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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36화 (36/76)
  • #36화. 동맹 (3)

    “네,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근데 궁금한 건 현상현과 동행한 이 남자, 이자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독경이 상현 뒤에 어른거리는 인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는 데다, 반쯤 가려져 있어 식별이 어려웠다.

    주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한참을 관찰하다 입을 열었다. 얼굴은 정확하지 않았지만, 체형이나 머리 모양이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저 사람은, 현상현 친구 박중우야.”

    “아는 사람이에요?”

    그의 질문에 그녀가 아는 대로 대답했다.

    “응, 현상현이 유학 때 사귄 친구 중 하나거든. 집에서 몇 번 본 적 있어.”

    “혹시 태성그룹 자금운용 팀장 박중우랑 동일인인가요?”

    잠자코 뒤에서 지켜보던 이신이 불쑥, 개입했다.

    “현재 직책이나 소속까진 모르지만, 어쨌든 전부터 현상현 밑에서 일하긴 했어요.”

    “음, 누군지 알 것 같네요.”

    독경이 기억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머릿속에 청담 술집에서 상현과 모임을 하는 일행의 면면이 빠르게 스쳐 갔다.

    “이거, 우리 현상현 부회장의 막역한 친구가 자금운용 팀장이라니.... 냄새가 너무 나는데?”

    독경이 긴 눈을 반달로 접으며 웃었다. 어쩐지 몹시 즐거워 보였다.

    주인이 제법 힘 있는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했다.

    “지금은 일단 서류상 대표자인 스티븐 리가 누구인지, 박중우가 비자금 조성에 얼마만큼 관여했는지 알아보죠. 파다 보면 분명, 연결 고리가 있을 겁니다.”

    “선배는 할 일이 더 있잖아요.”

    그때, 그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신변 정리.”

    짤막한 한마디에 주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직이라니. 회사나 대표에게 무책임한 직원으로 남는 것 같아 썩 내키지 않았다.

    “왜요? 걱정돼요? 같이 가 줄까요?”

    독경이 옆에서 호들갑을 떨자, 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혼자 할 수 있거든? 게다가, 아니 됐다. 아무튼 알아서 할게.”

    그녀의 머릿속에 그가 지승을 상대로 쓸데없는 기 싸움을 벌이는 광경이 선연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독경은 포기하지 않고 몇 번 더 따라가고 싶은 티를 팍팍 냈다. 주인이 매정히 거절하는 바람에 결국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이신은 엄격하고 냉혹하기 그지없던 상사가 마트 바닥에 드러눕는 애들처럼 떼를 쓰자, 못 볼 꼴을 본 사람처럼 휑 하니 나가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산재라도 신청하고 싶었다.

    ***

    느닷없이 며칠이나 휴가를 사용한 주인이 면담을 요청했을 때, 지승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최근 들어 이상하리만치 불안하고 초조했던 마음이, 이를 예감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 예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안경을 벗어 던진 주인의 얼굴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껏 지승이 본 그녀는 어딘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가녀리고 처연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여인은 완전히 달랐다.

    야윈 뺨 위로 발그레한 홍조가 돌았고, 안경으로 숨겼던 눈동자에는 강렬한 안광이 번뜩였다. 늘 까슬까슬하던 입술도 어느새 물이 올라 촉촉하고 매끈해졌다.

    “도경 씨....”

    지승이 엉거주춤 일어서며 그녀를 맞았다. 주인이 경직된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해요.”

    그녀 또한 자신 못지않게 긴장한 것 같아 그는 약간 안심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숨 막히는 긴장감에 짓눌려 체면이고 뭐고 내팽개친 채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일단, 앉으시죠.”

    지승이 침음을 삼키며 오도카니 서 있는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오늘까지 휴가 아니었습니까? 갑자기 무슨 일로 절 찾아왔는지....”

    그 말에 주인이 잠시 주저하다, 대답 대신 흰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그가 그 봉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이런 말씀을 드려 송구하지만, 제가 개인적인 일로 회사를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가 차마 봉투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탄식했다.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지승이 욱신거리는 자신의 이마를 지그시 짚으며, 꽉 잠긴 음성으로 물었다.

    “예상 못 한 일이라, 많이 당황스럽네요. 분초를 다툴 만큼 급한 겁니까?”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닌데.... 제게는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주인이 ‘정말’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본인의 인생에 다시 없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오랫동안 열망한 일이었다.

    “저도 이렇게 인사를 드릴 줄은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인수인계서를 작성해 보내겠습니다.”

    미안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확고부동한 태도에, 지승은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솔직히, 많이 아쉽습니다. 하지만 제가 붙잡을 상황은 아닌 것 같네요.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네, 저도 감사했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어 주인과 악수를 했다. 은은한 온기가 감도는 우아한 손을, 이렇게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그렇게 지승은 일말의 여지라도 남기고자 했다. 주인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조금의 아쉬움과 서운함을 뒤로한 채, 주인은 짐을 챙겨 나왔다. 현도경으로 살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은 첫 직장이었기에 더욱 애상에 젖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길을 걷는데, 도로 한쪽에 강렬한 빨간색 스포츠카 한 대가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며 서 있었다.

    엄청나게 눈에 띄는 차네, 따위의 생각을 하며 주인은 그 옆을 무심하게 지나쳤다.

    “선배!!”

    그때, 누군가가 차 문을 열고 나오며 그녀를 향해 외쳤다.

    주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가벼운 점퍼 차림에 짙은 선글라스를 낀 독경이 차에 기대서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광고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세련되고 근사한 모습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서 뭐 해? 이 차는 또 뭐고?”

    그가 상큼하게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딴 데로 샐까 봐 데리러 왔죠. 퇴사 축하해요.”

    “축하씩이나.”

    주인이 따라서 픽 웃었다.

    “그리고 우리 회사에 입사한 것도 환영하고요, 타요.”

    독경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차에 타라는 신호를 보냈다.

    “어디 가는데?”

    “글쎄요. 어디 가고 싶은데요?”

    차에 탄 그녀가 묻자, 그가 운전대를 손으로 톡톡 두들겼다.

    “나 배고파.”

    “내 하나뿐인 직원이 배고프면 안 되죠. 뭐 먹고 싶어요? 뭐든 말만 해요.”

    “진짜로, 뭐든?”

    그 말에 주인이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에 잠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독경이 가지런한 치아를 활짝 드러내며 웃었다.

    새빨간 스포츠카가 평일 오후의 한산한 시내를 미끄러지듯 내달렸다. 머리 위로 불어오는 봄바람이 딱 기분 좋을 만큼 선선했다.

    “아니, 정말 이걸로 되겠어요?”

    독경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뚝배기 위에 숟가락을 탁 얹었다.

    “이게 뭐 어때서?”

    주인이 뽀얀 국물을 한 숟갈 떠 마시며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이래 봬도 첫 회식인데 돼지국밥집이 웬 말이냐고요.”

    그가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거추장스럽다는 양 손으로 쓸어 올리며 입을 삐쭉거렸다. 그녀가 덤덤하게 잘 익은 깍두기를 하나 집더니, 보란 듯 아삭아삭 씹었다.

    “그냥 국밥집 아니거든? 삼십팔 년 전통의 노포라고. 그렇게 툴툴대더니 국물까지 싹 비웠네?”

    주인이 깨끗하게 비워진 상대의 그릇을 보며 핀잔을 주었다.

    “맛없다곤 안 했어요.”

    독경이 다시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퇴사 기념으로 내가 살게. 다음엔 이 비서님이랑 같이 근사한 데서 회식하자.”

    “흠....”

    그가 뜨뜻미지근하게 반응했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올린 그녀의 손등을 제 손끝으로 슥 건드렸다.

    “바로 우리 집으로 갈 거죠?”

    주인이 손을 쑥 빼며 맞은편을 흘겨보았다.

    “안 돼. 집에 가서 짐도 챙겨야 하고, 집주인이랑 통화도 해야 해. 정리할 게 많아.”

    “집 문제는 이 비서님이 해결해 주실 거고, 필요한 물건들은 이미 다 준비됐고. 그러니 바로 가면 되겠네요.”

    독경이 빠져나가려던 손에 깍지를 꼭 끼었다.

    “그걸 언제 다 했어?”

    “선배가 최지승 만나는 동안.”

    그가 남은 손으로 턱을 괸 채 생글거렸다. 그녀가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1차는 선배 하자는 대로 했으니까, 2차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죠?”

    독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두 사람은 펜트하우스로 돌아왔다.

    “자신만만하게 얘기하길래 엄청 좋은 데 가는 줄 알았더니, 결국 여기네?”

    주인의 딴지에, 앞서 걷던 독경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음, 다른 데 가고 싶어요? 지금이라도 호텔 예약할까요?”

    집이든 호텔이든 단둘이 있고 싶다는 엉큼한 속셈을 모를 리 없는 그녀가, 뚱하게 답했다.

    “나한텐 여기나 호텔이나 낯설고 불편하긴 똑같은데, 뭐. 그냥 있자.”

    “허! 오늘부터 여기가 선배 집인데, 낯설고 불편하면 어떡하죠? 일단, 구경부터 합시다!”

    그가 그녀의 등 뒤로 다가오더니, 양손으로 어깨를 살포시 잡으며 앞으로 밀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여기가 이 집에서 가장 큰 욕실이에요. 선반 열면 세면도구 다 있으니 써요. 아, 스파 기능도 있으니까 하고 싶으면 얘기하고요.”

    평소와는 달리, 독경은 들뜬 사람처럼 조잘조잘 잘도 떠들었다. 주인은 그 모습이 어이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그가 다시 떠밀며 부엌을 지나쳤다.

    “여긴 부엌이고요. 급한 대로 과일이랑 채소랑 고기도 종류별로 사 두긴 했는데, 어차피 도우미분 오시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그럼, 이번엔 이쪽으로 갈까요?”

    독경이 이번에는 주인의 손을 덥석 잡더니,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여긴, 우리의 첫 만남이 성사된 서재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그녀를 이곳에서 가장 내밀한 장소로 이끌었다. 침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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