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동맹 (1)
어느덧 자정을 훌쩍 지나고 있었다.
“정말로 선배 얘기 안 들려줄 거예요?”
독경이 주인의 윤이 나는 머릿결을 손으로 살포시 쓸어내리며 물었다.
“그때 얘긴 별로 하고 싶지가 않아. 그냥, 너무 슬프고 아팠던 기억밖에 없어서....”
그녀가 쓸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말에 그가 측은한 눈길을 보냈다.
“이런 말 하면, 나쁜 거 알지만.... 솔직히 조금 기쁘기도 해요. 내가 선배한테 그만큼 중요한 존재라는 걸 확인받는 기분이거든요.”
독경이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이기적인 심정을 털어놓았다. 주인이 옅게 미소 지으며 그의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나한테 넌, 단 한 순간도 중요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이번에는 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거 알아요? 선배는 말을 참 예쁘게 한다는 거. 말도 생김새를 닮아서 그런가? 가끔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릴 땐 사람 열받게 하는데, 또 이럴 땐 살살 녹인단 말이죠. 여우같이.”
“풋!”
약이 바짝 오른 얼굴로 자신을 흘기는 독경을 보며, 주인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짤막한 감상을 덧붙였다.
“여우는 너 같은데? 꾀 많고, 약삭빠른 게.”
“흠, 선배 눈엔 내가 그렇게 보이나 보죠?”
그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채며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래서 싫어요?”
독경이 커다란 제 몸으로 가녀린 상대의 몸을 지그시 누르며 대답을 요구했다. 주인이 은근한 압박감에 숨을 몰아쉬며 순순히 시인했다.
“아니, 그래서 좋아!”
그 대답이 몹시도 만족스러운지 독경은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는 그녀의 입술에 제 입을 가볍게 맞췄다.
주인이 슬며시 눈을 감으며, 자신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 그가 그녀의 목덜미를 신나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새하얀 피부가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독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을 지나쳐 아랫배까지 깊게 빨아들이며 울긋불긋한 흔적을 남겼다.
“아... 아읏....”
주인이 달뜬 신음을 내뱉으며, 그의 뒷머리를 틀어쥐었다. 그녀가 머리를 거칠게 잡아당길수록, 독경은 길고 매끈한 두 다리 사이로 제 머리를 더욱 처박았다.
현란하게 놀리는 그의 혀끝이 음부를 길게 핥다, 이내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돌기를 빠르게 자극했다.
그리고 동시에 마디가 굵은 손가락을 뻐끔거리는 입구 안으로 쑥 밀어 넣고는 손끝으로 내벽을 휘저으며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위아래에서 한꺼번에 몰아치는 자극에 주인은 금세 허리를 활처럼 휘며 허벅지 안쪽을 벌벌 떨었다.
“아아, 으흑....”
흐느낌처럼 터지는 신음에, 독경이 고개를 들며 씩 웃었다. 그러고는 너른 상체를 불쑥 일으키며 한 손으로 제 바지 단추를 툭 끌렀다.
주인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잘 빚은 육체를 홀린 것처럼 빤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나신이 된 독경이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양손으로 꽉 잡더니, 자신 쪽으로 쑥 잡아당겼다.
“앗!”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주인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가 그녀의 탄력 있는 하복부에 코끝을 문지르며 핀잔을 주었다.
“이제 진짜 시작인데, 그렇게 멍하게 있으면 안 되죠.”
독경이 주인의 몸 안으로 느릿하지만 묵직하게 비집고 들어갔다.
그는 늘 그렇듯 그녀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고통과 쾌락의 경계에서 관능에 사로잡힌 표정을 지켜보았다.
“아, 너무... 너무 좋아요....”
독경이 그녀의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나, 나도....”
주인이 숨을 거칠게 헐떡이며 화답했다. 그러자 그가 허리를 부드럽게 치대며, 입을 열었다.
“선배 얘기해 줘요. 궁금해요.”
“으음, 싫어.”
그녀가 제 얼굴을 침대보에 파묻으며 거부했다. 곧장, 그가 허리를 사납게 움직였다.
“헉!”
급작스러운 난폭한 동작에 주인이 숨을 멈추며, 그의 어깨를 손톱이 박히도록 꽉 붙잡았다.
“얘기 안 해 주면, 밤새 괴롭힐 거예요.”
독경이 장난스럽지만, 어딘가 음흉한 미소를 띤 채 경고했다. 주인이 희미하게 숨을 몰아쉬며 간청했다.
“그러지 마.”
“그러니까 말해 줘요.”
그가 느닷없이 격렬하게 허리를 치받았다.
조금 전 손가락과는 확연히 다른 자극이 주인을 버겁게 했다. 달궈진 강철처럼 뜨겁고 단단한 신체가 안을 찌르고 비비더니, 미친 듯이 긁어 댔던 것이다.
그녀가 대답 대신, 신음이 새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온몸에 힘을 바짝 주었다.
“흣!!”
그러자 독경의 입에서 탄식이 터졌다. 질벽이 수축하며 제 성기를 비틀 듯 꽉 쥐어짰던 것이다.
반듯한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며, 목에 핏대가 불뚝 섰다. 저릿한 감각에 흥분한 그가 더욱 강하게 허리를 내리찍었다.
퍽퍽, 하며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음이 한참을 이어진 끝에, 독경이 부들부들 떨며 사정을 했다.
주인이 반쯤 풀린 뇌쇄적인 표정을 지으며 제 가슴에 토해진 뜨끈한 액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그가 헛웃음을 짧게 짓더니, 한 팔로 그녀의 몸을 휙 뒤집었다.
“왜...?”
주인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독경이 다시 묵직해진 제 것을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문지르며 낮게 말했다.
“내가 좀 급해서. 오랜만이기도 하고....”
독경은 결국, 동이 틀 무렵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주인은 기진맥진한 몰골로 죽은 듯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그런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며 애써 눈을 감았다.
그동안 쌓였던 욕구는 조금이나마 해소했지만, 과거에 대한 단서는 끝끝내 하나도 얻어 내지 못한 탓이었다.
***
주인이 눈을 뜬 시각은 정오를 막 지날 무렵이었다. 비몽사몽 한 얼굴로 잠시 뒤척이던 그녀가 느닷없이 번쩍, 눈을 뜨며 고함을 내질렀다.
“으악!! 느, 늦었다!!”
지적이고 차분한, 평소 모습답지 않게 그녀는 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려 기를 썼다. 누가 보아도 지각한 사람의 행동임이 틀림없었다.
가운만 가볍게 걸친 채 주스를 들고 침실 안으로 들어오던 독경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저렇게 갈팡질팡하는 모습은 꽤 희귀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선배 폰으로 최지승한테 문자 보내 놨으니, 천천히 일어나도 돼요.”
그의 말에 약간의 이성을 되찾은 주인이 야채 주스가 담긴 잔을 받아 들며 질문했다.
“뭐라고 보냈는데?”
“음, 남자 친구랑 뜨거운 밤을 보내느라 피곤해서 출근 못 하겠습니다. 이렇게?”
“뭐??”
주인이 빽 소리를 지르며 도끼눈을 하고 그를 째려보았다. 독경이 빙글빙글 웃으며 이번에는 제대로 대답했다.
“그냥, 몸이 안 좋아서 오늘 하루 쉬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바로 알겠다고 답장 주던데요?”
그에 안심한 그녀가 짧게 한숨을 쉬고는 주스를 한 모금 마시려다, 동작을 우뚝 멈췄다.
“근데 비번은 어떻게 풀었지?”
의심 가득한 상대방의 눈초리에 그가 빙그레 웃었다.
“전에 슬쩍 봐 뒀어요.”
“음, 빨리 바꿔야겠군....”
주인이 주스를 다시 입가에 가져가며 엄숙하게 말했다.
“밥 먼저 먹을래요? 씻을래요?”
독경이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물었다.
“씻고 싶어.”
그녀가 옆에 놓인 가운을 입으며 대꾸했다.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그동안 아침 준비해 둘게요.”
“응, 부탁해.”
주인이 욕실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독경은 이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비서님, 오늘 하루는 쉬겠습니다. 중요한 일정은 없죠?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조사해 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태성그룹 차녀 현주인의 의료 기록이요. 네, 예전에도 한번 본 적 있는데, 아무래도 놓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요. 부탁드립니다.”
통화를 마친 그가 두 눈을 음험하게 떴다.
주인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기어이 입을 열지 않았지만, 독경은 알고 싶었다. 그녀의 삶에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한 톨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단, 저쪽은 됐고....”
독경이 들고 있던 휴대 전화를 식탁 위에 툭 내려놓으며, 욕실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며 한쪽 입꼬리를 슥 말아 올렸다.
“그럼, 이쪽은 다시 도전해 볼까?”
그가 미끄러지듯 욕실 문 앞으로 가더니, 느긋하게 손잡이를 돌리며 뻔뻔한 목소리로 외쳤다.
“선배, 저 들어가요.”
희뿌연 수증기 사이로 당혹스럽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독경은 대충 무시하고 가운을 훌렁 벗으며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잠시 뒤, 꽉 닫힌 문 너머로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에 희미한 신음이 섞여 들렸다.
“근데 말이죠.”
독경이 주인 앞에 노릇하게 구운 빵과 달걀이 담긴 접시를 놓으며 운을 뗐다.
“내가 선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려서 놓친 게 있는데, 태성과 관련된 정보라는 게 대체 뭐예요?”
“아!”
주인이 토스트를 베어 물려 입을 크게 벌리다, 그대로 탄성을 질렀다.
“안 알려 줌.”
곧이어, 그녀가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빵을 바삭 깨물었다.
“아, 궁금한데.... 선배는 왜 아무것도 나한테 말해 주지 않아요?”
그가 식탁 맞은편에 앉으며 서운한 티를 팍팍 냈다.
“아직 나, 너랑 계약 안 했거든?”
그녀가 젖은 머리를 손으로 툭툭 말리는 그에게 새침하게 말했다.
“아니, 우리 사이에 계약이 필요한가요?”
“무슨 소리야? 계약서 들이밀면서 어떻게든 엮으려 한 사람은, 너잖아!”
독경이 억울한 얼굴로 항변하자, 주인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선배가 날 안 만나 줄까 봐 그런 거였죠. 일종의 보험이랄까?”
“그럼, 지금은? 지금은, 날 믿어?”
어딘가 예리한 질문에 독경이 한 손으로 제 턱을 문지르며 괴롭게 끙끙거렸다.
“모르겠어요....”
알다가도 모를 그녀의 속내 때문에 그는 종종 불안했다. 주인이 씩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음, 난 믿어도 되지 않나? 선배한테 못된 짓, 나쁜 짓 절대로 안 할 건데....”
독경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에, 주인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흥! 내가 분명히 샤워할 때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무시하고 쳐들어왔으면서! 그런 사소한 것도 지키지 않는데 어떻게 널 믿니?”
“으음, 그건....”
그가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면서 궁색한 변명을 찾으려 했다. 그녀가 나직하게 선언했다.
“할게, 그 계약. 대신 조건이 있어.”
***
며칠 뒤, 주인과 독경은 다소 사무적인 자세로 서재에 마주 보고 앉았다. 두 사람 모두 격식을 갖춘 정장 차림이었다.
그런 두 사람 사이로 이신이 우뚝 섰다. 그녀는 눈앞의 남녀를 한 번씩 번갈아 본 뒤,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건조하지만 뚜렷한 목소리가 서재 안에 울려 퍼졌다.
“오늘 이 자리는 현도경 씨를 미래투자에 채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됐습니다. 앞에 놓인 계약서를 검토해 보시고, 요구 사항을 말씀해 주십시오.”
“우선....”
계약서를 한 줄 한 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던 주인이 운을 뗐다.
“계약 기간은 일 년에서 반년으로 조정했으면 합니다만?”
“왜요?”
독경이 탐탁지 않은지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어깃장을 놓았다.
계약한 기간이 길수록 함께하는 시간도 늘어날 것이 뻔한데, 반으로 툭 자르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 년은 너무 길어요. 나중에 연장하더라도 지금은 여섯 달로 바꾸고 싶습니다. 한곳에 얽매여 있는 느낌을 받긴 싫거든요.”
주인이 거리낌 없이 이유를 드러냈다.
그녀가 내건 조건에 독경은 잠시 고민에 잠기더니, 이내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요, 그럼 나도 추가할 사항이 있어요. 이 계약은 바로 지금부터 이행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