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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35화 (35/76)
  • #35화. 동맹 (2)

    생각지도 못한 독경의 요구에 주인은 약간 난감한 기색을 내비쳤다.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을 전혀 정리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주인이 친절하지만 원칙을 중시하는 제 상사의 얼굴을 찬찬히 떠올리며 머뭇거리자, 독경이 답을 재촉이라도 하듯 팔짱을 낀 채 빤히 보았다.

    이윽고, 결단을 내린 그녀가 수긍의 뜻으로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만면에 띠었다.

    그때, 이신이 매끄럽게 다음 조항으로 넘어갔다.

    “고정 급여 외에 근무 기간 동안 발생하는 수익은 50 대 50으로 분배합니다. 이의 있으신가요?”

    그 말에 주인이 자못 비장한 표정과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성과급은 필요 없어요. 돈 때문에 이 일을 시작하는 게 아니니까. 다만, 공동의 목표가 생긴다면 확실하게 달성해야 할 겁니다. 저도, 대표님도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독경은 거만하게 낀 팔짱을 풀지 않은 채 여유롭게 웃었다.

    “당연한 말씀을. 그럼, 이제 내 조건을 하나 더 말해도 되죠?”

    “네, 말씀하세요.”

    그녀가 제삼자인 이신을 의식하며 정중한 태도를 갖췄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정리하고, 여기로 들어와요. 아, 물론 이것도 당연하지만 오늘부터 실행해야 합니다.”

    “네? 아, 저 그게....”

    주인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만 뻐끔거렸다. 부끄러움은 그녀 몫이었다.

    “흠흠.”

    옆에서 헛기침을 하며 민망한 상황을 외면하고자 하는 이신의 모습이 너무나 명확하게 보였던 것이다.

    “저, 여기는 공적인 자리 아닌가요? 사적인 부분은 따로 조율하시는 게....”

    “왜요? 이왕 계약서 쓰는 거 편하게 한 번에 하자고요. 할리우드 커플들 보면 혼전 계약서 같은 거 쓰잖아요. 우리도 비슷한 거죠. 이 비서님 바쁜 분이니까, 그냥 한꺼번에 진행하는 편이 효율적이기도 하고요.”

    독경이 얄궂게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러자 주인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작게 투덜댔다.

    “여기가 무슨 할리우드라고....”

    그때, 그가 정장 안주머니에서 검은색 카드를 불쑥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활동비는 이걸로 결제해요. 아, 한도 걱정은 말고.”

    주인이 눈앞의 카드를 멀뚱하게 보는 사이, 독경이 굵은 손가락을 우둑 꺾으며 본격적인 주제를 꺼내 들었다.

    “그럼, 이걸로 의견 조율은 다 끝난 거죠? 변동 사항 추가해서 계약서는 다시 작성하죠. 자, 이젠 선배가 보따리를 풀 차례예요. 태성과 관련된 정보라는 게 뭐예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탁자 위에 두툼한 서류 봉투를 툭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도도하게 서 있는 이신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 괜찮아요. 이 비서님은 믿어도 돼요.”

    독경이 나직이 말했다. 그러자 주인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맞은편을 꿰뚫어 보았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

    독경이 방만하게 젖혔던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자세를 바르게 고쳤다. 그의 안광 또한, 살벌하게 빛났다.

    “뭐든지.”

    “왜 태성 주식을 비밀리에 사들이는 거야?”

    “그러는 선배는 나한테, 정확히는 김주환한테 왜 접근했어요?”

    “내가 먼저 물었어.”

    주인이 단호하게 질문을 끊어 버렸다. 마치 주도권을 상대방에게 넘기지 않겠다는 양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주인과 독경 모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아주 미세한 틈이라도 보이는 순간, 목덜미를 노릴 것 같은 비정함마저 느껴졌다.

    “태성 먹으려고요.”

    독경이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냉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핵심을 찌르는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녀가 대답 대신 대화의 물줄기를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네가 아무리 일만의 자금력을 등에 업었대도 쉽지 않을 텐데,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다른 방법을 써야죠. 편법이든, 불법이든.... 예를 들면, 선배가 손에 쥔 패를 이용한다든가....”

    그가 비열하고 냉혹한 속내를 굳이 감추지 않았다. 주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낡은 봉투를 열어 종이 다발을 꺼냈다.

    “몇 년 전쯤에 발신인 불명으로 이 서류가 왔어.”

    독경과 이신이 영어와 숫자가 복잡하게 나열된 서류를 집어 들었다. 잠시 뒤, 서류를 대강이나마 훑어본 이신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건....”

    “그건 영국령 버진아일랜드라는 곳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다는 문서입니다. 잘 알겠지만 전형적인 탈세 및 비자금 조성 방법이죠.”

    “태성에서 비자금을 은닉했다? 근데 국내 기업이라면 이 정도는 어디든 하지 않나요?”

    독경이 한 손으로 다부진 제 턱을 쓸며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그는 일만에서 이 부서, 저 부서를 떠돌며 온갖 문제를 찾아내 정리하는 해결사였다. 그리고 그 문제 안에는 당연하게도 각종 비리가 존재했다.

    소소한 개인 차원의 횡령에서부터, 부서 전체가 비리에 가담한 정황도 있었고, 때로는 대표 본인이 사업 부문 전체를 자신의 이윤을 위해 활용하기까지도 했었다.

    그런 일들을 수도 없이 목격하다 보니, 눈앞에 비슷한 일이 또 나타난다 한들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주인이 천천히 일어서서 독경의 등 뒤로 다가가더니 다른 종이를 들어 보였다.

    “아니, 그룹 차원에서 조성한 비자금이라기엔 송금 규모가 작아.”

    “그럼?”

    그제야 그는 흥미가 동했는지 길게 찢어진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회사 차원이 아니라 개인이 착복했을 가능성은? 그리고 태성 내부에서 이 정도 자금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현상현 부회장?”

    이신이 바짝 마른 입술을 슬며시 뗐다. 독경이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지금 선배의 추론엔 비약이 너무 많아요. 자료 출처가 어디예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발신인 불명이라 정확히 파악할 순 없었어.”

    “분명, 믿을 만한 내부인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가 확인차 되묻자, 그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짐작 가는 데가 있어. 이 자료를 받은 후에 뉴스에서 김 실장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독경이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약간 흥분한 어조로 질문을 우르르 쏟아 냈다.

    “김강석이 선배한테 이 자료를 줬다고요? 왜요? 태성의 개가 제 주인에게 불리한 자료를 왜 선배한테 넘겨요?”

    “정확히 말하자면 김 실장님은 ‘현태성’의 개지, ‘현상현’의 개는 아니거든. 그리고 이 서류를 나한테 준 이유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주인이 자신 없는 말투로 뒷말을 모호하게 흐렸다. 이신이 조심스럽게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현도경 아니 현주인 씨는 김 실장님의 죽음에 현상현 부회장이 관련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상대의 예리한 지적에, 주인과 독경 모두 일순 숨을 멈췄다. 잠시 뒤, 그녀가 결연하게 답했다.

    “네.”

    짧은 정적이 흐른 후, 주인이 설명을 덧붙였다.

    “꼭 범인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시기가 너무 절묘한 건 사실이에요. 김 실장님이라면 제가 그 집을 나온 순간부터 따라붙었을 테니, 소재는 진즉 파악했겠죠. 그런데 내내 잠잠하다 자신이 죽기 직전에 이 서류를 넘겼다? 그건 본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거라는 사실을 예상했다는 의미 아닐까요? 그럼, 이 자료가 공개됐을 때 가장 많이 손해를 입을 사람은 누굴까요? 이 회사의 실소유주겠죠.”

    “그럼, 문서상 기업 대표로 명시된 스티븐 리라는 사람을 찾으면 진짜 주인이 누군지 확실히 알 수 있겠네요.”

    독경이 말을 이어받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더니, 그녀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나도 그동안 놀고 있었던 건 아니에요. 현상현 주변에 사람을 좀 심어 놨거든요.”

    “현태성도 아니고, 왜 하필 현상현이야?”

    주인이 궁금증 어린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가 순식간에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빠드득 물었다.

    “김강석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바로 현상현이거든요.”

    그녀의 동공이 급격하게 확장됐다. 하지만 그의 폭탄 발언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 가지 더 있어요. 우리가 죽을 뻔했던 그 사고, 현상현이 꾸민 짓이에요.”

    독경은 서재에 있는 PC에 작은 칩을 꽂았다. 그러고는 해상도가 낮은 동영상 하나를 재생시켰다.

    주인이 흐릿한 화면으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건 김강석의 뒤를 캐다 찾은 거예요. 당시 사고를 수습하면서 빼돌린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 중 하나죠.”

    그녀가 그의 설명을 들으며 모니터를 주시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던 그날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어? 저 차....”

    “맞아요, 우리 뒤를 쫓던 그 차예요.”

    주인이 갑자기 등장한 검은 차량을 알아보자, 독경이 수긍하며 설명을 계속했다.

    “김강석은 사고를 수습하면서 검은색 차들도 화물차로 인해 연쇄 추돌을 당한 피해 차량인 것처럼 꾸몄어요. 자연히 블랙박스 영상들을 회수할 수밖에 없었고요. 이건 둘 중 앞선 차에서 찍힌 거예요.”

    그의 말이 끝나자, 화면 속에서 뒤따르던 검은 차가 도로에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 뒤, 양복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들은 일행이 탄 차를 확인하려는 듯 비척거리며 다가오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독경이 동영상을 정지했다. 그러자 화면 중앙에 한 남자의 얼굴이 식별 가능할 정도로 잡혔다.

    “아....”

    주인이 짙은 탄식을 내뱉었다. 무척이나 낯익은 얼굴이 얼빠진 표정으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제 이복 오빠 현상현이었다.

    “미친 새끼....”

    막연하게 짐작은 했으나 막상 두 눈으로 목격하니, 고운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가 분노에 찬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진정하라는 듯 말을 걸었다.

    “곧, 현상현은 어딘가로 다급히 전화를 걸어요.”

    “김 실장님이군.”

    주인이 자신의 말라붙은 입술을 손으로 거칠게 뜯으며, 짓씹듯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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