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상처 (2)
“그, 그래.... 알겠으니까 일단 손부터 놓고 얘기하면 안 될까...?”
주인이 긴장과 당혹을 애써 감추며 중얼거렸다.
“정말요?”
기대보다 너무나 손쉬운 허락에, 독경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마음이 바뀌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거듭 물었다.
“진짜, 진짜 허락하는 거예요?”
“응, 그러니까 나 밥 먹게 손 좀....”
그녀가 그의 손아귀에서 제 손을 슬쩍 빼내려 시도했다.
“아, 잠깐만요!”
그 순간 독경이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다른 손으로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할머니 선물 사러 간 김에, 선배 것도 사 왔어요. 선배는 왜 매번 이렇게 두꺼운 시계만 차요? 팔목이 예뻐서 팔찌도 잘 어울릴 텐데....”
그가 들뜬 표정으로 떠들며, 그녀가 찬 시계를 벗기려 손목과 가죽끈 사이로 손가락을 쑥 집어넣었다.
“내, 내가 할게!”
당황한 주인이 그의 팔을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독경이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 잡은 손목에 가로로 긴 흉터 같은 것이 만져졌던 것이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섰다. 독경이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자신 쪽으로 쭉 잡아당긴 뒤, 거칠게 시계를 끌렀다.
“자, 잠깐만!!”
주인이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며 다부진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을 주었다. 하지만 우람한 몸은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시간, 손목을 빤히 내려다보던 독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선배, 이게 뭐예요...?”
그의 표정이 의아함에서 깨달음으로, 당혹감에서 노여움으로 시시각각 물들어 갔다.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주인이 다급하고도 간절하게 외쳤다. 독경이 그런 상대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눈매가 더욱 냉혹하게 매서워졌다. 서슬 퍼런 안광이 흉흉하게 번뜩였다.
그녀는 그 앞에서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며, 저도 모르게 손발이 벌벌 떨렸다. 눈앞에서 흉포한 맹수를 맞닥뜨린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졌다.
독경이 어금니를 으득 짓씹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똑바로 말해. 이게 뭐야, 현주인.”
“정말 아, 아무것도....”
고양이 앞의 쥐처럼 주인은 숨을 죽인 채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깨가 자꾸만 맥없이 움츠러들었다.
“현주인.”
그가 나직하게 그러나 또박또박 힘을 주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추궁하듯 차갑게 한마디를 툭 뱉었다.
“너, 자해했어?”
그녀가 대답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길고 가는 속눈썹이 처량할 정도로 파르르 흔들렸다.
“대답 안 해? 너, 내가 없는 동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서슬 퍼렇게 궁지로 몰아세우는 질문에도 주인은 또다시 대답 대신,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현주인!!”
인내심이 바닥난 독경이 그녀의 손목을 쥔 채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식탁 위에 차려 놓은 식사를 남은 팔로 쓸어 버렸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릇들이 대리석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어느새 차게 식은 음식들도 너저분하게 여기저기 흩뿌려졌다.
“대답 안 할 거야?”
주인이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여전히 침묵했다. 그의 거친 숨소리와 난폭한 기세만이 고요한 실내 안을 섬뜩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한참 뒤, 독경이 어딘가 나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내가 직접 해 보면 되지.”
그가 바닥에 흩어진 깨진 그릇 조각 중 가장 크고 예리한 것을 골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손에 꼭 쥔 채 힘을 주었다.
따끔거리는 감각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독경은 그 통증을 무시한 채, 주먹을 쥔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손가락 틈으로 조금씩 새빨간 핏방울이 맺혔다.
“이독경, 그만해!!”
어느새 고개를 치켜든 주인이 그의 팔에 매달렸다. 그러고는 어떻게든 상처 난 주먹을 펴게 하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주먹을 더욱 꽉 쥐었다. 손등 위에 돋은 푸른 힘줄이 무자비하게 야만적이었다.
“그만해, 그만!!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그만해!!”
주인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독경이 나긋하지만 몹시도 피로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배가 뭘, 잘못했는데요?”
“그냥, 다.... 다,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제발 그러지 마, 응?”
주인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독경이 그때까지도 붙들고 놓지 않았던 그녀의 손목을 스르륵 풀었다. 그러고는 그 손으로 애달프게 흠뻑 젖은 뺨을 상냥하게 어루만졌다.
“날 믿었어야죠. 지옥 불에 떨어져도 살아올 거라고, 믿었어야죠. 왜 날 못 믿어요? 왜 날 못 믿었어요?”
그 말에 담긴 원망과 분노의 크기를 그녀는 차마 가늠할 수 없었다. 그가 뒤이어 가늘게 떨며 떠듬떠듬 말을 이어 나갔다.
“만약에, 만약에... 선배가 한... 그 짓이... 성공하기라도 했다면....”
언제나 강철을 두른 것처럼 강인하다고 느꼈던 육체가 나약하게 휘청거렸다.
그 불안과 공포가 주인에게도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녀가 이미 한번 겪어 본 절망을 독경도 똑같이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끔찍한 상상이었는지, 그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위로 한 줄기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주인의 두 눈이 커졌다. 처음 본, 독경의 눈물이었다.
“나도, 따라 죽었을 거예요. 내가 그러길 원해요?”
“아니, 행복했으면 좋겠어....”
주인이 뜨겁게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회한을 간신히 삼키며 답했다.
애초부터 독경과 거리를 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를 벗어날 수 없었고, 그는 그녀를 놓아줄 마음이 없었다.
그 현실을 받아들이자, 주인은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떨림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어쩌면 그를 위한다고 한 모든 일이 도리어 그에게 상처만을 남긴 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저 지금은 이 반가운 해후를, 다시금 깨달은 애틋한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함께 나누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여겨졌다.
뒷일은 조금만, 아주 조금만 나중으로 미루자. 설령 어리석은 욕심이라 할지라도.
“이독경, 손 펴....”
주인이 여전히 꽉 쥔 채 바들거리는 주먹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독경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제 주먹을 천천히 펼쳤다.
그녀가 피로 빨갛게 물든 그릇 조각을 빼낸 뒤, 물었다.
“집에 구급상자 있어?”
***
주인과 독경은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그가 무릎을 맞대고 앉아 구급상자 안을 뒤적이는 그녀를 애잔한 눈으로 응시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 나네요.”
독경이 선배들과 시비가 붙던 날, 어둑한 카페 안에 단둘이 남았던 기억을 상기했다.
“그러게.”
주인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약과 붕대를 꺼냈다. 그러고는 그의 왼손을 제 무릎 위에 올리고는 조심스럽게 약을 펴 발랐다.
“따가울 거야.”
“괜찮아요.”
그녀가 약을 다 바른 왼 손바닥을 붕대로 감쌌다. 그러고는 그의 오른손도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붕대를 살살 풀었다.
빨갛게 까진 채 퉁퉁 부은 손등을 보니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제는 오른손, 오늘은 왼손....”
“하하, 봤어요?”
독경이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주인은 심각해진 표정을 풀지 않았다.
“다시는 이러지 마....”
“선배도요.”
다짐이라도 받아 낼 것처럼 강경한 말에, 그가 아직도 제 손자국이 남아 있는 하얀 팔목을 응시하며 대꾸했다.
그러고는 붕대를 감은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마른 입술을 슬며시 뗐다.
“아까, 화내서 미안해요.”
“나도 그동안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
독경이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맹목적인 눈길에 숨이 막혀 주인은 그를 줄곧 외면해 왔다.
하지만 저 어둠 속에도 진주같이 영롱하게 흐르는 눈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녀는 그를 좀 달리 보았다.
그도 똑같이 상처받는 인간이라는 것을. 고통을 받으면 똑같이 괴로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말없이 상념에 잠긴 그녀의 뺨을 독경이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무슨 생각 해요?”
그의 목소리가 조금은 불안한 듯 흔들렸다.
언제나 속을 알 수 없는 주인이 그는 늘 어려웠다. 저 작은 머릿속이 무슨 생각으로 꽉 들어차 있는지 열어 보고 싶을 만큼 말이다.
“네 왼팔, 보고 싶어.”
이렇게 그녀는 뜬금없이 자신의 예상을 빗나가고는 했다.
“왜...?”
독경이 약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사이 주인이 그의 상의를 슬쩍 들어 올렸다. 독경이 얼떨결에 웃통을 벗었다.
그녀가 다정한 손길로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는 수술 자국을 매만졌다.
“많이 아프지 않았어?”
“별로요.”
“거짓말. 이렇게 큰데....”
주인이 작게 투덜거렸다. 독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나직하게 웃었다.
“진짜예요. 선배를 못 만나는 고통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어요.”
“음....”
주인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왼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가 상처 부위에 자신의 입술을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그 키스는 너무나 보드랍고 따뜻해서, 신비하게까지 보였다. 마치 상처를 치유하려는 성스러운 의식처럼, 온 정성을 다하는 것이 느껴졌다.
독경이 저도 모르게 사지를 부르르 떨었다. 어둡고 차가운 무저갱에 갇혀 있던 제 영혼이 그제야 빛을 만나 구원을 얻는 것 같았다.
그 황홀하고도 경이로운 이적을 그는, 현주인이라는 여자를 만나 비로소 경험했다.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자신은 영원히 공허 속을 홀로 헤맸으리라.
독경이 주인의 손목을 들어 흉터 위에 제 입술을 진득하게 포갰다. 그녀로부터 얻은 구원을 돌려줄 차례였다.