해 가는 그녀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건져 내야만 했다.

    “선배....”

    그가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며 슬그머니 입술을 뗐다.

    “언제 한번 윤희 선배랑 원우 선배 초대할까요? 결혼도 축하해 주고, 얘기도 좀 나누고. 사실, 오늘은 좀 짧았잖아요.”

    “그래도 돼?”

    주인이 금세 생기가 도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독경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안 될 건 뭐가 있겠어요. 준비해 놓을게요.”

    “음, 근데....”

    갑자기 주인이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가 보조석 쪽을 힐끗거리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요리를 잘 못해서....”

    그녀가 무릎 위에 올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독경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요리야 내가 하거나, 사람 쓰면 되죠. 알아서 다 준비할 테니까, 선배는 신경 쓰지 마요. 아, 두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 정도 알려 주면 좋고요.”

    “음, 매번 요리를 맡기는 게 미안해서 그러지. 아무튼, 생각해 볼게.”

    주인이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대꾸했다. 독경이 어쩐지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갈무리하며 운전에 집중했다.

    ***

    그로부터 한 주쯤 뒤, 국내 유명 경제지에는 업계 사람들에게도 생소한 미래투자사의 김주환 대표라는 사람의 인터뷰가 실렸다.

    흔한 인물 사진 한 장 없는 기사에는 국내 기업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더불어, 원대한 포부가 실려 있었다.

    자산 건전성이 약한 몇몇 기업을 인수해,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허울 좋은 소리였다.

    기사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듣보잡’ 회사의 헛소리라는 의견과, 그래도 조금이나마 실현 가능성이 있으니 언론에 밝힌 것 아니겠냐는 견해였다.

    얼마 뒤, 이 기사에 기름을 붓는 증권가 정보지가 돌면서 파장은 더욱 커졌다.

    기사에서 콕 짚어 밝히지는 않았으나, 인수를 고려하는 대상 중 하나가 태성그룹이라는 소문이었다.

    기사 내용 중 오너 리스크가 크고 최근 신사업에 실패한 전력이 있는 기업이라는 설명이 태성을 가리킨다는 이유였다.

    물론, 이 정보 또한 주인과 독경의 작업이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최근 몇 년 사이 미래투자가 태성의 주식을 매수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소문은 거의 기정사실화됐다.

    실현 가능성이 크든 작든 신생 투자사의 먹잇감이 될 만큼 현재 상황이 좋지 않다는 판단이 서자, 사람들은 빠른 손절만이 답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주가가 떨어지고 매도가 늘자, 독경은 웃으며 그것들을 알뜰히 주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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