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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37화 (37/76)

#37화. 선물

주인이 말없이 침실 안을 둘러보자, 독경이 슬며시 눈치를 보았다.

“왜요? 뭐가 마음에 안 들어요? 침대가 좀 작은가? 혼자 쓸 땐 괜찮았는데, 둘이 쓰려면 좀 불편할 수도 있겠네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하는 그를 향해 주인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여긴 게스트 룸 없어? 이렇게 큰 집엔 보통 그런 용도로 쓰는 방 몇 개쯤은 있던데?”

“음, 그렇긴 한데....”

그녀의 물음에 무심코 답하려던 독경이 갑자기 표독하게 눈을 뜨며 외쳤다. 그제야 질문의 의도를 간파한 것이었다.

“선배가 쓸 수 있는 방은 없어요! 선배는 반드시! 무조건! 기필코! 여기서만 자야 해요!”

“그럼, 네가 딴 방 가서 자면 되겠다.”

그녀가 얄미울 만큼 온화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문제를 손쉽게 해결했다.

“전, 잠자리 바뀌면 잘 못 자요.”

그가 천연덕스럽게 아무 말이나 던지며,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주인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게 아니라, 내가 불면증이 좀 심해서 네가 불편할까 봐 그래....”

그녀는 지난 육 년간 그가 부재했던 밤들을 떠올렸다. 지독한 고독과 함께한, 상심의 날들이었다.

독경이 보란 듯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놀렸다.

“이상하다. 지난번엔 엄청 잘 자던데. 중간에 깨지도 않고....”

“그, 그거야 네가 밤새....”

주인이 빨개진 얼굴로 차마 뒷말을 꺼내지 못하고 꾹 삼켰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던 그 밤, 두 사람은 지칠 때까지 서로를 안고 또 안았다. 정신없이 잠에 빠져드는 것이 당연했다.

독경이 열기 오른 상대의 귀에 뭉근하게 속삭였다.

“걱정 마요. 내가 불면증 싹 고쳐 줄게요. 아, 그리고 잠옷도 샀어요. 옷장 안에 있으니까 갈아입고 나와요. 그동안 간단히 먹을 거 만들게요.”

그가 빙그레 웃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그녀가 양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얼굴의 열을 식힌 뒤 옷장 문을 열었다가, 기겁을 하고는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독경!!”

팔을 걷어붙인 채 치즈를 적당한 크기로 썰던 독경이 고개를 돌려 콧김을 씩씩 내뿜는 그녀를 보았다.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지금 이걸 나보고 입으라는 거야?”

주인이 제 손바닥만 한 검은색 망사 속옷과 짧은 슬립을 격렬하게 흔들었다.

“네, 왜요?”

그가 뻔뻔하게 되물었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한술 더 떴다.

“나름 고심 끝에 고른 건데, 입어 주면 안 돼요?”

“안 돼!!”

주인이 쌀쌀맞게 소리치고는 쿵쿵거리며 침실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독경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픽 웃었다. 정말이지 놀려 먹기 딱 좋은 유형이라 생각하며.

그사이 침실로 돌아온 그녀는 걸칠 만한 다른 것을 찾아볼 요량으로 다른 쪽 옷장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옷장 한구석에 구김살 하나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민트색 셔츠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육 년 전 주인이 독경에게 선물한 옷이었다. 스물두 살의 그는 그 옷을 입고 첫 여권 사진을 찍었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옷을 꺼냈다. 그러고는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섬유 유연제 향기 속에 그의 체취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이 옷을 몇 년이나 간직하고 있었을 사람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쉬이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독경....”

독경은 조금 전 그랬듯 이번에도,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귀에 닿는 음성은 어딘가 바람결에 실린 것처럼 애달팠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절로 낮은 탄성이 흘렀다.

“아....”

주인이 민트색 셔츠를 자신의 몸에 걸친 채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거, 어떻게 아직도 가지고 있어?”

주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독경이 천천히 다가서며 답했다.

“선배가 나한테 준 첫 선물인데 어떻게 안 가지고 있어요. 사고 때 잃어버린 걸 김강석한테 부탁해서 찾았어요.”

독경이 그녀의 팔보다 한참은 긴 셔츠의 소매를 다정하게 접었다.

“선배는 이렇게 나한테 많은 걸 줬는데, 난 해 준 게 별로 없네요. 슬프게도....”

쓸쓸하게 읊조리는 그 말에 주인이 눈물을 또르르 떨궜다. 온기를 머금은 눈물방울이 그의 손등에 툭 떨어졌다.

“왜 울어요?”

그가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몰라, 모르겠어.”

그녀가 그의 얼굴을 살며시 외면하며 답했다.

“감동했어요?”

“음, 그런가 봐....”

주인이 울음을 참으려 힘을 주자, 턱 끝이 바르르 떨렸다. 독경이 물방울이 올올이 매달린 긴 속눈썹에 입을 맞췄다.

“안 되겠네요. 2차는 다음에 해요.”

독경이 주인을 번쩍 안아 들며 중저음의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넓은 식탁 위에 그녀를 앉혔다.

그가 민트색 셔츠의 단추를 세심한 손길로 하나씩 풀었다.

그러자 새하얗고 매끈한 피부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그녀가 옷 안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스륵 올라가며, 감탄이 터졌다.

“이런, 야하기도 해라.”

독경이 단단한 손끝으로 벨벳처럼 보드라운 주인의 목덜미와 가슴과 허리를 차례로 미끄러지듯 쓸어내렸다.

“으음....”

주인이 작게 신음하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독경이 그런 그녀의 품으로 와락 뛰어들었다.

포근하고 안락한 느낌은 어느새 뜨겁게 펄떡이는 강렬한 전율로 바뀌었다.

꿈이 아니기를 바랐다. 아니, 꿈이라도 상관없었다. 영원히 깨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독경은 싱크대에 나른하게 등을 기대앉은 채, 주인을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입에 포도 한 알을 넣어 주고는, 제 입에도 쏙 넣어 오물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이독경,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음, 글쎄요. 아까 그 속옷 입어 준다면?”

짓궂은 농담에 불쑥 약이 오른 주인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윽!”

독경이 과장된 동작으로 맞은 부위를 잡고는, 그녀의 등 위로 풀썩 쓰러졌다.

“됐어, 딴 사람 알아보지 뭐.”

“뭔데요?”

그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

“나 말고, 누구?”

독경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주인이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보며, 나직이 이름을 불렀다.

“윤희.”

독경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큼이나 그녀와 애틋했던 김윤희의 똘똘한 얼굴이 절로 그려졌다.

사고 뒤에도 윤희는 종종 주인의 집을 찾았었다. 그는 가끔 그 광경을 멀찍이서 지켜보고는 했다.

집을 나서는 그녀의 얼굴은 늘 지치고 슬퍼 보였다. 쾌활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근데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죽었던 친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 불같은 성미로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이 앞섰다. 주인이 초조한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나, 맞아 죽을지도 몰라. 같이 가 줄 거지?”

그녀가 겁먹은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독경이 단정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사슴 같은 눈망울로 하는 부탁을 어찌 거절할 수 있으랴.

***

윤희는 피곤에 찌든 얼굴로 출근하자마자, 커피부터 들이부었다. 가뜩이나 마감이 코앞이라 고된데, 결혼 준비까지 해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그녀가 청첩장 샘플을 보며 고민하는 사이, 칸막이 너머로 신 부장이 지나가며 꿍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내가 산 종목은 오르질 않냐?”

명색이 경제지 부장급이나 되는 사람인데도, 주식 투자는 일반인과 별다를 바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메일함을 열었다. 그러다 자신이 예전에 접촉했던 일만산업에서 때늦은 회신이 온 것을 확인하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일 년여쯤 전, 기업 혁신의 성공 사례를 다룬 특집 기사를 위해 인터뷰를 요청했더랬다.

하지만 회사 측에서는 답변이 없었고, 윤희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다른 기업을 억지로 끼워 넣어야만 했다.

‘언제 적 인터뷰를 지금 하자는 거야? 하지만 하기만 하면, 단독 타이틀을 달 순 있지!’

괘씸하기는 했으나 나름 좋은 기회였기에, 그녀는 씩 웃으며 머리를 굴렸다.

일만그룹의 김주환 실장은 인터뷰를 비롯한 공식 석상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미지의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기사만 나간다면, 화제에 오를 것은 자명했다.

윤희가 빠른 손놀림으로 답장을 보냈다. 일정 조율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상대 쪽에서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지만 그리 까다롭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사진 촬영은 금지, 엠바고가 풀리기 전까지는 비밀을 엄수할 것. 그쯤은 의리 하나는 끝내주는 그녀에게 아무 일도 아니었다.

***

일만 측의 태도는 기대보다도 훨씬 깍듯했다. 윤희는 자신을 데리러 온 차에 오르며, 생각했다.

‘콧대 높고 재수 없는 회사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매너가 괜찮은걸?’

그리고 차에 내려서는 그들의 배포에 혀를 내둘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김주환의 비서라 소개한 여자가 한 말 때문이었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 저희 쪽에서 카페 전체를 대관했습니다. 편한 자리에 앉아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그녀가 몹시 흡족한 눈길로 카페 안을 훑어보다, 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를 골랐다. 그러고는 창밖에 펼쳐진 푸른 잔디밭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커피를 홀짝였다.

탁자 위에는 수첩과 펜, 녹음용 휴대 전화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잠시 뒤, 등 뒤로 발소리가 또각또각 들렸다. 윤희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김주환은 분명 남자라고 했는데? 잘못 찾아온 손님인가?’

윤희가 확인차, 몸을 돌려 발소리의 주인공을 보았다. 가녀린 체격에 단발머리를 한 미인이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눈을 마주친 그녀가 자신을 향해 옅게 미소 지었다.

윤희가 더욱 얼빠진 표정으로, 무척이나 낯익은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눈앞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혀, 현주인...?”

황망하게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카페 안을 흔들었다. 그러자 주인이 고아하게 눈을 휘며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어, 윤희야?”

그리고 그 뒤로 까만 머리를 단정히 넘긴 채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독경이었다.

“윤희 선배, 오랜만이에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결국 윤희는, 두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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